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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살전 1:1~5 2024-03-10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이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NT 중에서도 야고보서를 제외하면 가장 먼저 쓰여진 것으로 이해한다(AD. 52~3). 다른 교회들에게도 물론 그렇지만 바울의 열정 어린 애정이 군데 군데 느껴지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1:7)

교회의 설립 배경은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때인 사도행전 17:1~10에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아시아 전도를 접고 마케도니아로 건너가 유럽으로 건너가고 유럽 전도가 이루어 지면서 빌립보에서부터 큰 환란을 당하고 나서 빌립보 교회를 세우고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에서도 물론 복음을 전했겠 지만 교회가 세워졌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 두 도시를 거쳐서 데살로니가로 갔고 바울의 관례에 따라 유대인의 회당에 3주간을 복음을 전했지만 하나님과 성경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의 복음에 대한 응답은 반대로 나타나고 오히려 우상숭배 하던 이방 출신인 그리스인들과 귀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야손의 집에서 모임을 시작했고 이런 복음의 부흥에 시기가 난 유대인들이 바울을 잡으려고 야손의 집에 침입했지만 바울 일행을 찾지 못한다.

결국 좋은 복음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이런 소란으로 인해서 바울의 신변을 염려하는 형제들이 밤에 베뢰아로 바울과 실라를 도망을 시킨다(행1:10). 바울 일행이 베뢰아에서도 복음을 전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베뢰아에까지 바울을 잡기 위해 원정을 간다.

단 3주간의 짧은 기간동안 복음을 들은 데살로니가 교회는 급속한 성장을 했고 바울이 그들의 신앙이 자리 잡을 때까지 함께 해 주지도 못하고 도망치듯 나온 것 때문에 염려하여 디모데를 머물게 했고 아테네에서 비로소 디모데가 데살로니가로부터 소식을 가지고 바울을 만나게 된다.

디모데가 가지고 온 소식은 교회가 박해가운데 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듣고 다시 가고자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했든 것으로 나타난다(4:17~18). 이런 사정을 전해들은 바울은 자신은 불가능하지만 디모데를 다시 데살로니가로 보내고 자신은 홀로 고린도로 내려가 그곳에서 다시 디모데를 기다리게 된다.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로부터 디모데가 가져온 소식은 대부분 바울을 안심시키고 감사하게 하는 내용들이었다. 여전히 그들은 믿음의 스승인 바울을 그리워하고 들은 말씀을 실천하려고 애쓰며 오늘 본문 v3에 보는 대로 신앙이 균형 있게 잘 성장하며 핍박 가운데서도 기쁨으로 믿음을 지키는 것들이 다른 지역에까지 모범이 되고 있다는 고무적인 내용이었다.

박해에 있는 교회를 위로하고 디모데를 통해서 알게 된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을 제시하는 내용들이 군데군데 나타나는데 종말을 심각하게 들은 사람들은 ‘마지막 때가 다 되어 간다면 주님을 맞을 준비를 위해서 육신의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극단적인 이유로 일하지 않고 오히려 일을 만드는 경우까지도 있게 되었다(4:11~12). 이런 권면이 5~6개월 후에 쓰여진 데살로니가후서에 더 강한 말투로 쓰여지는 것으로 봐서 실제적으로 심각했던 것으로 보인다(살후3:8~12).

고린도 교회와 비슷한 문제도 있었는데 신앙을 한다고 하면서 과거의 부도덕한 삶을 버리지 못하고 방탕한 삶을 그대로 유지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으로 경계되고 있다(4:1~6). 또 다른 문제는 역시 종말론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죽은 가족들에 대한 걱정과 슬픔에 힘겨워하는 사람들이었다(4:13~18).

짧은 기간에 세워진 교회이면서 당시로서는 아직 체계적인 성경이 주어지지 않은 형편의 교회였기 때문에 계속되는 가르침이 없는 상태에서 믿음생활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짐작이 되기도 하는데 데살로니가전, 후서가 이 교회의 문제점들을 해결해주기 위한 편지였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형편에서 쓰여진 서신이기 때문에 통일성 있는 신앙의 체계는 별로 볼 수 없고 주로 말세 적인 내용들이 주로 다루어 지고 있는데 그것은 당시로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그만큼 긴박한 것으로 믿어졌기 때문이고 대부분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다른 바울을 통한 서신들과는 다르게 상당히 단순한(요한서신) 표현형식을 본다.

다른 바울의 서신들을 예로 들면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같은 경우 그들의 문제에 대해 논쟁하는 부분들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형식을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온화한 부모가 자식을 다독거리는 위로와 격려의 내용인 이유는 그들이 성경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고 있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다른 서신들이 신앙적 체계와 실천편으로 이루어진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데살로니가전서는 교회가 세워진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1:~3:과 교훈을 기록한 4:~5:으로 나눠볼 수 있다.

우리 교회의 올해 푯대세움 말씀도 사실 종말적 상황들을 마음에 두고 선택된 성경으로 이해된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롬13:11) 물론 당시는 직접적인 성령의 역사는 더 강했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짧은 기간과 심한 박해, 그리고 성경을 갖고 있지 못하면서도 다른 지역에 복음을 끼치는 데살로니가 교회였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교회로 무사안일을 벗어버리고 생명의 기지게를 켜야 할 것이다.



Ⅰ. 축복과 기도의 고백(1~2)

인사에서부터 축복과 감사로 시작하는 것은 그들의 상황이 그만큼 힘들었을 것임을 감안한 바울의 사랑이었을 것이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1f) 여기에서는 다른 대부분의 서신들처럼 바울이 자신의 사도됨의 확인이나 구별된 일꾼이라는 권위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박해를 받으면서도 같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저들과 자신들도 다르지 않음을 이해시키려는 의도에서 일 것이다.

여기 3 사람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돌본 인물들이지만 바울은 여기서 3사람이 복음을 위해 동일하게 역할 한 것으로 문안을 전하고 있다. 다른 사람은 그대로이지만 “실루아노(Σιλουανός, 고후1:19; 살후1:1; 벧전5:12)”는 안디옥 교회에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문제로 예루살렘에서 장로들과 사도들의 회의 후에 안디옥 교회에 함께 대표로 보내진 사람이다(행15:22, 27).

그는 신약교회의 선지자(행15:32)중 한 사람으로 나중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 요한의 일로 나눠지면서(행15:37~39) 바울과 함께 제2차 전도여행에 합류한(행15:40) “실라[Σίλας]”의 라틴어식 이름이다. 예루살렘 교회가 인정할 만큼 건전한 사람으로 바울과 함께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유대인으로(행16:37) 바울과 함께 복음 사역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디모데 역시 바울이 문제 있는 교회마다 보냄을 받고 이 데살로니가 교회 역시 바울이 계속할 수 없는 사역을 감당하며 교회를 바르게 세우는 일을 묵묵히 감당한 믿음의 아들(딤후1: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딤후2:1 내 아들아)로 그에게 직접 보낸 편지인 디모데전, 후서에 보는 대로도 육신의 건강에 대한 걱정은 보이지만(딤전5:23) 영적인 면에 있어서는 어떤 것도 책망받을 일이 없는 경건한 청년 사역자였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1m) 이제 저들에게 격려와 확신을 주고 있다. 옥중서신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라는 표현은 자주 보이지만 거기에다 “하나님 아버지와”를 덧붙임으로 저들이 생명의 복음 안에 있다는 확신과 감격을 주고자 함을 본다.

이 표현은 다르게 표현하면 ‘너희가 진리와 생명안에 확실히 서 있다.’라는 표현으로 물론 뒤에 가서도 다시 확신을 주고 있지만 이 편지의 서두에서부터 저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확신을 주고자 함을 본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1b) 앞에서 우리가 옥중서신을 상고하면서도 나눈 바 있지만 어느 교회보다도 이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이 축복은 더욱 강조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안팎으로 박해와 환란으로 인한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에 바울 사도로부터 주어지는 이 축복이 다른 곳의 사람들과는 또 다른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평강은 사람 스스로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 어려움을 이 세계정세 속에서도 보는 바이지만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평강은 쉽지 않고, 특히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내적인 평강은 환경과 상황에 관계없이 누릴 수 있는 데서 더욱 귀중하다.

“우리가 너희 모두를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2) 이것은 또 하나의 데살로니가 교회의 감격이 되었을 것이다. 바울뿐만 아니라 앞에서 거론한 세 사람 모두가 “너희 모두를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2f)라는 고백을 듣기 때문이다. 뒤에 가서 좀더 구체적인 표현을 보는데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2:8)고 말하는 데서 이것이 결코 듣기 좋은 말에 그치지 않은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2b) 이러한 같은 표현이 두 곳에 함께 쓰여 있다(롬1:9; 몬1:4). 물론 데살로니가 교회가 유대인들이나 동족들로부터 박해를 받고 있지만(2:14) 이러한 바울의 격려는 저들에게 엄청난 힘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항상 기도의 대상이 되는 것은 편안하고 잘 되는 사람들 보다는 언제나 어려움과 힘겨움을 견디는 사람들이지만, 대 사도요 선지자인 사람들에게 항상 기도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것을 들을 때 저들은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은 것 같은 감격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바울로부터 받은 편지에 자신들과 다름이 없는 격으로 격려하고 축복하고 감사하는 사랑에 데살로니가 교회는 지금까지 박해로 인한 환란과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감격을 가졌을 것이다. 저들은 그럴만한 신앙의 삶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격려와 도전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Ⅱ. 칭찬과 격려(3)

이것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인하여 지속적으로 감사하는 이유이다. 신앙에 있어서 3기둥 같은 믿음, 사랑, 소망은 바울의 다른 서신들에서도 나타나는 표현들이다(conf. 고전13:13). 그러나 좀 막연한 세가지의 표현보다 여기 기록이 확실한 것은 각각의 믿음, 사랑, 소망이 구체적으로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가장 구체적이고 분명한 묘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3가지는 하나님께서 죄인 된 인류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해 주신 사실을 믿는 것이 바탕이다.

솔로몬은 사람의 관계 속에서의 협력이 귀중함을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12)고 표현하여 세 겹 줄의 귀중성을 증거했다면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에 있어서도 믿음, 소망, 사랑이 균형 있게 자리 잡고 있다면 튼튼한 신앙이 될 것인데 감사하게도 주변의 모든 좋지 못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앙이 균형 있게 자라고 있음을 감사하고 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비록 율법주의 속에서 여러가지 혼란을 겪고 있는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6) 하는 것처럼 움직임이 없는 믿음은 의미가 없음을 야고보도 증거한 바 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2:22)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확신이며 이런 믿음은 반드시 역사(役事)를 만들어 낼 것이라는 신앙의 논리이다.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하는 논쟁은 필요 없고 반드시 역사를 일으키는 창조의 믿음만이 믿음이 있다는 사실적인 답변이다.

“사랑의 수고와” 진실한 사랑은 반드시 그 가진 자를 움직이게 하는 희생과 수고를 결과하게 되어 있다. 역시 믿음처럼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는 辭典的인 사랑은 어떤 역할 도 할 수 없다. 불(火)이라는 말이 물을 끓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불이 물을 끓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다른 모든 기대 즉, 바라는 소망은 헛될 수 있다. 지금 박해 속에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기대하고 바라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영광의 나라로 데려가시기 위해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위로였다. 이런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환란과 고난을 기꺼이 견디며 인내할 수 있음을 바울은 칭찬하고 있다. 변치 않을 분명한 소망이 있을 때 견디는 인내는 가능하다.

이런 하나님 사랑으로 나타나는 사실적인 그들의 믿음을 들으면서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라고 칭찬하는 바울의 확신이다. 단 한번의 기억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기억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 하노라는 고백이다. 오늘 우리 시대의 믿음, 소망, 사랑이 이름뿐인 안타까움을 더러 본다. 비록 연륜은 짧지만 유대인들과 동족들의 박해로 인한 환란을 견디며 믿음, 소망, 사랑을 능력과 역사로 표현한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앙의 모습을 우리 속에서도, 아니 우리 각자 속에서도 확인하자.



Ⅲ. 능력과 성령의 확신(4~5)

앞에서 확신하며 감사하고 칭찬할 수 있었던 이유를 다시 확인하는 것으로 오늘 말씀은 마무리되고 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전한 복음의 진리를 믿고 행함으로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확인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4) 이미 앞 v3에서도 감사의 구체적인 이유를 밝힌 것이었다면 여기에서는 보다 최종적인 이유를 말하고 있다. 사실 이보다 큰 확신과 감격은 또 없을 것이다. 너희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으며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확신 하나 때문에 박해도 어려움도 감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의 복음 속에서 잘려 나감과 그들의 안타까움을 탄식하면서도 하나님의 언약을 확신하기 때문에 이 안타까운 상황이 반드시 반전될 것임을 기대하면서 로마에 있는 이방인들로서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에게 자만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말을 로마서 9~11장에 증거한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다는 연예인들처럼 나 자신이 귀한 존재로부터 사랑받는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자랑스러울 수 있다. 오늘 나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는 ~야!”라는 표현이 참으로 자랑스러운가! 심지어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당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받음이 이 모든 것보다 더 의기양양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오늘날 얼마나 될까? 사뭇 궁금하다. 마찬가지로 “~야 하나님께서 너를 택하심을 아노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신앙하고 있는 가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이 아닐지라도 어떤 대상이 우리 교회나 지체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4)는 증거를 어떤 것보다 귀중하게 여기고 감격할 수 있고 또 사실적인 확신으로 충만할 수 있었으면 한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5) 이제 여기서부터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는 이유들을 ~v10 계속 기록한다.

여기서는 2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①“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5f) 복음의 효력을 누리고 기뻐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복음이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의 복음이나 우리 복음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의 복음을 데살로니가 교회 역시 함께 누리게 되었음을 감사하며 고백한다.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라 했는데 복음을 전했어도 당시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처럼 믿지 못하면 성령의 역사는 기대할 수 없다. 앞에서 역사가 없는 믿음이 의미가 없는 것처럼 희생의 수고 없는 사랑이 사랑일 수 없는 것과 소망 없이 견디는 인내가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능력이나 확신은 성령의 역사 없이는 불가능한 것으로 복음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는 큰 확신 즉,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확신을 가능하게 하고 이 확신은 밖으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한다.

당시 사람의 지혜라고 하는 아무리 고상한 철학적인 말이라도 성령의 역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능력과 확신이 불가능하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 일행이 하나님의 성령과 더불어 증거했고 데살로니가 교우들 또한 성령의 감동과 함께 들었기 때문에 당시의 안타까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능력으로 견디고 큰 확신가운데 믿음을 지속할 수 있었음에 서로가 감격하는 것이다.

②“…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5b) 바울 일행이 유대인들의 간교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서 어떤 자세로 복음을 전한 것은 이미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한 것처럼 바로 다음 2:1~12에 다시 자세히 풀어 증거하고 있다. 이미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확인한 사실이기 때문에 [너희가 친히 아나니(2:1) 너희도 알거니와(5)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11)] 라는 표현들을 반복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당시의 어떤 신비종교들과 같이 어떤 것도 감추거나 가리는 것이 없이 말이나 행동 그리고 거처나 활동 등의 어떤 것도 숨기지 않아도 부끄러움이 없었던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셨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교회로서의 아름다운 모습을 모두 갖추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사역자들의 수고를 감격으로 바꾸어 주었다. 환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지속적으로 머물고 있었다.

말만 무성한 교회이기보다는 역사하는 믿음과 헌신과 수고로 사랑을 실천했고 핍박과 환난을 소망으로 견디는 실제적인 신앙의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는 지체들로 그들의 택하심을 볼 수 있도록 복음이 말과 성령으로 심령에 확신을 가진 저들의 신앙은 겉으로는 능력으로 나타나 바울을 비롯한 다른 교회들에게 생명의 도전을 주었다. 우리 교회 또한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