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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21:23~32 2005-10-16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이 말씀에서부터 다음장인 22장 말미에 이르기까지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과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논쟁들로 구성되고 있다. 이 21장의 계속되는 내용은 오늘 본문의 예수 그리스도의 성전청결의 권위에 대한 질문을 시작으로 뒷부분의 두 아들의 비유, 다음 시간에 나누게 될 악한 농부의 비유(33~46), 다시 22장 서두의 혼인잔치의 비유(1~14), 그리고 여기에 대한 교권자들의 도전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문제와(15~22) 일곱 형제의 아내 되었던 여인을 비유한 부활의 문제(23~33),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큰가에 관한 질문과(34~40)에 대하여 답변하신 예수께서는 마지막 부분에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질문으로(41~46) 저들의 공격을 완전히 무력화 시켜 버리고 만다.

이렇게 진리와 진리처럼 보이는 것은 어디서나 부딪힐 수 있음을 보지만 진리야말로 가장 강하고 자유 함을 여기서도 깨닫게 된다.

이 말씀을 읽으면 요즘 우리가 흔히 쓰는 고사성어 한마디가 생각난다. 주객전도(主客顚倒), 주인이 자신의 집에 들어 가셨는데 소님 격도 못 되는 그 집의 종들이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라는 웃지 못할 모습을 보게 된다. 참과 거짓이 뒤바뀐 종교의 중심지의 모습을 여기서 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입장에 맞게 해석하고 바꾸어서 하나님의 구원을 주님의 백성들에게 끼치려는 것 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온 갓 교묘한 교리를 만들어내는 모습은 그야말로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바로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이 돈벌이로만 보이고 그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든지 당연히 대적해야 할 적으로만 보이는 것이고, 성전의 진정한 주인이 자기 집에 오셨는데도 누구의 권세로 들어오느냐고 마치 무단주거침입자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 사도는 이에 대하여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1:11)라고 기록한 바 있다.

이러한 자세는 초대교회 때부터 더러 있어왔던 것 같고 바울 사도는 이러한 자세를 맹렬히 책망하면서 자신은 적어도 그런 유의 일꾼이 아니라고 증거하고 있다.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2:17)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사는 장사꾼이 되었습니다마는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답게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합니다.”[표준새]

사람이 어떤 것에 집착(執着)해 버리면 세상의 모든 것이 온통 자신의 마음을 두는 것으로만 보이게 되기 마련임을 더러 본다. 듣는 것도 마찬 가지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에만 집착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한 가치로 자신의 인생을 보고 가족을 보고 이웃을 보고 역사를 보는 자세가 필요한데 이것을 그리스도중심세계관이라고 말한다.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순종하고 인간이 만든 교리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에 순종함으로 언제나 담대하고 소신 있는 믿음의 사람들로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



Ⅰ.주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23~25f)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

[이 앞부분은 막11:27~33; 눅20:1~8과 같은 기록]

지금까지 저들의 무슨 짓을 하던지 아무도 저들의 권위에 감히 도전하는 사람들이 없었는데, 자신들의 보기에는 천하게 여기는 갈릴리 청년이 나타나 자신들의 일에 도전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권한을 어디로부터 받았느냐고 달려들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순종하는 것을 보면서 감히 완력을 쓰지 못하고 논쟁으로 이 일을 마무리 시키려는 흉계를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이제까지 논리로는 당할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 자신들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고 예수께 대들지만 예수가 누구인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모든 지혜의 근본이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무모한 도전장을 내고 있는 것이다.

저들의 간교한 도전에 주님께서도 사실적인 진리로 조건적인 질문을 던지신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24b~25)

여기서 주님께서 주신 질문의 핵심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 이 땅에 나타나 회개를 외치다가 간교한 헤롯에 의해 순교를 당한 요한의 출처가 어디로서냐?는 질문이 셨는데 역시 요한의 평가를 바로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주님에 대해서도 바른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지금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올무에 빠뜨리려는 간교한 저들이지만, 저들을 정죄하거나 책잡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저들이 깨달음으로 주님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런 우회적인 질문을 주신 것이다.

물론 세례 요한이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라면 당연히 주님의 그리스도 되심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엇다. 여기에서도 저들의 간교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질문은 온 인류에게 던지는 질문이요, 여기에 바른 답을 드릴 수 있다면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보편적인 사람들은 이 종교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요한이나 그리스도를 두 분 다 단순한 사람으로 보는데 문제가 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시키기 위하여 요한을 먼저 보내어 회개의 세례를 전파 하였고 계시의 지속적인 성취로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요한 때까지의 모든 율법을 이루기 위하여 인류의 유월절 양으로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심으로 누구든지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서는 죄로 인한 죽음과 형벌의 저주가 넘어가도록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의 말미에서 저들이 대답지 못한 답변을 주님께서 직접 설명하셨다.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32f)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는 세례 요한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직접 보내신 우리의 구세주요 하나님으로 믿어서 그를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모든 복을 약속대로 누리는 저와 여러분 …



Ⅱ.하나님보다 사람들을 더 두려워 하는 유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25b~27)

“…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1.하나님의 진리는 인간의 머리로 헤아릴 필요가 없다.(25b)

저들의 문제점은 이 중요한 질문을 두고도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고 깨달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먼저 주변의 상황과 잔 머리를 굴리고 있는 모습을 주님 앞에 보이고 있다.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25b) 어떻게 신앙적인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으려 하지않고 의논으로 해결하려 하는가 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답할 때 나타날 반응을 먼저 두려워하는 것을 보면 우리의 유약한 모습 그대로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반응을 염두(念頭)에 두지 말고 선포하라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겔2:7, 3:11) 우리가 늘 경험하는 사실이지만 상대가 어떤 반응으로 나오리라고 먼저 머리로 헤아리면 절대로 하나님의 진리는 전할 수 없다. 하나님의 진리는 사람들의 의논으로 밝혀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감할 필요가 없는 절대적인 진리로 선포할 때에 생명이 나타나고 성령께서 역사하실 것이기 때문에 믿는 그리스도인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할 때는 하나님의 사자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자는 당연히 보내신 분의 명령만 전달하면 된다.

그럼에도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진실되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바로 진리 자체이신 주님 앞에서 말이다.



2.소신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보다는 사람을 두려워 한다.(26)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여기 중요한 저들의 유약한 고백은 “백성이 무섭다” 한 것이다. 올바르지 않은 정치집단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본다. 종교든 정치든 소신 없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떠나갈까 봐 그 사람들을 두려워 한다.

물론 민주주의 정치는 백성을 무서워 해야 한다. 하지만 올바른 소신을 갖지 못하고 정치 철학이 없이 단순히 사람들의 인기에 연연해서 사람을 두려워 하여 항상 말을 바꾸며 사람들에게 아부하려는 정치 지도자들은 올바르지 않다.

사람이든 백성이든 지도해야 할 대상이 있다면 진리와 소신을 가지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어야 바른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여론에 좌우되고 흔들리는 자세는 지도자의 자세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유약한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버리셨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그 주님을 추앙하고 경배하며 사랑하는 것이다.



3.결국 소신 없는 답변을 하고 만다.(27)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온 유대를 호령하던 기백은 어디로 가고 이 성경에 대한 확신도 소신도 없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들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들어낼 뿐이었다.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따라 판단하고 분명한 답변을 드렸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겨우 한다는 답변이 “알지 못하노라” 이었다.

오늘 우리에게도 바울과 같은 담대함이 필요하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오늘도 소신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려면 하나님을 경외할 뿐이지 절대로 사람을 두려워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주님의 명령에 부끄러움이 없는 저와 여러분 …



Ⅲ.하나님께는 회계와 순종의 자세가 더 귀함을 비유하신다.(28~32)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이제 주님은 당시의 진리나 구원의 약속도 모르고 오로지 자신들의 정욕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의 성전을 종교 마트(Mart)로 운영하고 있는 저들에게 비유와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 하신다.



1.불순종하는 아들과 순종하는 아들의 비유.(28~31f)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

이 비유는 번역본들마다 맏아들과 둘째 아들의 행동의 차이가 있는 것들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의미에서는 전혀 혼란을 느낄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입으로는 순종하면서도 행동으로서는 불순종한 것과 입으로는 비록 불순종했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순종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 인류를 구원하시려 는 예정과 선택에 있어서는 분명히 이스라엘을 먼저 부르셨고 그들에게 귀중한 약속을 주셨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19:5~6)

그러나 비록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긴 했지만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역했고 특히 예수께서 메시아로 오셨음에도 거역하고 십자가에 죽이는 무서운 불순종을 저지르게 되고 오히려 그들이 개처럼 취급하던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되는 구원사의 역사를 보면 이 말씀은 진실일 수 밖에 없다.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 같은 교권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순종하겠다고 맹세하여 제사장을 비롯한 직책을 받았음에도 사실에 있어서는 순종치 않는 반면에 그들이 죄인이라고 취급하던 세리와 창기들은 회개하고 주님께 순종하는 모습 역시 주님께서 지적하신 비유와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 교회의 직분자들도 주의 해야 한다. 분명히 세움을 받을 때는 여러 가지 약속을 해 놓고 결국 순종치 않는 것은 이 비유에서 나타나는 큰 아들과 같은 태도이다.

말로만 순종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다. 말로는 누구든지 믿는다고 고백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순종이 따르지 못한다면 주님께서 비유하신 이 첫째아들과 다름이 없고, 비록 내키지 않아 말로 순종 못했을지라도 참마음으로 회개하고 순종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받아 주시고 용납하신다.

더 바람직 한 것은 말과 행위로 다 순종하는 것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왕에 순종해야 할 것이라면 처음부터 아멘으로 받아드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주시든지 어디로 이끄시든지 절대로 우리를 불행한 데로 이끄실 분이 아니라는 확신으로 온몸과 마음으로 순종한다면 참으로 복될 것이다.



2.그들이 죄인 시 하는 사람들이라도 믿고 순종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더 귀하다.(31b~32)

“…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처럼 자신만을 의인 시 하고 함부로 남을 정죄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경종이다.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선택 받은 일꾼이요 하나님께서는 자신들만 인정하실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말씀을 행하지 않는 이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는 선언은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상상해 볼 수 있다.

주님은 결국 저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바른 답변을 하지 못했던 세례요한이 하나님께서 보낸 참된 의의 일꾼이었음을 증거하고 그러한 하나님의 일꾼을 인정치 못한 저들보다 비록 죄인들이지만 믿고 순종했던 세리와 창기들의 구원을 비교하면서 끝까지 고집을 부렸던 저들을 맹렬히 책망하고 계시다.



오늘도 우리는 예배를 위한 모임이나 경건의 행사들 속에서 참으로 주인이신 그리스도가 제외된 허례허식(虛禮虛飾)과 그러한 행위들이 진정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뒷전에 두고 사람이 중심이 된 모임이나 행사라면 주님께서 오셔도 오히려 박대하게 될 것이다.

사울은 열심히 주님을 섬긴다고 설치고 다녔지만 오히려 다메색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주님께서 탄식하시기를 “…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행22:7)고 안타까워 하실 때 오히려 알아 보지 못하고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행22:8)고 되물을 수 밖에 없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을 두려워 하면 바른 말을 할 수 없고 신앙의 절개도 지킬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두려워 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 외에는 이 우주 가운데 아무것도 없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27:1) 바울도 로마서 8:35~39에서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말로만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서 자신을 속이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순종 못했더라도 회개하고 순종해야 할 것이고 참으로 바람직한 믿음은 입술로도 마음으로도 행동으로도 온전히 순종하여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저와 여러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