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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22:23~33 2005-11-13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지난 시간에 예수를 시험하러 왔던 바리새인들은 인류의 영원한 참 왕이신 그리스도를 제거하고 자신들의 위치를 더욱 확고하게 세우고자 했던 간교함을 우리는 봤다. 당시의 유대인들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요한복음에서 보는데 많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빌라도에게 예수를 죽여 달라고 할 때에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요19:15) 라는 무서운 말을 쉽게 내뱉는 것을 듣게 된다. 로마의 지배를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라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하는 것을 보면 사람이 죽고 싶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했던 사람들은 주로 보수주의로 우익(右翼)성향을 가진 바리새인들이었는데 형식을 중하게 여기고 권력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현실적이고 좌익(左翼) 성향인 사두개인들이 또 다시 시험하려고 달려들었다.

이들은 미래의 영원한 세계라든가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약속보다는 권력과 돈을 더 좋아하고 그러다 보니 성전을 빌미 삼아 잇속을 챙기고 있다가 예수로부터 호된 책망을 듣고 기회만 엿보고 있던 사람들로, 자신들이 부정하는 부활을 말도 안되고 있지도 않을 비유를 들어 주님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성경을 생명의 말씀으로 믿지 못하면 성경의 내용들을 트집잡아 하나님을 대적하고 믿음을 뒤흔드는 말도 안되는 이론을 가지고 싸움을 걸어 올 수 있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딛3:9)고 경계하고 있다.

이 비유는 눅20:27~40에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함께 상고할 수 있다. 당시에 주님을 시험하려는 간교 함에서 나온 질문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결혼의 한계와 부활 때의 우리의 상태를 깨달을 수 있다는 데서 감사를 드리게 된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데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Ⅰ.도저히 있을 수 없는 비유이다.(23~28)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이들이 이러한 허무맹랑한 말을 지어내게 된 말씀은 단 한 구절이었다.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신25:5)

물론 이러한 전례는 율법 이전에 있었던 전통이었다. 창38:6~10[유다의 큰아들 엘(둘째 오난)-다말] 그러나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유치한 동화만도 못한 이야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에게 대드는 저들이 참으로 측은하기까지 하다. 소위 백성을 하나님 앞에 중보 한다는 제사장이란 사람들이 이런 정도로 밖에 신앙을 이야기 할 수 없는가? 의문이다.

참으로 허무맹랑한 어린아이 같은 발상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려고 별의 별 꾀를 다 짜내다 보니 이런 유치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참된 진리를 거절하고 인간의 이론을 세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가장 기초적인 복음인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16:16) 거나 “…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 라는 가르침은 분명히 구원 받는 믿음의 순종으로 세례를 받고 죄의 몸이 십자가에서 죄의 값을 치르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원리로 하나님의 약속인 세례를 가르치고, 이러한 전례가 바로 교회와 성령의 행전인 사도행전 속에 계속 나타나있는데도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의 우편강도는 언제 세례 받고 구원 받았느냐?”고 억지를 부린다.

그럴 때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서 우편 강도처럼 반드시 다 십자가에 달려야 하는가?” 라고 묻거나 “바로 구원의 권한을 가지신 하나님이 구원을 선언하시는데 세례 아니라 무슨 다른 것이 필요하겠는가?” 라고 답하곤 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구원 받는다는 주님의 직접적인 말씀(요3:5)이 있음에도 많은 사람들은 종교개혁의 하나의 주제였던 “오직 믿음(솔라 피데, sola-fide)”이 너무 강조되다 보니 하나님의 명령이나 약속조차도 약화시키는 안타까움을 보게 된다.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수 많은 비유를 말씀하셨지만 이런 억지스러운 비유는 한 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언제나 억지는 억지주장을 만들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32)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자들 만이 하늘의 자유를 맛볼 수 있다는 귀중한 가르침이다.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28) 있지도 않은 일을 마치 사실처럼 말하면서 거기에 단서를 붙인다. 세상의 논리로 하늘의 일을 이해하려는 사람, 속된 것으로 신령한 것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의 억지 주장이 여기에도 있다.



Ⅱ.그러나 주님은 하늘의 세계를 열어 보이신다.(29~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1.성경을 모르는 무지에서 이렇게 어리석은 질문을 한다.

저들이 이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이야기를 꾸밀 수 밖에 없었던 첫째 이유는 성경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저들의 어리석은 이야기를 꾸미게 된 것을 주님께서 진단하시기를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29) 라고 말씀하신다.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 만큼도 성경을 알지 못했고, 성경을 안다고 해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는 성경이 아니라,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는 이들은 이런 책망을 들어 당연하고, 오늘 날도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 즉,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로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교리를 합리와 하기 위하여 성경을 자기들과 맞는 구절들만 달달 외우는 사람들은 다 이 주님의 책망의 해당자들이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을 바로 이해 하는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중요하다. 거기에서 생명이 나오고 은혜가 나오고 기쁨이 나오고 구원이 나온다. 성경을 바로 아는 것이 어떤 위대하다는 신앙의 지도자의 구원의 논리를 아는 것보다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하다. ‘누구누구가 이렇게 말했다.’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이렇게 말씀한다.” 라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이 성경의 귀중성을 강조하기를 “…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5~17)

하나님의 뜻과 구원을 얻기 위해서 다른 아무 책도 더 필요치 않다. 오직 성경이면 만족한다. 여기에 온 우주와 세계의 시작과 마지막 역사와 인류의 운명이 다 나타나 있고 무엇 보다도 하나님의 죄인을 향한 사랑의 고통이 있다. 온 타락한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과 죽을 수 밖에 없는 절망하는 인간의 죽음을 중단시키는 부활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 성경에 무서운 죄의 형벌의 결과를 볼 수 있고, 마귀 사탄의 마지막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드리고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의 미래의 영광이 기록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역사와 지구의 운명이 기록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바로 아는 것이 생명이 달린 귀중한 관건이다. 그러함에도 사두개인들은 그 성경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부활에 관해 불신하고 오해하고 있었다는 말씀이다. 그럼으로 오늘 현실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이 진리의 교훈인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 가장 불쌍하고 무지한 사람들이다.



2.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오해하고 있었다.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능력도 당연히 알지 못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을 사람정도로 이해하는 어리석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의 속성을 우리 사람이 공유하는 것도 부분적이지만 있다. 그러나 사람과 하나님은 분명히 비교될 수 없다. 또 우상에 익숙해 있는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그들이 섬기던 우상정도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사실 이런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당부를 그의 백성들에게 계명으로 주셨다.)이것은 모두 성경을 알지 못하는 믿음에서 나오는 오해들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게 될 것이므로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한다.



3.부활이 상태를 말씀하신다.(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영적인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들은 기껏해야 육신적인 것 이상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이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같은 병행 구절인 누가복음에서는 이 일을 좀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눅20:34~36)

여기서 이해하는 간단한 한 가지는 이 세상에서는 사람이 죄 값으로 계속 죽기 때문에 거기에 대응하는 생산을 위해서 결혼이 필요하지만 천국에서는 다시 죽는 일이 없기 때문에 생산도 필요 없고, 결혼도 필요치 않다는 말씀이다. 사랑은 영원하지만 결혼은 영원하지 않다. 아마도 이 말씀이 부부관계가 좋은 분들은 아쉬움을 갖게 될 것이고, 부부관계가 좋지 않은 분들은 대단히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결혼 제도는 이 세상, 땅에서만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바울 사도가 부활의 신비를 가르치는 고린도전서 15장과 그 중에서도 특히 42~49의 내용에서 함께 이해할 수 있다. 오늘 우리는 (42~44)절만 인용해 보도록 한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서 부활을 다 논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부활의 몸과 상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이 불편한 죄의 도구인 육의 몸을 벗고 신령한 몸을 입을 것을 기대하게 된다.

로마의 감옥에 있는 바울의 말을 빌리면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1:23~24) 바울은 역시 자신의 입장에서 좋은 것 보다는 여러 사람을 위해서 좋은 것을 택하는 부활에 합당한 그리스도인 임을 여기서도 본다.



Ⅲ.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31~33)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주님께서 인용하시는 말씀은 출애굽기3:6을 비롯하여 구약성경에 계속 말씀해 오신 내용을 인용하신다.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15, 4:5) 여기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게 되고 이 말씀은 몇 가지의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여기 세 믿음의 조상의 하나님이라는 선언은 본래 출애굽을 위한 선언이었다. 애굽에 종살이 하는 이 믿음의 조상들의 후손들을 그 종 된 자리에서 자유케 하려고 이 말씀이 계속 선언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로 말하면 애굽과 같은 죄악의 세상에서 영광의 하나님 나라로 불러내시는 하나님의 동일한 능력의 선언이 이 믿음의 조상들의 동일한 약속의 후손으로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당시의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졌던 애굽에서 자기 백성들을 능력으로 끌어내어 자유케 하셨던 하나님은, 오늘도 강한 죄악의 능력아래 종살이 하는 우리를 인간의 수완이나 지혜나 힘이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즉, 사망에게 죄의 값을 하나님이 대신 십자가위에서 자신의 피로 지불하시고, 마귀 사탄의 참소를 거부하시고 그 피값으로 우리를 끌어내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인간의 지혜로 볼 때는 어리석은 것이요 미련한 것이지만 이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능력도 방해할 수 없는 확실한 능력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1.믿음의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32) 이 세 사람들은 이스라엘 중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믿음의 조상들로 유명한 인물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들이 아무 반응을 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아도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주님의 복되신 이름을 인정하고 찬양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가르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십자가로 구원해 주신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여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고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2.산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여기에도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산 사람이란 단순히 육신으로 호흡을 하는 사람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죽었으나 천국에 영원히 살아서 믿음으로 말하는 사람들, 인류 역사에서 하나님께 믿음의 제사를 드리다가 최초로 순교를 당한 아벨에 관한 히브리서기자의 고백을 빌리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11:4) 하였다.

이들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 값으로 산 자들이다. “…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행20:28) 누구든지 천국을 누린다면 나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지불하시고 사 주셨기 때문이며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왕에 죄로 인하여 죽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영원히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인류의 마지막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겠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과는 함께 할 수 없는, 불순종의 마귀와 사탄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히 멸망 받을 무저갱에서 마귀 사탄과 함께 영원히 거할 자들이기 때문이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25:41)



3.이 역사를 현재로 보고계시는 무한한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본문의 병행 구절인 누가는 같은 이 말씀을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눅20:38)는 귀중한 기록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우리는 다만 살아서 걸어 다니고 행동하고 먹고 자는 사람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헤어짐을 슬퍼하고 죽음을 애석해 한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한 개인의 일생을 탄생에서 죽음까지, 아니 영원의 세계까지 보고 계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이 생긴 처음의 아담에서부터 이 역사의 마지막 오메가 포인트까지의 모든 사람을 현재로 보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의 머리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지만 세월이 흐르고 과학이 발달되면서 사람들이 더 가까이 알아질 날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요, 지혜의 하나님이시요, 생명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 말씀의 말미에도 미묘한 계파의 경쟁을 보는데 바리새인들은 자신들과 신앙의 적수인 사두개인들이 주님께 패하자 쾌재를 불었다.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 하니”(눅20:39) 자신들의 입장에서 주님의 말씀을 역성드는 것을 본다.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실로는 있지도 않을 것들을 예를 들어 논쟁하고 공격한다. 그러나 그러한 일도 이 세상에서 뿐임을 알고 그것을 오히려 많은 사람을 깨달음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사랑과 인내를 배워야 함을 본다. 사람들이 세상의 어떤 것도 섞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고 하나님의 능력을 안다면 이런 어리석은 시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우리의 육신의 삶으로 비유되거나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하늘의 천사들과 같은 존재가 되면서도 천사들과 같이 단순한 부리는 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면서 오늘 그이 말씀의 진리를 순종하고 섬기는 우리들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순종하여 세례를 받고 거듭나서 하늘의 신령한 양식인 주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영적으로 살아 있는 자들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이 역사를 시작에서 끝까지, 그리고 모든 사람을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현재로 보고 계시는 우리의 머리로는 다 이해될 수 없고 영적으로 라야 이해될 수 있는 전능하신 주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