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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롬 12:9~13 2007-10-14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사가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주님의 몸을 섬기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과 각각의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라고 하는 섬김의 자세를 당부하면서 각각의 한 사람으로서는 각 지체일 뿐으로 은사의 차이는 바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데서 가치를 찾게 된다는 말씀을 3~8절에서 생각했었다.

차제에 꼭 지적하고 싶은 한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은사에까지 등급을 매기는 모습들을 은사주의를 주창하는 교회들에서 보게 되는데 그것은 옳지 못하다. ‘가장 귀한 은사니, 말단 은사’니 ‘말단 은사도 하나 못 받은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등등의 자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판단하는 잘못된 행위들이다. 은사의 가치는 모두가 다 귀하며 그 은사는 그리스도를 섬길 때만 빛을 발할 수 있다.

오늘 우리가 다루는 이 부분은 주님을 섬기는 각각의 다른 은사를 100% 사용함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12장에서 각 지체로서의 은사의 역할을 제시한 다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고전12:29~30) 라고 묻고 나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12:31)고 지적한 후에 위대한 사랑 장이라고 하는 고린도전서13장을 증거하고 있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고 나서 다시 교회 속에서 은사의 사용의 경계 점을 고린도전서14장에서 지적하고 있다.

사랑을 함께 가진 은사의 사용이 각 지체된 그리스도인과 교회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가가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이고 이런 내용에서 고린도전서13장과 같이 사랑이 역사하는 모습들을 소개하고 있다.



Ⅰ.사랑은 가면을 쓰지 않는다.(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그리스 시대의 말을 빌리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랑이 있었다. 가장 쉽게 불타고 꺼져버리는 [에로스]적인 사랑과, 자연적이면서 억지로 라도 지속될 수 밖에 없는 [스토르게], 친구나 이념을 좋아하는 표현으로 나타나는 [필로스], 그리고 성경에 가장 빈번하게 나타는 절대적인 사랑인 [아가페]가 다 사랑이라는 의미의 단어들이다.

그러나 앞의 세 가지의 사랑은 사람이 범죄 하게 되면서 가치에 있어서나 사용에 있어 상대화 되었고 빛을 잃게 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아가페를 바탕으로 할 때만 바른 가치를 가질 수 있고 또 바르게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남녀의 에로스적인 사랑은 신약성경에서 찾아보기 어렵고, 태생적으로 맺어지는 스토르게 역시 원형은 나타나지 않고 변형된 형태로 쓰여지고 있을 뿐이다.(V10) 복음 속에서는 조건 없으신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사랑인 아가페와 친구와 스승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필로스가 상당히 빈번하게 나타난다.

첫 부분에서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라고 교회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 상호간에 한 몸의 지체로서 나눠지는 사랑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는데 상당히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표현이다.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고후6:6)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딤전1:5)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헬, 안휘포크리토스(anypokritos) (외식하는) - 무대 연기자, 위선자]” 할 때 사랑은 ‘연기하지 않으며’ 가면을 쓰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반드시 진리 안에서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사랑은 진리를 사랑한다. 베드로 사도가 이에 대해 좋은 모범을 증거하고 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벧전1:22)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기 전에는 여러 가지 인간적이고 육신적인 이유에서 사람들을 대해왔는데 이제는 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5:14) 라는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에로스는 때로 대상을 차지하기 위하여 자신을 철저하게 위장을 하고, 음흉한 생각으로 접근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자가 위에서 한번의 영원한 제사를 드림으로 완성된 은혜의 사랑은 절대적으로 거짓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교회 속에 들어와서 사랑하는 척 하는 것은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과 형제와 자매들 즉, 지체들을 속이는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무서운 일이다. 사실 이런 입장에서 이단들의 가면은 하나님께 무서운 책망과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사랑의 다음의 모습은 사랑하는 결과라고 볼 수 있는데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는 당부를 듣는다. 성경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요청까지 하는데 미워해야 될 대상이 있음을 선언한다.

여기에서 악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면서 어두움에 속한 낱말로 대단히 좋지 않은 모든 것을 의미하는 말로 사랑에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단어이다. [악, ponhrov", poneros, 악한, 독한, 사악한, 악독한, 간악한, 더 악한, 흉악한, 괴악한, 나쁜, 추잡한, 인색한, 게으른] 등등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입에 올리기에 그다지 적합하지 못한 표현이다.

‘미워하고’는 ‘지극히 미워하다, 싫어하다’ 라는 보다 더 부정적인 표현의 동사이다.

“선에 속하라”는 당부는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살전5:21) [선, ajgaqov", agathos, 앞에서 말한 ‘악’에 반대되는 (육체적, 도덕적으로) 선한, 은혜, 좋은 것, 좋은 일] 등등의 뜻으로 확실히 빛과 어울리는 하나님의 속성을 의미한다. [속하라, 헬, 콜라오(kollao), ‘아교’에서 유래하여 아교처럼 붙이다. ‘붙이다, 굳게 붙이다]라는 의미이다.

나무를 아교로 붙여서 잘 건조 시키면 나무의 다른 부분이 벌어질지라도 붙인 부분은 절대로 떨어지는 일이 없는 것처럼 빛이신 하나님의 선한 뜻과 은혜의 좋은 것들에 견고히 붙어서 하나가 된 체로 살아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두움은 몸서리치도록 미워할 수 있어야 하고 선에 떨어지지 않게 완벽한 하나를 이루는 삶이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이런 것들은 그럴 싸하게 연기를 하거나 가면을 쓰는 것처럼 위장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삶에서 자연스럽게 묻어나오는 모습이 되어 있는 것이 진정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요 섬김일 것이다.



Ⅱ.사랑은 겸손과 부지런함을 함께 가진다.(10~11)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앞에서의 사랑의 원칙을 제시했다면 여기서는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서로 간에 어떻게 나타내는가 권면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두시고 가셔야 할 시간이 되어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라는 당부를 주신 바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모범을 보인 교회가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였었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살전4:9)

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어느 순간만이 아니라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해야만 하는 것이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히13:1) 베드로 사도도 신앙의 성장에 이 형제 사랑을 포함하고 있다.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1:7)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10) 이 말씀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랑하고는 조금 차이가 있다. 모든 사람은 다 사랑에 굶주려 있다. [찬373:2 곳곳마다 번민함은 사랑 없는 연고요, 측은하게 손을 펴고 사랑 받기 원하네; 4 기갈 중에 있는 영혼 사랑 받기 원하며, 아이들도 소리 질러 사랑 받기 원하네…]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우애하고, 헬, 필로스토르고스(philostorgos), (혈연관계에서 유래, 선천적인 인척관계에 의한) 사랑, 동물들이 나중에 새끼들에게 도움을 받지 않지만 자신의 새끼라고 하는 것 때문에 사랑하는 것과 같은 필연적인 사랑]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형제간의 사랑이 이래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 중요한 행동을 수식하고 있는 두 단어는 [서로]와 [먼저]이다. 받아야 하는 소극적인 모습이 아니라 [서로 먼저]이다. 이런 입장에서 세상의 관계와 크게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도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사랑을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그 받은 사랑을 가지고 이제는 먼저 사랑하게 되어 있다.

여기는 반드시 사랑 받은 자로서의 겸손이 전제 되어야만 한다.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3) 라는 당부를 주면서 그리스도의 모범을 제시한다.

만약에 주님의 백성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죄 사함을 받은 것이나, 아무 대가 없이 죄의 수렁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사랑 받음을 망각하는 행동이 될 것이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11) 사랑은 사람을 부지런하게 만든다. 생전 머리도 잘 안 감던 청년도 한 사랑하는 대상을 보게 되면 머리를 자주 감을 뿐만 아니라 거울을 자주 보게 될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고후5:14)라고 격려한다.

게으름은 언제나 범죄의 기회가 되고 마귀에게 기회를 줄 수 있다. 다윗의 범죄는 그가 열심을 가질 때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모든 영어번역 번역들에서는 볼 수 있지만 우리 개역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한 단어가 있다. “to pneumati(토 프뉴마티) (in Spirit)(성령 안에서)” 라는 낱말이다. [표준 새 번역]에서는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라고 이 부분을 번역하고 있다.

참으로 주님의 사랑을 맛본 사람이라면 냉랭하게 게으를 수 없고 절망과 저주, 슬피 울며 이를 갈 처지에 있었던 우리들을 아무 공로 없이 영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신 그 사랑에 불 지핌을 인하여 뜨거운 사랑을 기도로 고백하고 함께 같은 은혜를 나눈 형제 자매들과 함께 열심으로 주님을 섬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으로 역시 신앙에 게으름이나 주님을 섬김에 게으르다면 그것은 아직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을 완전히 맛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것이 처음 사랑이고 이것을 잃어버렸다면 여기에 우리는 감히 변명치 못할 것이다.

“육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 열심을 내서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십시오.”(10~11-표준 새) 라는 당부에 부끄러움이 없는 …



Ⅲ.하나님을 기대하면서 그의 백성들을 섬긴다.(12~13)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이제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의 당부들은 앞의 삶에서 나타나는 결과들로 나타날 당연한 모습들이다. 이 구절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바울 사도가 권면했던 것처럼 순서에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이미 바울 사도는 이 로마서5:2~4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같은 고백을 한 바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은 이 세상에서의 형통보다도 오히려 주님의 오심에 대한 소망에 집중되어 있다. 신앙이 신실한 사람일수록 이것은 사실이다. 일세기에 그 많은 박해와 수욕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사람들이 기쁨으로 죽음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고 가신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세상의 가치로는 환란 즉, 어려움을 견디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요 저주 받은 것이다. 그럼에도 주님의 백성들은 환란 중에도 참을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와 말씀의 격려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형제였던 야고보는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약5:10~11)고 격려하고 있다.

계속해서 닥치는 믿음으로 인한 어려움에도 연단되어 가면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과거에 있었던 경험을 교훈 삼아 다시 닥치는 어려움을 뚫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히10:32)

다시 오셔서 상을 주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즐거운 찬송을 드리고 여러 가지 환란을 이하여 믿음을 연단하고 힘겨울수록 기도로 항상 삶을 맡기는 생활이야 말로 그리스도인의 이 세상을 사는 힘이요 능력이다. 바울은 골로새 교우들을 향해서도 같은 당부를 주고 있다.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4:2)

그러나 신앙의 삶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이것은 적어도 신앙의 가장 구체적인 실천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를 다 아시고 기억하시겠지만 무엇보다도 성도를 섬기는 것을 잊지 않으신다고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히6:10)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도 지극히 적은 성도를 섬김에 대해서도 직접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마25:35) 라고 칭찬하셨다.

나중에 교회의 가장 중책인 감독 즉, 장로의 자격에 까지도 이 덕목을 거론하고 있다. “그러므로 감독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딤전3:2)

사랑은 사랑이란 이름의 옷을 입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하늘의 사랑으로 사는 사람은 어두움에 속한 모든 것들을 미워하는 반면에 빛에 속한 하나님에 속한 것에 자신을 붙이는 분명한 모습을 갖는다.

혈육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열심을 내서 부지런히 일하며 주님을 섬기십시다.

주님께서 오셔서 행위대로 갚아 주실 소망을 가지고 지체들의 어려움을 돌아보고 믿음으로 살려는 것 때문에 같은 곤란을 겪는 지극히 적은 자들을 접대하고 격려하는 일을 지속해서 세상에 절망한 영혼들이 교회 속에서 희망을 찾는 그런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