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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22:15~22 2005-11-06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지혜로 주님을 당할 수 없음을 알고 당시의 실세였던 헤롯 당원들과 합동하여 주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려는 간사한 계교를 본다. 로마의 통치를 받으며 그 싫어하는 헤롯 당과 야합을 하는 것 자체가 인간적인 입장에서는 불가능함에도 진리의 주님을 올무에 걸어 죽이려는 무서운 생각에서는 하나가 됨을 보면서 죄를 밥 먹듯 하는 범죄 한 인류의 사악함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지혜와 진리의 근본이신 하나님이 인간이 친 그물에 걸려들리 만무하고 오히려 저들이 어찌할 줄 모르고 수치를 당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가 하면 이 사건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국가 권력에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제시 하심으로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주고 계시다. 하나님의 백성이요 세상 나라의 백성이라는 이중적인 신분 사이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가에 기준을 갖지 못하면 사실 지나치게 세상 권력에 반항적인 열심당원들과 같을 것이고 아니면 조국에 대한 애정보다는 이중적인 처신으로 자신의 이속을 챙기는 당시의 세리들과 같은 비난의 대상자들이 될 수도 있다.

어떻게 이 두 사이에서 조화를 이룰 것인가? 하는 혼란을 오늘 이 말씀은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는 데서 비록 이들의 간교함이었지만 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좋은 신앙적 기준을 가르치는 말씀이기도 하다.



Ⅰ.거룩할 수 없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15~17)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한대”

아담이후의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악한데 지혜롭고 선한데 미련한 모습을 역사 속에서나 성경 속에서 보게 된다.[롬16:19b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시편기자는 “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하나이다”(시5:9) 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어찌 보면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는 동물 보다도 무자비하고 사악한 것이 인간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안다고 하는 입장에서 이들의 모습은 너무나 무모하고 어리석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나 지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1.일반적인 사람들의 죄성을 본다.(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어둠 속의 지혜이기 때문에 악할 수 밖에 없다. 건설적이고 복된 의논을 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는 흉계를 꾸미고 있는 모습은 비단 그 때 그들 뿐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다르지 않다.

종교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서로 의논하는 모습은 마치 예수를 넘겨 주겠다고 종교 지도자들에게 은 30냥을 의논하는 가룟 유다와 같고,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요셉을 미디안의 장사꾼들에게 팔려고 의논하는 요셉의 형들 같은 모습이 연상이 된다.(창37:28)

특히 여기 “올무에 걸리게 할까, 헬, 파기듀오(pagideuo) 헬, 파기스(pagis) - 덫, 계교 또는 술책(유혹) 함정)”에서 온 말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책잡으려고 함정을 파고, 덫을 놓는 데 있어서 자신들의 계교가 부족하다고 생각되어 그들이 사실에 있어서는 가장 싫어하는 헤롯 당원들과 의논하는 모습은 우리 사람들의 간교한 모습을 그대로 들어내고 있는 모습이다.



2.정치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진리나 생명에 관한 관심 보다는 실리적인 가치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 바로 정치꾼들이다. 이들의 아첨 속에는 독침이 들어있고 가시가 돋혀 있다. 그러나 저들이 비록 올무를 놓기 위해서 아부하는 표현이지만 이것은 사실 메시야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내용이다.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주님의 모습을 사실 그대로 고백하고 있는데 이러한 고백을 진심으로 한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그렇기 때문에 정치가들은 어제의 적이 동지가 되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기도 한다.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고 할 때도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눅23:12)고 기록되고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해 볼 수 있다. 언제나 백성들을 위한답시고 감언이설을 빌어서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는 사람들이다.



3.감히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다.(17)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한대” “바치라!” 하셔도 민족반역자로 올무 잡고 “바치지 말라!” 하셔도 지배국 로마를 대적하는 것이 되어서 당장에 헤롯당원들이 끌어 가고 말 것이다. 이런 경우를 두고 진퇴양난(進退兩難)이라고 밖에는 다른 표현이 달리 없다. 마치 요한복음 8:2~6의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가지고 고발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번에는 꼼짝없이 잡힐 것이다!” 라고 내심으로는 자신들의 승리를 자축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간교한 인간 군상들을 바울 사도는 시편5:9 인용하여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롬3:13) 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저들은 분명히 적수를 잘 못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쾌재를 불렀지만 부끄럽게 그 자리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Ⅱ.사람이 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지혜를 본다.(18~20)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1.주님께서는 저들의 사악한 의도를 아셨다.(18f)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주님을 추켜세우듯이 듣기 좋은 말을 다 동원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꼼짝없이 잡으려는 저들의 어둡고 추한 마음을 이미 주님은 들여다보고 계셨다. 다윗의 형들 중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을 찾고있는 사무엘은 이세의 맏아들의 엘리압의 외모를 보면서 “…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했지만 “…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고 거절하는 것을 본다.

적어도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제외됐다고 단정하면서 최초로 이방인 중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고넬료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간 베드로는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 고백하기를 “…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10:34~35) 라고 실토를 한다.

겉모양은 번지르르 하고 입에서는 듣기 좋은 말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계신 주님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에 마태는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오늘 우리 각자의 마음도 읽고 계신다.



2.하나님의 대항 할 수 없는 지혜를 여기서도 본다.(18m~20)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주님께서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고 꾸짖으셨지만, 구약 성경 신명기6:16에는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라고 기록되어 있고 마귀가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할 때 이 말씀을 인용하셔서 마귀를 물리치셨다(4:7). 분명히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명령 되어 있음에도 사악한 저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영적인 소경들이기 때문에 감히 하나님을 시험하려 들고 있는 것이다.

저들이 보기에는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뒤로 후퇴도 못할 위기를 만든 것 같지만 오히려 시험한 그들이 신기할 정도로 분명한 지혜로서 그들의 입을 막고 말았다.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지혜의 근본이신 주님께서 마귀 사탄을 말씀으로 물리치심 같이 저들의 간교한 꾀를 한마디로 무효하게 만들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자신을 순종하고 따르며 복음을 증거 하는 자들에게도 동일한 지혜를 성령으로 주실 것을 약속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눅21:14~15)

그러므로 주님을 순종하며 증거하고 섬기는 자들은 주님께서 능히 마귀가 대항하지 못할 지혜를 누리도록 약속되었다. 이 약속이 누구에게 주신 약속인가? 바로 성령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사는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도 유효한 약속이다.



3.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악한 사람들을 위하여 주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져 주셨다.

이렇게 사악한 자들이 누군가? 바로 나(우리) 자신이다. 이렇게 죄와 더불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을 따라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던 간교하고 사악한 우리들을 위해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 감당하시고 누구든지 믿고 순종하여 세례를 받는 자에게는 어두움의 세력에서 자유케 하시고 의의 빛이신 주님의 권세에 들어가게 하신 주님을 찬양합시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엡2:1~7)

우리가 결코 온전해서 이거나 의로워서가 아니라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저들과 꼭 같이 사악한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입은 것이다.



Ⅲ.국가와 하나님께 해야 할 의무를 다하라!(21~22)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우리 간사한 인간은 가능한 모든 권리는 찾아 누리려 하면서 할 수만 있으면 많은 의무들에서 자유 하려고 꾀를 부리는 것이 사실이다. 유대인들의 부모 공경에서 벗어나보려고 부모에게 할 것을 [고르반] 하나님께 드렸다는 명목이 다 그런 것이다. 우리가 지나치다 보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들은 국가에는 충성치 못하고 또 순종치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절대로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주님의 명령은 주님을 시험했던 당시의 사람들에게만 주신 답변 뿐만이 아니라 오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 국민으로 사는 우리들에게도 주신 말씀이다.

한 때 미국과 대한민국의 이중국적이 문제가 된 적이 있지만 우리는 이 세상의 국적은 하나를 택해야 하고 영적인 하나님 나라의 국적도 당연히 포기할 수 없다. 이 말은 이 영육의 나라에 대한 의무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다.



1.국가에 바쳐야 할 것은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으셨다.(21)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욕을 듣거나 무시 당하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2:20) 이유는 단순한데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육신의 부모가 자신의 자녀가 남들로부터 칭찬 듣는 것은 좋아 하지만 욕 듣고 무시 당했다는 소리를 기뻐하지 않는 것과 꼭 같다.

하나님은 국가에 해야 할 의무를 절대로 자신에게 해야 한다고 욕심 부리시지 않으신다. 오히려 우리가 육신의 주민등록을 가지고 있는 이 나라에 소홀히 하여 욕을 듣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영적인 것이 영원하고 우선 순위이지만 육신의 국가가 영적인 법을 어길 것을 강조하지 않는 한 국가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은 하늘의 백성의 자세로서 합당치 않다. 우리는 이 세상의 윤리와 법도의 위에 있는 법에 속한 사람이므로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도 흠 잡힐 것이 없어야만 한다.



2.무지한 사람들이 기이히 여길 수 밖에 없었지만 저들은 주님을 떠나고 만다.(22)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어떤 이들은 이 반응을 “…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요7:46) 라는 말씀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미 어느 정도는 주님께 승복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았다면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지혜의 주님을 등지고 만다.

우리는 이미 앞의 8:28~34에서 무덤사이에 거하면서 자신과 지나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군대 귀신들린 자를 온전케 하신 사건을 다룬 바 있다. 이 엄청난 사건을 친히 보고도 그 곳 사람들은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이러한 능력의 주님과 함께 함이 얼마나 큰 복인데 어리석은 이들은 생명의 주님께 떠나가시기를 구했고 오늘 본문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생명의 주님을 바로 만났음에도 떠나 버리는 어리석음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행동들은 마치 누가복음5:8의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는 베드로의 자세와는 다른 모습이다.

이런 행동들의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세상의 기준인 이익과 관련되고 있다. 때로는 많은 사람들이 보이다가 없어 질 것들의 이익을 기준으로 주님을 저울질하는 어리석음을 보는 것이다.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와 권세 때문에 주님을 떠나는 어리석은 자는 한 사람도 없기를 …

가이사는 다른 사람으로 바뀌고 낡은 옷처럼 갈아 입을 역사의 소비재이다. 그럼에도 영원한 권세의 근본이신 주님은 그러한 역사의 통치자들에게도 허술함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하신다. 그러나 국가에 충성한다는 명목으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 해야 될 의무와 충성을 소홀히 한다면 영원 속에서 영원히 후회하게 될 것이다.

모세는 그의 祈禱詩에서 고백하기를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시90:1) 하였고 시편 기자는 다시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시145:13) 라고 고백하고 있다. 비록 잠시 있다 영원한 본향으로 돌아가겠지만 이 세상의 의무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영원에도 소홀할 수 있으므로 범사에 거리낌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