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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23:13~24 2005-12-11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  
성경에는 믿음의 주인공들로 어두운 밤하늘의 영롱한 별빛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소망과 기쁨을 주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우리는 그들의 거룩한 삶을 보면서 우리 자신들의 부족함을 돌아보고 도전하게 된다. 그리고 성경의 교훈들은 “너희들도 이 복된 사람들처럼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의 약속에 견고하게 서서 최선의 믿음을 경주하라!”고 격려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런가 하면 성경에는 역시 본받지 말아야 할 안타까운 사람들의 대표적인 사례들을 공개하고 있다. 아담으로부터 롯의 처, 사울, 가룟 유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등등 … 그러나 감사한 것은 부정적인 사례의 모델들이 믿음의 모델들 보다 비교가 안되게 적다는 것이고, 비록 저들은 분순종과 불경건으로 비극으로 갔지만, 우리가 그들을 보면서 경계를 받는다고 하는 입장에서 그런 비극의 주인공들을 그냥 좋지 못한 사람들이니까 감춰 버리거나 누락 시키지 않고 각각의 유형의 비극의 주인공들도 그대로 기록을 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함으로 써 같을 과정을 가는 사람들은 경계를 받아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바울 사도는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10:6~11)고 신약교회 중에 가장 문제를 많이 일으켰던 고린도 교회와 오늘 우리들에게 교훈 해 주고 있다.

오늘 본문과 또 한번에 걸쳐 상고하게 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해 책망하시는 내용이 바로 그런 유에 속한 교훈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책망 받는 자리의 반대 편 즉, 순종과 진실한 믿음 생활을 한다면 분명히 복이 될 것이다.

이 마태 복음에는 성경이 완전수로 사용하고 있는 ‘일곱’이라는 숫자를 상당히 많이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먼저 는 부정적인 예이지만 12:45의 ‘악한 귀신 일곱’ 18장의 ‘일곱번의 용서’(21~22)와 바로 앞장이었던 22장에서는 ‘일곱 형제’(25) 등등이 그런 예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모두 일곱번을 “화 있을진저”를 선언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일곱번씩 이런 무서운 선언을 듣고도 회개치 못했다는 사실이다. 만약에 비록 일곱번씩 책망을 받았을지라도 회개를 했다면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이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용서가 됐을 것이다.



Ⅰ.“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존경을 받고 있던 이들에게 어느날 나사렛 예수라는 선지자가 나타나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라는 두려운 책망을 듣게 될 때 그들과 그들을 존경하고 따르던 사람들 모두가 사실 놀랐을 것이다.

또 거짓된 스승들을 맹목적으로 따랐던 모든 사람들도 문제이지만 이것은 사실 지도자들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1.화 있을진저 …. [헬, 우아이(ouai)] 슬픔의 탄성; ‘슬프다’, ‘오호’, ‘오호 화로다’ 신앙은 세상에 어떤 것보다도 복된 것이다. 믿음은 축복이 불가능한 것에 가지 복을 빌고 끼치는 것이다. 함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가지신 주님으로부터 이런 저주를 듣는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두려운 일이다. 또 이들은 당시의 백성들로부터 축복과 존경을 받는 그런 대상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 전까지는 정말로 복을 주는 사람들로 추앙 받았고 그들이 거룩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사람들은 대단히 귀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 볼 때는 우매한 백성들을 속이고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늑대와 같은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축복하신 것이 아니라 극단적인 저주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 역시 우리가 반드시 헤아려야 할 우리의 모습이다. 특히 신앙의 지도자들로서 사람들로부터 존경 받고 섬김을 받다가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순간에 천국을 기대했다가 호된 책망과 함께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의 외식을 그만 둬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한다면 재림은 희망의 날이 아니라 이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처럼 절망의 순간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은혜의 시대이기 때문에, 신앙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저주를 그만 두지 않으실 것이다. 외식하는 그들에게 인정이 없으셨던 것처럼 지금도 외식하는 자들에게는 동일한 대우를 하실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그러나 진실 된 신앙의 사람이라면 전혀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주님은 “복이 있나니”도 말씀하신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주님은 누구보다도 각 사람을 잘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지도자들에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주님의 모든 백성들에게 해당되는 내용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2.외식하는 …. [외식(外飾] 우리성경에 쓰여진 외식은 바깥을 꾸민다는 말이다. 안이 충실한 사람은 바깥을 꾸밀 필요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경우도 자신을 꾸미신 적이 단 한번도 없으시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1:1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2:9)

그러나 안이 부실할수록 그것을 가리기 위해서 겉을 더욱 화려하고 그럴싸하게 꾸미게 마련이다. 우리가 이미 지난 주간에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5) 라는 모습을 이야기 한 바 있다. 참으로 신령한 사람은 그런 장신구를 꾸미지 않아도 충분히 하나님께서 아실 것이지만 외면으로 위엄을 갖추어야 어떤 신앙의 일을 감당한다면 정작 그런 모습을 갖추지 못하게 될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겉을 꾸며서 위엄이 있는 모습이 아니라 안을 더욱 충실하게 채우는 것이 하나님 앞에는 사실적으로 현명한 행동이 될 것이다.

특히 이 성경이 쓰여진 말의 본래의 낱말은 [헬, hypokrites]는 탈을 쓰고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라는 의미로, ‘맡겨진 인물에 따라 연기하는 배우(무대 연기자)’, ‘위선자’, ‘외식하는 자’(마6:2) 라는 의미를 가지는 말로 더욱 신앙에 어울리지 않는 행위요 이름이다.

가면(假面) 아래 자신의 얼굴을 감추고 전혀 다른 사람의 삶을 흉내내는 것은 무대에서 족할 뿐이다. 모범적인 믿음의 사람들을 주님께서 어린아이에 비유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에 대한 경계다. 어린 아이들은 계산적이거나 정략적으로 외모를 꾸밀 필요도 없고 꾸미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다. 그 이유는 오로지 부모와 가족들이 좋아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리는 간단하다. 진정한 그리스도인 이라면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고 그의 가족들인 성도들만 기쁘게 하면 그만인 것이 순수한 성도이고 적어도 일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살았다.

사실 이 시대의 신앙인들은 여러 가지의 탈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간교하고 포악한 그들을 하나님 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좋아하지 않게 된다. 많은 세상 사람들조차 그러한 신앙인들과는 거래를 꺼리기 까지 하는 형편이다.

신앙은 연기가 아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나의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 사는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주님의 백성들을 책임져 주실 것이고 세상 사람들도 마침내 신뢰를 가지게 될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악하다고 해도 ‘신앙인들이 가장 상대하기 어렵고 손해를 절대로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라는 평가를 듣는 것은 오늘 나의 책임이고 우리의 책임이다.



3.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어느 주일날 예수께서 오셔서 저에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이종배여” 라고 말씀하신다면 기분이 어떨까! 생각해 보고 또 이것은 오늘의 모든 종교지도자에게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충분히 사실적인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데서 두려워 해야 할 말씀이다.

주님께서 항상 책망하신 대상은 지도자급에 있는 사람들 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특히 평생을 성경을 손으로 필사하며 사는 서기관들과 백성들에게 모든 종교로부터 삶을 지도하는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 책망의 대상이었다는데 심각성이 있다.

뒤에서 구체적인 내용들을 생각하겠지만 이러한 사람들이 지도하는 당시의 영적 상태는 예수 그리스도 같은 의로운 분은 십자가에 죽이고도 남을 정도의 분위기였다. 이러한 사악한 지도자들에 의해 군중은 이용당했고 무지몽매(無知蒙昧) 한 군중들은 이들에 의해 선동되어 하나님의 형벌을 불러들이고야 말았다. 그런 죄악을 주님으로부터 책망 받고도 회개치 못해서 결국 A. D. 70년에 로마의 티토 장군이 이끄는 말발굽에 성전부터 약속의 도성인 예루살렘 전체가 쑥대밭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이 교훈은 여기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 역사는 또 하나의 마지막을 앞에 두고 있고 여전히 이중적인 종교 지도자들과 그들에게 잘못 이끌어진 종교인들은 이 세상이 불탈 때 슬피 울며 가슴 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경성하고 깨어서 이중적인 삶을 하나님께 회개하고 하나님과 사람들이 다 인정할 수 있는 참다운 경건의 사람들이 되어서 오늘 이 교훈을 비극으로 되새기지 않고 적어도 이 말씀을 듣는 모두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인들이여!” 라는 책망을 듣지 않는 복된 사람들이 되시기를 …



Ⅱ.천국의 문을 닫고 어렵게 한 사람을 얻어도 오히려 저주의 자식을 만들어 버리는 비극.(13~15)

안타깝게도 이들은 영원한 영광에 들어갈 약속을 이미 포기하고 있었던 것 같다. 주님께서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천국문을 열어야 할 저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를 가로막고 천국문을 닫아 잠그고 있는 모습이 사람들은 알 수 없었지만 주님께서는 보실 수 있으셨던 것이다.

자기가 못 갈 것이면 남이라도 들어가도록 해야 함에도 죄악 된 인간의 심사는 언제나 그 반대다. 내가 즐기지 못하는 것은 남도 즐기지 못하게 한다는 사악한 생각을 하는 것처럼 순간의 일도 아닌 영원의 일에 이렇게 간악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요6:40) 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안타까운 심정을 유대인들에게도 말씀하신바 있지만 이미 이땅에서 영화를 맛본 저들에게 영원한 천국이 오히려 부담스러웠고 다른 사람들까지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또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나 유대교의 전통과 지혜를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겨서 열심히 율법이나 구약의 말씀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데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방인들 중에서도 천민들은 개처럼 취급해도 귀인들에게는 유대교로의 개종을 권면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의 약속을 상실한 즉, 천국을 상실한 이들이 다른 사람을 유대교로 개종 시킨다고 해도 오히려 나중에 전해질 구원의 바른 진리인 복음을 거역하게 되는 이유들이 되는 것을 보면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 라는 주님의 안타까움은 사실이었다.

적어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들을 통해서 이 죄악의 세계를, 역사를 구원 하시기를 원하셨고 그랬기 때문에 그들의 조상 때부터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19:5~6)는 약속을 확인하고 대대로 전달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주님의 기대에 합당하지 못한 저들을 하나님은 안타까워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으로 새언약을 세우시고 그 새언약의 주체인 교회를 통하여 창세전에 예정하고 계획하신 인류구원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을 베드로 사도에게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9)는 엄청난 언약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 사두개인들은 신앙적으로 내세나 천사나 부활 같은 것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겠지만, 바리새인들은 이 모든 것을 다 믿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함에도 불구하고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며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모습은 신앙과 양심이 이미 화인 맞아 제 기능을 하고 있지 못함을 본다.

이 교훈도 오늘 우리들과 각자에게 경계의 교훈으로 들어야 마지막 날에 주님께 이런 두려운 책망을 듣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제사장이라는 귀중한 역할을 가진 중요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람들 앞에서 천국을 닫는 일은 없는지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는데 장애를 느끼지는 않는지 경성해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오늘 나 자신이 경건하지 못하고 이 바리새인들 같이 이중적이고 위선 적인 모습으로 전한다면 내가 전도한 그 사람도 나의 신앙을 본받아 불경건 해져서 천국백성이 아니라 오리려 순수한 진리를 접할 기회조차 잃어버려서 배나 지옥 자식을 만들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모두가 경건한 삶을 감당하여 나를 통해 천국에 들어 오는 사람이 많고 또 다른 사람들이 우리 각자의 그러한 경건에 영향을 받아서 구원 받은 사람이 더욱 많은 저와 …



Ⅲ.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소경 된 인도자들이라는 책망을 듣는다.(16~22)

이 내용이 오늘 본문에서 가장 긴 부분이지만 의미는 단순하고 분명하다. 세상의 황금에만 눈이 먼 종교 지도자들은 엄청난 죄악을 밥 먹듯 짓고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성전으로 맹세하고 지키지 못하는 것은 괜찮지만 성전의 금, 즉 돈으로 맹세했으면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어처구니 없는 잠꼬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또 제단으로 맹세했다가 못 지키는 것을 있을 수 있지만 제단의 예물로 맹세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는 내용에다 금과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과 예물과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 중에 어느 것이 더 귀중하며 귀중하게 하는 것이냐고 책망하신다.

성전이나 제단은 결국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고 금이나 예물은 하나님을 위해서 드려진 것이지만 이미 세상의 물질에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이나 하나님을 섬기는 제단과 성전이 보이지 않고 금과 예물만 보이는 영적 시각 장애자가 되어 있음에 한탄하시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소경된 인도자, 우맹이요(어리석은) 소경들이여, 소경들이여’ 라고 거듭 저들의 어두워진 영안을 탄식하신다. 사실 이러한 하나님과 천국과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는 신령한 눈은 “…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b)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 나지 않고도 귀중성도 과정도 볼 수 없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거듭나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보이는 어떤 보배와도 비교될 수 없으리만큼 귀중한 하나님과 주님을 섬기는 보물을 넘치도록 누리는 저와 여러분 …



Ⅳ.철저하게 십일조를 드리면서 근본정신은 버린 자들이다.(23~24)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오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네 번째로 주시는 경계는 물질은 의무에 의해서라도 충분히 바치면서 자신의 삶은 전혀 드리지 못하는 오늘날 우리 시대의 신앙인들에게 주시는 두려운 경계로 들린다. 의무에 의해서 드리는 것은 잘 드리면서 삶은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관계가 없는 세상 사람들과 다름이 없는 종교인들에게 바로 주시는 교훈이라고 확신한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신앙의 작고 주변적인 부분에 철저하면서 핵심에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경계의 교훈이다. 삶이 행하기에 쉬운 것은 행하고 그보다 중한 것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인간의 편리대로 바꿔 치거나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악한 것이다. 지극히 하찮은 것부터 목숨을 바쳐야 되는 긴박성과 위기 속에서도 말씀을 그대로 지킨 것이 신약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범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구약의 미가 선지자의 교훈은 이 새언약의 시대에도 다르지 않다고 확신한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바울 사도께서도 같은 당부를 주고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책망 받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지극히 작은 계명들은 낱낱이 따지면서도 정작 귀중한 계명은 무시해 버리고, 이득이 작은 것들은 걸러 보내면서도, 저들은 낙타를 삼킬 정도의 탐욕스러움을 주님은 비유적으로 지적하시면서 마무리 하고 게시다. 결국 하나님을 외면해 버린 인간의 자리는 낙타를 통째로 삼킬만한 지옥 같은 탐욕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듣는 오늘 우리는 두려운 경계로 들어서 탄식의 대상이 아니 주님의 기뻐하시는 대상으로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고 하나님께 대한 드림의 의무뿐만 아니라 우리 삶이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모습이 되므로 우리 자신의 영원에 확신을 갖고 세상 사람들에게 천국의 아름다움을 열어 줄 수 있는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의 대가에 합당한 저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