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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23:25~32 2005-12-26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말투는 과격하고 두렵지만 이 말씀도 역시 우리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주님의 은혜를 누리게 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주님의 계속되는 “화 있을진저”는 주님의 교훈을 지키지 않고 불순종하며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육신의 유익만을 위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시키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중적인 모습으로 행동하고 사는 자들을 향한 두려운 경고의 선언이다.

특히 “화 있을진저”는 아직도 미래형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경고의 말씀을 새겨듣고 여태껏 하던 행동을 회개한다면 당연히 이러한 주님의 무서운 징계의 선언은 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또 다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성경에서 선언하시는 심판의 선언은 사람들을 망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회개하고 구원을 얻게 하고자 하는 사랑이 먼저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Ⅰ.신앙은 내면을 깨끗이 하는 역사다.(25~26)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신앙이란 외부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바꾸는 것이다. ‘나’라는 자신을 쫓아내고 대신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모시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도 자신의 지혜와 삶의 원리를 버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삶 속에 그대로 받아 드리는 것이었다. 그러함에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러한 믿음의 원리를 자신들의 삶 속에서는 전혀 따르지 않으면서 백성들에게는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면서 오히려 이러한 종교적 가르침을 위장하면서 자신들의 이속을 채우기에 만 급급했다.

그리스도인의 원리가 아닐지라도 이러한 가르침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중심은 변화가 없는데 겉으로만 그런 척 흉내를 내봐야 어색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 될 것이다. 오늘 날에 그리스도인들의 세계에서도 이러한 어리석은 시도들은 너무나 흔하게 보아 오는 것들이다.

마음이나 생각은 전혀 바뀌지 않은 채로 그대로 두고 자꾸만 보이는 것을 꾸며 보려고 하지만 이것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욕망과 죄악이 죽고 하나님의 성령의 다스림이 있어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고, 우리의 모든 삶 전체가 그렇게 다스려져야 비로소 성경의 명령들이 지켜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기쁨이 될 수 있을 것인데 늘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나 자신이 노력하고 애써 보려고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고 경계한다. 아직도 나 자신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이상은 절대로 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 일 수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큰 소리 쳐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경험이 없다면 나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외형적으로는 모든 신앙적과정을 다 거치고 그리스도인 이라는 이름까지 얻었지만 여전히 나 자신이 주인으로 그대로 있으면 극단적인 순간에는 언제나 나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악하고 욕심 많고 죽기 싫어하는 나 자신 튀어 나오곤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이 죽고 없는 사람들이요, 이제 그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사시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누가 그를 만나게 되든 그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주인으로 계신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대신하여 그를 대하는 사람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진정한 변화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나에게 거슬리고 진리는 나에게서 너무나 멀고 먼 옛 이야기로만 들릴 뿐이다. 이런 입장에서 진정으로 자신의 죄성에 대한 탄식이나 안타까움이나 절망을 경험하지 못하고 외형적인 의식만을 거치는 세례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세례는 회개를 반드시 전제로 하는 것이다. 죄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회개 없이, 돌아섬이 없이 의식으로만 받는 세례는 경계하는 것이다. 주님의 약속은 반드시 안팎으로 채워져야만 한다.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모든 것들은 시간이 가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안에 가진 것은 반드시 밖으로 스며져 나오게 되어 있다. 자신이 사람을 대할 때 이중적인 모습이 있거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니라면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받은 세례가 무효하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바른 교훈으로 돌이킨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유효한 약속이 된다. 겉에 좋은 것, 그럴싸한 것을 걸치려 하는 겉치레 보다는 속을 바꿔야 모든 것은 바른 자리를 잡게 된다.

이것은 비단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를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다. 만약에 거듭나지 못한 죽음의 사람들만 득실거린다면 어떤 주검에 구더기가 득실 거리는 것과 차이가 없고 예배당 꼭대기의 십자가는 구원과 생명의 표시가 되지 못하고 다만 무덤의 표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는 주님의 당부의 말씀이 기쁘게 생명의 말씀으로 들리지 않는다면 역시 우리 각자는 자신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기 전에 꼭 …

주님의 거룩한 희생의 피로 덮어 주시는 흰 눈과 같은 성결을 넘어서, 매일 매순간 그리고 이 복된 예배에서도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양털같이 그리스도의 의가 밖으로 나타나는 …



Ⅱ.신앙에 있어 무덤과 같은 경계는 언제든지 있다.(27~28)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아무리 화려하게 꾸며진 무덤도 파 해쳐보면 코를 막아야 할 정도의 고약한 냄새와 함께 볼상 사나운 것들만 들어있다. 아무리 잘 만들어진 미이라라고 해도 그 죽음과 함께 밤을 새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무덤의 특징은 죽음이요, 썩음이다. 특히 사람이 썩는 냄새는 코피가 터질 정도로 독하고 사람이 평상시에는 보이지 않는 ‘인격’이 썩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과 좌절을 줄 수 있다.

신앙이 썩는 냄새는 더욱 고약하다. 하나님을 전혀 몰랐던 사람보다도 성경을 알고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타락한 사람들은 더 많은 사람들의 머리를 흔들게 만든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6:4~6)고 경계를 주고 있다.

아무리 좋은 명당이라는 무덤도 특징은 무섭고 머물고 싶지 않고 몸서리 쳐지고 머리끝이 쭈뼛거리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곳이 죽음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특히 파 헤쳐서 주검이 들어나 있다면 더할 것이다. 무덤을 거처로 하고자 하는 정상적인 사람은 없다. 귀신들렸거나 비 정상적인 사람들 만이 무덤을 좋아할 뿐이다.(8:28~34; 막5:1~20) 아무리 많은 사람이 누워 있어도 죽어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온기(溫氣)가 나오지 않는다.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서만 따스함은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무덤의 특징은 사람이 거처하는 장소이긴 하지만 스스로의 움직임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말소리도 움직임도 서로의 관계도 인식치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도 그렇다. 육신적으로는 살아 있다 할지라도 영적인 활동이 역시 정지되어 있는 상태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러한 사람을 죽은 것으로 취급한다. 주님은 “사데 교회의 사자 …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3:1) 라고 선언 하고있다. 이 세상에는 걸어 다니는 시체로 가득한 것이다.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일수록 영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는 까닭에 장례절차는 물론 무덤까지도 간소하게 꾸미지만, 대부분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무덤을 화려하게 꾸미는데, 회를 칠하는 것은 물론이고 큰 비석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까지 세운다.

또 그것으로 집안의 세를 과신하기까지 한다. 그들은 죽은 사람의 혼령이 그 무덤에 함께 한다는 생각 때문에 겨울에 춥지 않고 여름에 시원한 장소에 자신들의 조상을 모셔야 한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 조상이 자신들의 자세에 의해서 복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살아 있을 때는 불효를 했을지라도 죽은 자에 대해서는 각별한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이것은 효도나 윤리보다는 이기주의(利己主義)에서 나오는 생각이고 행동이다.

신앙에 있어 무덤과 같은 경계는 언제든지 있다고 하는 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에 국한된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진정한 생명의 영이신 성령으로 주도되지 않는 사람과 교회, 모두 사실 치장한 무덤이 될 수 있다는 경계를 가져야만 한다. 화려하고 편리한 시설이나 사람의 수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의지이신 성령이 아닌 인간의 이성(理性)과 감성(感性)과 의지(意志)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힘에 의해서 주도 된다면 유대 종교 지도자들보다도 더 두려운 책망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알고 늘 경성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최근에 거짓으로 최고의 영화를 누리던 한 사람의 몰락을 보면서 더욱 이러한 경계를 갖게 된다. 사실 이 사람은 사이비 교주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생명을 살린다는 꾸며진 이론으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국가적으로 훈장을 받으며 최고의 대우를 받는 치장된 무덤을 본 것이다. 이 한 사람의 화려함 뒤에 감추어진 거짓은 온 인류를 실망케 했고, 우리 국민들을 절망케 했지만 이것은 누구보다도 우리 신앙의 사람들에게 더 큰 경계를 주었다고 본다.

절대적 생명의 근원이시고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창조자 되시는 최고의 인격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얼마든지 자신만만하게 거짓을 말할 수 있고, 또 거기에 연루되었던 수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몰락하는 것을 보았고, 수많은 질병으로 고통 하면서 그 거짓된 이론에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의 절망은 보상될 수 없는 것이었고 아직도 그 거짓을 옹호하면서 격려하는 사람들은 구제 불능의 사람들이다.

이것은 또 하나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하나님의 생명의 진리를 왜곡시기는 사람들과 그것을 생명이라고 환호하면서 열광하는 거짓 진리의 순종자들이 나중에 당할 그 수치가 어떠할까를 미리 보는 것 같다. 단순한 육신의 불치를 치료할 수 있다는 거짓의 형벌은 이 세상에서 끝나고 또 빨리 잊혀질 것이지만, 영원과 관련된 거짓은 영원히 영원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부른다고 생각할 때 참으로 섬뜩한 생각을 하게 한다.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인류의 비극과 아픔을 몸소 체험하실 뿐만 아니라, 친히 이 죄로 절망하는 인류를 살리시기 위하여 치욕과 고통의 십자가를 지신 것은 바로 슬픔으로 끝날 절망만 가득한 어두움의 무덤인 이 세상을 살리려 그렇게 하신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과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이왕에 허락된 성령과 말씀과 더불어 오늘도 내일도 또 영원히 천국을 사는 저와 여러분 …



Ⅲ.죄의 뿌리는 무섭게 우리를 사로잡는다.(29~32)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자신들의 부족한 것들을 늘 조상들을 빙자하여 매꾸는 것이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다. 때로 필요할 때는 자신들의 조상을 미화하고 고무하면서 자신들이 그들의 후손임을 들먹거린다. 예수 그리스도와 대화하던 유대인들을 보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8:39~40)고 말씀하신다.

또 다른 사악한 인간성은 조상들의 죄상이나 실수는 자신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는 변명이다.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우리 말에 흔히 사용되어 지는 속담하나가 여기서도 여지없이 들어 맞는데 그것이 바로 “잘되면 자기 탓, 못 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이 ‘만일’이라는 말은 언제나 있을 수 없는 일이거나 실현 불가능한 상황들이다. ‘내가 만약에 에덴에서 뱀으로부터 같은 유혹을 받았다면 절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는 따먹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만약에 소돔 성을 빠져 나오는 롯의 아내였다면 나는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을 텐데 …’ 쉼 없이 사람들은 ‘만일, 만일, 만일, 만일, 만일’을 가지고 핑계하고 변명하고 뒤집어 쒸우고 빠져 나온다.

그러나 나 자신이 그 상황에 던져졌을 경우도 그들보다 더 낳을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겸손이 더 중요하고, 또 나 자신이 그런 상황에 실지로 있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조상이든 남이 저질은 일이든지 ‘나는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식은 조심할 필요가 잇다. 그래서 주님은 신앙의 사람들이 이 ‘만일’을 사용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마5:33~37 참고)

그러나 실상은 이런 자세는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라고 주님께서는 예리하게 지적하신다. 자자손손(子子孫孫) 나쁜 성품은 쉽게 버리지 못하고 답습한다고 하는 것이 심리학자들간에도 증거 되는 정설이다. 어떤 나쁜 일을 겪으면서 자란 자녀는 그러한 부모의 모습에 몸서리가 처져서 그렇지 않을 것 같은데도 그 후대에도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고 하는 것이 이론이다.(예: 구타)

이러한 도덕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죄성도 마찬가지임을 주님께서도 증거 하신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44)

한 번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은 좋은 것들은 아무리 가르쳐도 교육되지 않지만 나쁜 것은 교육이 없이도 계승이 되는 사악함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러한 죄의 사슬에서 자유케 해 주시려고 주님께서 오셔서 저주를 받은바 되셨음을 확인하면서 역시 헤아릴 수 없는 감사를 갖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갈3:13)

그러므로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는 죄악의 계보에서 탈 출하는 것은 사람의 방법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전혀 새로운 방법이요 감히 생각지도 못할 놀라운 방법을 십자가로 마련하신 것이다. 이 엄청난 주님의 희생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결코 진노의 대상이 아니라 은혜의 계보를 따라 복 받는 사람으로 남아야 하겠다.

저주의 계보에서 복의 계보로 호적을 완전히 옮겨 주신 것이 바로 골고다의 피흘림이요 3일만의 빈 무덤이었고, 다시 오셔서 자신의 피를 지불하고 죄와 저주에서 사신 자기 백성들을 영원한 영광으로 데리고 들어 가실 것이다.

우리의 불순종과 불경건은 베드로 사도께서 증거 한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벧전4:3) 라는 말씀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저주의 뿌리에 머무를 필요가 없다.

결국 하나님 없이 의롭게 살아보겠다고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발버둥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일 뿐이다. 신앙 한다고 하는 것은 외관을 씻고 옷을 바꿔 입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나의 인생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지 않는 한 영적인 부분에서는 단 한걸음의 진보도 있을 수 없이 무능한 것이 바로 죄진 인생들이다.

우리의 삶이 것 모양만 바꾸려 하고 꾸미려 한다면 잘 다듬어진 부자 가문의 무덤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럴 싸하게 큰 비석을 세우고 회를 발라 모양을 꾸민다 해도 여전히 속에는 생명 없는 뼈들과 냄새 나는 썩는 것들 뿐일 것이다. 이름뿐인 그리스도인, 간판뿐인 그리스도의 교회일 뿐일 것이다.

지금도 우리의 어떤 힘보다도 강하게 우리를 사로 잡아 죄 아래로 이끄는 사악한 죄의 뿌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받음으로 단절하고, 넘치도록 생명을 부어 주시는 생명 나무이신 그리스도로부터 하늘의 영양소를 넘치게 공급 받아 생명의 냄새 영광의 냄새를 우리 사는 주위에 풍기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