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마 20:29~34 2005-09-25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는 오늘 평소보다 길지 않은 이 말씀 속에서 인생의 비극을 해결하는 적극적인 믿음과 그러한 신앙을 외면치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의 어우러짐을 배운다.

9:27~31에 두 소경의 눈 뜬 기사는 이미 한번 다룬 바 있고 이 기사는 공관 복음에는 다 나타나고 있는 내용이다.(막10:46~52; 눅18:35~43) 다만 마가와 누가는 본서와는 다르게 한 사람의 소경이라 기록하고 특히 마가는 이 소경의 이름이 [바디메오]라고 까지 기록하고 있다. 요한복음 9장의 나면서부터 시각 장애자 된 사람이 회복된 기사는 너무나 분명하고 결국 눈이 회복된 이 사람이 종교지도자들보다 더 영적인 것을 보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시각을 잃었다는 것은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없는 비극임에도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시각 장애자라는 사실 자체로서 죄인 취급을 [요9:34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 당하는 설움을 감당해야 했던 것 같다. 東西古今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바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장애자로 난 것 자체가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장애라는 사실 자체도 서러운데 죄인 취급을 당할 수 밖에 없었고[요9:2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주님께서 오셔서 이러한 잘못된 생각들을 고쳐 주심을 본다.[요9:3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또 다른 기도의 응답과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들어내는 역사를 경험하면서 우리 각자의 기도의 자세와 주님께 대한 순종을 점검해 봤으면 한다.



Ⅰ.여기 오직 절망만이 가득한 인생들이 있다.(29~30)

“저희가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좇더라, 소경 둘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

사실 범죄 한 인류는 모두가 시각 장애자들이라고 봐도 그르지 않다.(30f) 왜냐하면 진정으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존재들로서 주님께서도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사람이 거듭나지 않고는 가장 귀중한 하나님 나라를 결코 바라볼 수 없는 소경들임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우리는 자연의 森羅萬象의 신비를 보면서 감탄하게 되지만 육의 눈으로 보는 감격은 결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몇 번 가서 보고 나면 신비감은 적어지고 이내 실증을 내고 만다. 그러나 영적인 신비를 보면 더욱 감탄해 마지 않을 것이고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하는 간격은 참으로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정확한 비교가 불가능할 것이다.

천국을 보는 사람을 뒤에서 그 모습만 보는 사람은 미쳤다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것 같다.

시카고 무디 교회의 목회자이며 저명한 라디오 설교자인 폴 레이더(Paul Rader) 라는 분이 다음과 같은 비유를 이야기 해주고 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는데 어떤 소년이 길가의 담장에 얼굴을 대고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아이는 때때로 펄쩍펄쩍 뛰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 사람은 ‘도대체 무슨 일이 길레 저 아이는 저렇게 난리인가? 혹시 저 애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냐?’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아이는 담장 너머에서 벌어지는 야구경기를 그 구멍을 통해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아이는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안타를 칠 때마다 펄쩍펄쩍 뛰면서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행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았던 그 아이는 지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Aiden Wilson Tozer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과 동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를 보고 미쳤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미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정의(定義)할 필요가 있다. 존재하지도 않는 대상에 대해 반응하면서 울고 웃고 하는 것이 미친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대상에 대해 반응하는 것은 미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존재하는 분이시므로 그리스도인이 그분에게 반응하는 것은 완전히 정상적인 것이다.”

영혼의 눈이 열리지 못한 세상은 그분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반응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비웃을 수도 있고 이상스럽게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영광의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볼 수 없는 가련함을 우리가 오히려 동정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복음으로 그들의 눈을 뜰 수 있게 해줘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과 그 약속을 볼 수 있게 된 것도 주님의 전적인 은혜 때문이요 십자가를 통한 희생의 은총 때문이었음을 감사하면서 썩어질 것에만 눈 박고 사는 영혼의 시각 장애자들을 주님께로 이끌어 눈뜨게 해줘야 할 것은 당연한 우리의 의무이다.

오늘 본문의 두 소경은 비록 길가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작은 동정을 구걸하는 가운데서도 다행인 것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이들에게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복음은 오늘 여전히 영혼의 소경 되어 여전히 천국을 보지 못하는 온 인류에게도 복된 복음이다.

하나님께서 저주와 절망에 눈 박고 살 수 밖에 없었던 우리들의 靈眼을 뜨게 하셔서 영원한 천국을 보게 해 주시고 더 이상 썩어질 세상과 저주에 머물지 않게 하신 것 우리 인생의 어떤 사건 보다도 귀중함을 확신하는 …



Ⅱ.주님께서 허락하신 기회를 놓지 지 말아야 한다.(30~31)

“소경 둘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지혜의 사람으로 유명한 솔로몬은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 죽을 때, 심을 때, 심은 것을 뽑을 때, 죽일 때, 치료시킬 때, 헐 때, 세울 때, 울 때, 웃을 때, 슬퍼할 때, 춤출 때, 돌을 던져 버릴 때, 돌을 거둘 때, 안을 때, 안는 일을 멀리 할 때, 찾을 때, 잃을 때, 지킬 때, 버릴 때, 찢을 때, 꿰맬 때, 잠잠할 때, 말할 때, 사랑할 때, 미워할 때, 전쟁할 때,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3:1~8)고 교훈 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인생들 누구에게나 기회를 반드시 주시는데 아무리 힘겹더라도 그 기회를 놓지면 안됨을 경고하는 것이고 비록 소경들이었지만 그들은 이 눈뜰 절호의 기회를 딱 잡아 채고 있는 것을 본다.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는 소리를 질러야 할 때는 소리를 질러야 한다. 소리를 질어야 할 때 얌전히 있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구원에 관한 소식을 들었을 때 더욱 적극적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이 두 소경이 소리 지르는 것을 별로 좋지 않게 여겼기 때문에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했다.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만약에 당시의 존귀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소리를 질렀어도 이랬을까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들의 신분이 종교 지도자들이었다면 작게 말해도 주님께 전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약한 자들의 소리는 아무리 크게 외쳐도 잘 들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 교회 주변에 까마귀들과 까치들을 더러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까마귀는 아무리 즐거운 노래를 불러도 사람들은 듣기를 싫어하고 까치는 아무리 짜증스러운 소리를 내도 사람들은 좋아 한다. 이 것은 엄청난 편견이면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크다고 본다.

①사람들의 편견의 무서움이다. 미신적인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 ②좋지 않은 편견을 갖지 않도록 역할 해야 한다. ‘저 사람은 이러 이러한 사람이다.’ 라는 좋지 않은 이름표를 갖지 않아야 한다. ③

주변의 꾸짖음보다도 주님을 더 적극적으로 찾는 것이 중요하다.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여하튼 이 두 소경에게는 적어도 생사가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잠잠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30)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31)

이 인류의 비극적인 시각 장애의 눈을 뜨게 해 주실 분은 다윗의 자손으로 약속된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 인간의 근본적인 비극을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우리의 죄와 비극을 해결하시기 이해서 자신의 생명을 친히 십자가에 주신 예수 그리스도 뿐이심을 …



Ⅲ.무슨 문제이건 주님의 아신바 되면 문제는 해결 된 것이다.(32~34)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남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소리를 질러댄 보람은 있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막10:49) 이제는 주님의 아시는 바 되었다. 바울 사도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고전8:3)는 것으로 봐서 이 두 소경은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 이긴 하지만 그 주변의 어떤 사람들 보다도 주님을 사랑으로 부른 것 같다.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 인자하신 주님의 음성은 마치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왕상3:4~5; 대하1:6~7)는 말씀과 너무도 비슷한 상황을 접하게 된다.

다른 것이 있다면 솔로몬은 일 천 번제를 하나님께 드렸고 이 두 소경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부르짖은 것 뿐이다. 우리는 여기서도 율법과 복음의 당사자이신 그리스도와의 차이를 보게 된다.

솔로몬은 많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백성을 다스릴 지혜를 구했고 이 두 소경은 자신들의 인생의 어두움이 되고 있는 눈을 뜨게 해 달라고 구했다. 오늘 많은 사람들처럼 솔로몬이 지혜를 구함으로 부와 수도 다 받았기 때문에 이 두 시각 장애자가 지혜를 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주님께서 이들의 필요를 모르셔서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을까? 그것은 다만 이들의 진실한 필요의 고백을 들으시기를 원하셨을 것이다.

만약에 “이 소경 된 형편에 구걸하는 것이 참 힘드니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한 밑천 주십시오”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러나 저들은 한결 같이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참으로 자신들에게 메시야만이 해 줄 수 있는 것을 구했다.

이 두 소경들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구걸을 해 왔을 것이다. 그 중에는 세리에게도 레위인에게도 제사장급의 고위층의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어떤 것을 구하고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두 번씩이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한 것은 메시야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세상에서 쓰고 없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었음을 확신한 것 같다. 구약에서 줄기차게 예언 되어 왔던 ‘다윗의 자손인’ 메시야는 적어도 역사와 열방과 나라들의 운명을 쥐고 게신 분이시므로 한 사람의 운명 정도를 바꾸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음을 확신하고 자신들의 시각 장애의 치료를 부탁 드렸던 것이다.

이들은 이러한 확신과 믿음으로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시는 주님께 거침없이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간청을 드렸고 들으심을 얻은 것이다.

오늘 우리도 이들의 자세를 본 받을 필요가 있다. 우리가 수고하며 성실하게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 정도를 구하기 보다는 적어도 우리 인생을 바꾸고 역사를 뒤집을 수 있는 그런 기도를 들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이 말씀을 상고하면서 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의 깨달음은 주님께서 들으시는 진실 된 기도를 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33b)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들으시는 기도의 실재적인 모형을 보고 있다. 사람들이 주변에서 뭐라 하던, 가장 자신에게 필요한 기도 진실한 기도가 응답됨을 다시 배우는 것이다.

여기에 자연적인 주님의 사랑의 응답은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헬, 스플랑크니조마이(splangknizomai),는 본래 헬, 스플랑크논(splangknon-내장<간장, 허파> 창자, 감정, 감동, 애정, 사랑) 에서 온 말로 = 마음 속에서 움직이다, 간절히 열망하다, 동정을 느끼다, 소중한 사람, 자신처럼 소중한]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34) 이들은 분명 주님의 가슴을 움직이는 기도를 드렸고 확실한 응답을 받았다.

오늘 우리는 여기서 주님께서 들으시는 진실 된 기도(꼭 많은 기도나 오랜 기도가 아닐 지라도)를 드여야 한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 긍휼을 얻을 수 있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 번째 말씀을 마무리 하면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한가지는 역시 눈을 뜬 이 두 시각장애 자였던 이 두 사람들의 마지막 자세이다. 그 동안 길가의 먼지를 마셔가며 사람들에게 얻어먹는 서러움이 해소 되고 아름다운 光明天地를 보게 되었으니 멋진 인생을 한번 살아 봐야겠다는 한풀이 식의 결심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34b)는 모습이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우리는 사죄의 은혜를 받고도 곧바로 세상 속에 빠지고 십자가의 보혈에 감격하고도 여전히 자기 성취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그런 경향이 많은데 주님으로부터 고침 받은 새 인생을 시작한 이들은 주님을 좇아 나섬을 볼 때 성하고 온전해졌다는 오늘 우리(나)의 부끄러움을 금할 길 없다.

주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다시 세상의 죄악에 익숙해져서 천국의 영광에 대하여는 여전히 눈이 어두워진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람들 같은 비극의 주인공들이 이 역사 속에 얼마나 많은지 안타깝다.(계3:14~19) 이들의 특징은 하나님과 복음을 위한 열정도 없이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고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큰 소리치지만 주님께서 보실 때는 영적인 것을 갖지 못하고, 보지 못하기 때문에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이 본문에 나오는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던 소경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들이 이러한 비극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3:18~19)고 충고를 기쁘게 받아드려야만 한다.



Conclusions : 아직도 이 인류나 우리들은 죄의 영향아래 있고 그런 이유 때문에 소망보다는 절망적이고 앞 길이 칠흙 같이 어두운 역사를 살고 있다. [긴급 기도요청 : 이창성-30개월 뇌종양] 우리가 靈眼을 밝히 뜨지 못한다면 이 두 소경처럼 언제나 구걸하는 것과 같은 모자라는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 두 소경 같이 주변의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간절함과 진실함으로 주님을 불러야 할 기회를 놓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우리 각 사람 하나하나의 인생에 있어서도 그렇고 우리라는 공동체 속에서도 그렇다. 누구에게나 선한 기회는 주어지지만 그 기회를 놓쳐버리면 그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 다는 긴장감과 경성함으로 오늘 우리의 비극의 해결을 주님께 구하고 사람들이 몰라줘도 주님께서 아시는 사람들이 되어서 모두가 솔로몬처럼 이 두 시각 장애자들처럼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는 응답 받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받은 대로 자신을 위해서 보다는 주님을 좇아 가는데 최선을 다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