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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14~18 2006-12-31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우리는 오늘 본문에 반복되는 [은혜]와 [진리]를 읽게 된다. 이것은 가장 귀중한 하나님의 속성이요 생명의 양면성이다. 이것은 사람에게 있어서도 신앙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이 둘은 천국을 향해서 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자동차의 양쪽 바퀴와 우리 사람들의 두 다리와 같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은혜]를 좋아하면서 진리는 좋아 하지 않는다. 이것이 또 다른 죄의 습성이다. 뿐만 아니라 은혜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참과 관련 없는 거짓 것들이 많이 신앙과 교회 속에 들어 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분명한 것은 진정한 은혜는 진리와 반드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진리와 관계없는 어떤 것들이 ‘은혜’라는 이름으로 행해 지고는 있지만 말씀 즉, 진리로부터 오지 않은 거짓 것들이 많고, 이런 이유로 많은 신앙 한다는 사람들이 ‘은혜’라는 이름으로 속고 있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인간이 주는 선물은 영원한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진정한 기쁨을 주지 못한다. 즉, 영혼이 기쁨을 누릴 수 없는 입장에서 은혜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은 ‘은혜’를 바로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은혜는 단순히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다. 은혜는 같은 진리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만 온다.

[은혜, 헬, 카리스(caris), ]는 [기쁨, 유쾌함, 헬, 카라(cara),]과 어근이 같고 이러한 진정한 기쁨과 유쾌함은 역시 죄를 용서 받는 데서만 오는 것이다. 같은 낱말로 쓰여진 것은 아니지만 베드로 사도는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3:19) 라고 권하고 있다.

오늘 날 신앙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은혜’ 비슷한 것이라도 받아 보겠다고 얼마나 찾아 다니는지 모른다. 또 은혜를 받기는 원하되 자신이 은혜로운 사람이 되려고는 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사죄의 길을 주신 것보다 큰 은혜는 없다. 이런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자체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은혜다.

그의 육체로 오심이 은혜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님이시면서, 왕의 자리에 오지 않으시고 우리 인간의 가장 초라한 자리에 오셔서 生老病死의 온 갓 고난을 나 체험하신 것이 은혜이다. 짐승의 우릿간에 포대기 한 개 제대로 없이 여물 위에 놓이셔서 짐승 같은 죄진 사람들의 밥이 되기 위해 오셨고 가장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자리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이 사실이 얼마나 감사가 되는 지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는 우리 영원한 죄의 저주를 위해 자신의 몸, 생명을 제물로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이야 말로 헤아릴 수 없는 은혜이다. 그 역사가 없었다면 우리 모두는 캄캄한 마음의 어두움을 안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운명이었을 것이다.

사죄를 위한 희생과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시려고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셔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마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힘겹게 주님을 섬기지 않도록 성령을 보내 주신 것, 이 모든 것이 최고의 은혜요 진리의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키신 사랑이다. 더 이상 무엇을 더 바래겠는가!

은혜를 바로 아는 사람 만이 그 은혜 위에 은혜를 더욱 풍성히 누리기 때문에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16)고 고백하는 것이다.

모두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만족하는 은혜의 사람 진리의 사람들로 사시기를 …



Ⅰ.인간에게 은혜와 진리를 회복시켜 주시려고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땅에 오셨다.(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으로 오심은 어떤 이유에서도 약화시킬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절대적인 사랑이다. 주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 자체가 십자가에 뒤지지 않는 희생이요 고통이셨을 것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적절한 비유를 찾을 수 없지만 아주 작은 비유로 비행기를 타고 서울을 오가던 사람이 걸어서 서울을 오가는 것보다도 비교될 수 없는 불편을 겪는 것이다. 시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3차원 속으로 내려 오셨으니 우리 사람으로서는 적절히 비교할 예화가 없다.

결국 이러한 엄청난 희생은 에덴에서 범죄 하여 은혜와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진리를 회복시켜 주시려고 주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아무리 이렇게 엄청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치뤄졌어도 거짓에 속한 사람들은 진리를 소화할 수가 없다. 예수께서 자신을 거역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44)고 지적하시는 것이다.

진리의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했던 유대인들은 진리를 받아 들일 수가 없었다.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8:45~47)

예수께서는 비루하고 연약해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사람들은 비록 추한 죄인일지라도 책망하는 것 보다는 용서하고 불쌍히 여기셨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듣기 거북할 정도로 책망하고 저주까지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가장 잘 안다고 자랑하고 가르치면서도 주님의 참된 은혜와 진리를 늘 거역하는데 앞장섰기 때문이었다. 이래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9:41) 했고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4:17)고 야고보는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안타까움을 바울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갈4:16) 거짓에 속한 사람들은 진리에 대항하게 되는 데 그것은 자신들의 거짓이 그 진리 앞에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기 때문에 진리를 싫어하고 원수 시 한다는 사실이다.

죄에 속한 사람들도 자신들을 좋게 말하고 그 죄를 합리화 해주면 그런 대상에 대해서는 좋아 한다.

은혜는 사랑과 관련되고 진리는 공의와 관련된다.

하나님의 속성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신 분이요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도 역시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구하는 사람도 진리를 찾는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만족할 수 있다. 십자가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진리의 성취였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이러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진리를 받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5:44)는 주님의 지적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에게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참된 은혜와 진리를 풍성히 누리게 하시려고 이 땅에 우리와 꼭 같은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음을 기억하자.



Ⅱ.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16~18)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진정한 은혜와 진리의 출처는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말씀하신 것은 사실이다.

이 은혜와 진리가 아니면 죄에 매여 있는 인간은 절대로 자유 할 수가 없다. 이런 표현을 베드로 사도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는 것이고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기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10:9)

하셨고 다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선언 하신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고 가르치는데 진리의 출처와 그 진리를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만이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 고백할 수 있고 율법이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처럼 이 역사 속에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임을 사도 요한은 증거 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1:19)

어떤 사람의 듣기 좋은 강연도 철학도 시간이 지나면 가치를 잃는 것은 그 사람이 은혜와 진리를 줄 수 없는 한 사람의 죄인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은 참되신 은혜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순종할 때만 은혜와 진리로 충만함을 받을 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이 은혜와 진리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자신의 것일 수 없기 때문에 이내 바닥이 나고 만다. 이것은 마치 샘과 양동이의 차이만큼이나 다르다. 샘은 끊임없이 솟아 나지만 양동이는 아무리 넘치도록 담아 두어도 퍼내면 결국 바닥을 내 보이고 말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골2:9)는 분이시다.

이런 입장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받아 가르치는 주님의 종들의 겸손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종들은 마르지 않는 샘이신 주님이 아니고 의의 태양도 아니기 때문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거울은 빛을 받을 때 반사하지만 어두움 속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주님께서는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사람을 잠시라도 거룩하게 할 수 있는 것 역시 하나님의 진리인 말씀뿐이심을 지적하셨다.

이런 입장에서 사람을 신뢰하고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만 솟아난다. 하나님 만이 은혜와 진리의 샘이시기 때문이다.

은혜와 진리는 하나님 만이 가지고 계시는 속성이고 하나님께서 영으로만 존재 하셨다면 우리는 은혜와 진리를 영원히 볼 수 없었을 것인데 요한 사도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8)고 증거 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진리를 이 죄악에 나타내셨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Ⅲ.주님의 몸인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해야 한다.(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결국 사람은 참되신 은혜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순종할 때만 은혜와 진리로 충만함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15) 했고 바로 뒤에서 자신을 “진리”나 “진리의 소리” 라고 하지 않고 단순이 “소리”라고 만 소개하고 있다.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23) 했는데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진리를 단순히 소리로 듣고 만다는 사실이다.

진리는 소리로만 알아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들어와서 삶을 움직일 때 비로소 가치가 있고 역사가 일어 날 수 있다.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32)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리를 단순히 소리로 듣고 소리로만 머리에 가지려고 하는 데서 하나님의 생명의 은혜를 실질적으로 누리지 못하고 만다. 이런 이론에서, 비록 그리스도 이전 사람이지만 知行合一 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이론은 신앙에서도 좋은 논리이다.

영원한 진리가 몸을 입고, 인격을 입고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거기에 대한 확인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는 요한 사도의 고백이고 나중에 다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고 증거하고 있다.

‘교회’나 ‘성도’ 라는 말이 다 이 거짓된 세상과 구별된 존재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이다. 이런 귀중한 진리요 은혜의 도구인 하늘에 속한 존재들이 속된 세상과 혼합하고 타협하는 것은 마치 결혼식을 치르려는 신부가 하얀 웨딩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시궁창을 뒤집어 쓴 것처럼 부끄러운 모습이다.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데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신부는 그러한 신랑에 어울릴 수 없는 것이다.

진리는 편한 것 자유스러운 것이며 은혜는 사람을 행복케 하는 유일의 출처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진리를 가장 구체적으로 인간 속에 가져오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

그러나 주님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에 가져 오시는 성령을 보내실 것임을 언약하신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15:26)

그 분이 바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실 분이심을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요18:38f) 했지만 이런 세상에서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온 갓 처세를 다하는 사람은 진리에 대해 관심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다.

오늘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경계는 주님의 은혜와 진리의 터전인데 교회가 [바울은 “…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3:15b)] 진리를 잃어버리면 인간의 이성과 감정과 함께 헌법보다도 더 가혹하다는 맹종을 강요하는 敎理가 자리하게 된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지만 하나님의 진리로 다스려지는 세상과 구별된 특별한 기관이다.

오늘 교회가 진리를 도외시하고 은혜만 부르짖다 보면 진리로부터 가 아닌 거짓된 은혜라는 미명에 놀아날 수 있고 하나님은 이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기록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음에도 쉽고 가벼운 것, 편하고 따듯한 것 만을 추구하는 무사안일의 죄의 습성에 붙잡히는 교회와 사람들이 많다.

진리만이 죄에서, 무지에서, 지옥에서 자유케 하고 은혜를 충만케 하셔서 평안과 기쁨과 사랑과 감격으로 천국을 향해 이끄실 것이다.

은혜와 진리는 별개가 아니라 생명의 양면이고 하나님의 속성이며 그의 백성들이 지속적으로 가져야 할 믿음의 양 축이다.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삶을 삶으로 주님의 거룩한 성도의 구별된 삶을 세상에 나타내고 자신은 진리에서 오는 은혜로 충만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