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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22:1~14 2005-10-30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계속 진정으로 깨달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계속해서 비유로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이미 21:28~31에서 두 아들의 비유로 말과 행동으로 순종하고 불순종하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상징적으로 말씀하셨고 지난 주에는 21:33~45에서 악한 농부들의 비유로 완벽하게 조성된 포도원의 일터를 주셨지만 주인에게 드려야 할 몫을 바치지 않고 그것을 받으러 온 종들과 아들까지도 죽이므로 때를 따라 열매를 바칠 또 다른 일꾼들에게 포도원 경영권을 넘기는 비유로 역시 이스라엘의 버림받음과 이방인의 은혜에 참여함을 말씀하셨다.

특히 오늘의 비유의 중요성은 이 비유에는 오늘 우리까지도 포함되고 있는 말씀이라는 데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르셔서 귀히 여기시고 모든 좋은 것으로 함께 했지만 배은망덕하게도 이 엄청난 특권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고 그런 까닭에 사랑의 대상에서 진노의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면서 다시 구원에 초청된 이방인인 우리들을 향하여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롬11:20~22)는 경계를 주고 있다.

결론부터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온 인류를 자신의 혼인잔치에 청하셨다. 그러나 거절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이 복된 잔치를 누리지 못할 것이고 참여한 사람들조차도 주인이 주는 예복을 거절함으로 어두움에 던져지는 절망을 맛볼 수 있을 것이라는 경계를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비롯한 유대인들과 오늘 복음에 초청된 우리 모두에게 주고 계시는 것이다.



Ⅰ.은혜의 초청이 있다.(1~4)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구약성경에서부터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결혼한 부부로 묘사하고 이스라엘을 아내로 묘사하는 부분들이 많다. 특히 호세아서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2:19~20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방과 불륜을 저지르며 혼인관계를 지켜가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비유하며 탄식하시는 하나님을 본다.

그러나 그보다 더 분명한 혼인 잔치의 예는 그리스도와 신부에 대한 예에서 더 분명히 드러난다. 세례 요한은 바로 자신이 신랑을 맞을 준비를 시키는 신랑의 우인대표 (友人代表)로 고백하면서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요3:29)고 고백하고 있고, 사도 요한은 완성된 천국을 계시 중에 보면서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계19:7, 9) 라는 천사의 말을 듣는다.

인간의 잔치 중에서도 가장 행복한 잔치는 물론 혼인잔치 임에 틀림이 없고 천국을 최소한 비교해서 가장 호화로운 혼인잔치로 비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본 비유에서 특이한 것은 임금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베푼 혼인잔치라는 사실과 이 잔치는 다른 사람의 부조(扶助)나 도움을 전혀 받지않고 완벽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여기에 비유되는 임금은 하나님 아버지이시고 혼인하는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에 틀림이 없다.

임금은 완벽하게 준비된 잔치에 이미 청한 손님들(동방의 잔치에 손님을 청하는 예들]을 종들을 통해 부르러 보냈지만 오고자 하지 않았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메시야에로의 초청으로 주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한 초청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거부하는 것은 적어도 언약의 위반이다.

거절 당한 임금은 “… 내가 오찬(헬, 아리스톤(Ariston) - 모든 식사를 총괄할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4) 라는 기록을 보는데 모든 사람들이 다 만족할 수 있도록 가장 귀한 음식인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라는 내용을 보면 어떤 식의 미식가(美食家)라도 만족할 음식들을 두루 갖추었다.

인간의 잔치는 늘 한계를 드러내지만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천국은 참으로 모든 인류가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잔치가 될 것이다. 초대되는 손들에게는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완벽하게 준비된 혼인잔치 그것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여할 수 있는 천국 뿐이다.

그곳은 사람의 어떤 도움이나 보조도 전혀 필요지 않은 곳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신부를 위하려 완벽하게 준비된 기쁨만이 충만한 최고의 잔치일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거역한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온 인류의 혼인예식을 위하여 “소와 살진 짐승”보다도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잡으셨다. 우리는 자격이 없는 자들임에도 매주 천국의 떡인 주님의 살과 천국의 잔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기념하면서 영원한 혼인잔치에 참여할 기념을 해 가는 것이다.



Ⅱ.거절되고 묵살되는 사랑에 대한 대가가 치뤄진다.(5~8)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4)는 임금이 종들을 통한 초청이었고 그만큼 위엄 있는 부름이었음에도 초청된 손님들은 거기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라는 이 말씀을 구약의 호세아서에서 보면 “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호11:2)는 내용과 비교가 된다. 하나님의 신령한 초청에 사람들은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일반이다.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언제나 세상 일에 더 애착을 가지고 하나님의 초청과 부탁을 거절하는 것은 은혜로 초청하신 사랑을 배반하는 행위들이다.

여기에다가 죄를 더하여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의 초청에 응답하는 대신 임금이 보낸 종들을 업신여기는 것은 곧 보낸 임금을 업신여기는 것과 같다.

때문에 거기에 상응하는 형벌을 당하게 된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 요한을 거절하여 죽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이스라엘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던 사도들에게 능욕과 박해를 가한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행14:19)

이러한 배은망덕을 행하던 이스라엘은 마침내 A.D. 70년에 로마의 군대에 의해 멸망 당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이미 이 주님의 말씀에 예언되었던 형벌이었다.

하나님의 초청의 대상이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베설 하신 혼인잔치에 합당치 못한 자들로 자처하였다. 동족 이스라엘에게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13:46)는 탄식의 고백을 본다.

사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고 기다리고 권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계속된 사랑의 채찍에도 깨닫지 못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초청을 거절하고 청한 사람들에 합당치 못한 사람들로 자처하고 만다. 그래서 이 은혜는 바로 우리 같은 이방인에게 오게 되었는데 다음 부분에서 생각하도록 하겠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은 바울의 권면과 같이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빌1:27f)는 당부에 부끄럽지 않기를 …



Ⅲ.은혜의 범위가 넓혀졌다.(9~10)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먼저 임금의 초청을 거절한 자들을 형벌 하였어도 혼인잔치가 없어져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초청의 대상은 확대되어서 파격적이다. 그리고 이 이하의 말씀은 바로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들이라는 데서 더욱 깊이 있는 이해가 요구된다.

여기 사람을 초청하는 모습을 표현하기를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9),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10)라 했는데 이 말씀이 맨 마지막 절과 연결해서 결론이 되는 말씀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편견 없는 사랑과 긍휼이 있다. 사실 이런 부류는 본래는 전혀 잔치에 초청될 대상이 되지 못했던 부류의 사람들이다.

사거리(헬, 디엑소도스(diexodos), 빠져나가는 곳, 열린 광장)는 東西南北 坊坊曲曲을 뜻하는 것이 더 합당한 의미가 될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는 잔치에 초대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아는 사람으로 한정한다. 그것도 相扶相助라 하여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친척과 부조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사람들로 초청장을 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혼인예식에 초청한 사랑은 사방이 다 열려 있는 사거리처럼 제한을 두지 않는다. 한마디로 “누구든지”이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행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3)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22:17)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가 초청의 대상이다. 10절은 한술 더 떠서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라고 했다.

세상에 선한자 즉, 의인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은 분명히 선언한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그렇기 때문에 사실 “악한 자나 선한 자나” 한 것은 악한 자들 모두를 초청하시는 조건이고 역시 사랑의 아버지, 긍휼의 아버지, 용서의 아비이시기 때문에만 가능한 역사이다. 여기서도 역시 뒤에 이어지는 말은 “… 만나는 대로”이다. 우리가 어디서나 만나는 사람, 그의 성격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그 사람은 오늘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초대되고 있는 사람들이다.

“…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이제 초청의 목표는 채워졌다. 우리는 사실 할 수 있는 일이 이것이다. 같은 병행 구절인 누가복음14:23에서는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로 기록되고 있다. 우리 모두 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



Ⅳ.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11~14)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이제 잔치 자리가 손들로 가득한 모습을 임금은 친히 오셔서 둘러 보신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 누구든지 잔치에 들어올 때 갈아입고 들어오는 예복을 주었음에도 예복을 입지 않은 체로 이 예식에 참여하고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고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고 묻지만 저는 입이 있으되 답변을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잔치에 들어오기 까지는 어떤 차림이었던지 이미 주인은 예복을 친히 마련해서 나눠 주도록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가지를 확인하고 지나갈 것은 이 잔치는 잔치의 예복까지도 주인이 마련해 주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인데 바로 천국이 그렇다.

천국에는 어떤 세상의 화려하거나 세련되게 갖추어 입은 영광의 옷도 합당치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곧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의 옷만을 입어야 한다. 그런데 이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입혀주시는 혼인잔치의 예복이 과연 무엇일까?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고 말하고 있다. 죄인이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순종은 동시에 물과 성령으로 거듭 나고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되어 신랑되신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주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61:10, 3 찬송의 옷)고 노래하고 있다.

천국에서는 이 구원의 예복인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지 못하면 반드시 쫓겨남을 당할 것이다. 가장 구체적인 천국을 묘사하고 있는 계시록에서는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계19:8)고 묘사하고 있다.

두려운 이야기이지만 이 어두움의 세상역사가 끝날 때까지 주님의 교회에는 善과 惡이 공존하고 주님께서 천사장의 소리와 더불어 하늘로부터 재림하셔서 공존하던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을 먼저 뽑아내어 본문의 내용처럼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번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었다면 그것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14:12) 또 다른 말로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계22:7)는 내용으로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의의 예복을 더럽히지 않고 지켜갈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이러한 말씀을 상고한 바 있다.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13:49~50)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14) 청함에는 차별이 없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그러나 [택함을 입은 자(헬, 에클렉토스(eklektos), 가려낸, 뽑힌, 마음에 드는, 선출된)]는 적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예복을 지키지 못한다면 결국 들러리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비록 세상에서 좁은 문을 힘겹게 선택한 사람들은 많지는 않지만 주님의 위로를 누릴 것이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12:32) 바울 사도를 통하여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주신 권면을 듣는 모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은 적은 무리로 남아서 주님의 이 위로의 대상자들이 되시고 택함 받은 은혜를 잃지 않은 사람들이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