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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롬 12:14~21 2007-10-21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자신을 세상과 구별하여 산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교회의 지체들에게 사랑으로 섬기는 주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 속에서 어떤 자세로 살 것인가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이미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황금률에 담겨있는 중심 내용들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에서만 그리스도인 일 수 없는 것은 삶의 기준이 이중적일 수 없다는 것을 앞에서도 논한 바 있다. 이러한 사상은 사상보훈에서도 가르친 바 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만 의도적으로 선을 행하는 위선을 또한 성경은 경계하고 있다.

至高至善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대상에게 먼저 사랑과 희생으로 다가가는 것은 모든 평화의 출발점이고 마음과 영혼의 중심에서 베어 나오는 행동은 그 사람의 마음 중심에 좌정하고 계신 성령의 지도로 가능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오늘 본문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속에서의 삶의 자세는 첫 절이 서론이라면 마지막 절이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14) 세상의 어떤 윤리나 종교도 원수에 대하여 이런 자세를 가르치는 것은 없다.

주님은 산상보훈에서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는 적극적인 하늘에 속한 사랑의 윤리를 가르치셨고 적어도 초대교회에서의 모든 성도들은 자신들의 이해득실에 관계없이 이 말씀을 실천했었다.

성미가 급해서 늘 원수들 앞에 설치던 베드로 사도 조차도 마침내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9)고 권면하고 있다.

이러한 베드로의 태도는 주님께서 잡혀가시기 바로 직전에 예수께 달려드는 말고에게 칼을 내리쳤다가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은 “…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26:52)신 주님의 교훈을 마음에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시대에 믿음의 사람들은 오히려 율법의 원리를 더 강하게 들이 대면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살벌한 말씀의 잣대를 더 잘 적용하려는 안타까움을 본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14) 특히 여기 ‘핍박하는’ 이라는 말이 [헬, 디오코(dioko), 박해하다, 구박하다, 좇아가다, 힘쓰다, 갈망하다] 부정적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열심히 그리스도를 따라가려고 힘쓰는 의미로도 쓰인다. 상대가 자신을 믿음 때문에 괴롭히든지, 아니면 그리스도를 본 받으려고 열심을 내든지 모두가 다 믿음의 사람에서의 입장은 축복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하늘에 속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우리는 너무 성급하게 남을 평가하고 경계하고 미워하다가 나중에 돌아서서 미안해 하고 후회하는 경우들이 많은 가운데 이 말씀을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축복의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므로 그 귀한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영광된 권한을 핍박하는 대상을 위해 기도하여 그 사람을 변화 시키든지 아니면 그 축복을 상대가 받지 못하여 그것이 자신에게 되돌아 오건 말씀 대로 행하기만 하면 손해 날 것이 없는 것으로 ‘믿져야 복’ 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눅10:5~6)고 약속하신 사실을 꼭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러분 모두가 이 축복의 귀한 권한을 사장해 버리지 말고 주님 오실 때까지 열심히 사용하여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이 세상에는 복이 되는 귀중한 역할을 감당하는 …



Ⅰ.동고동락(同苦同樂)을 당부하신다.(15~16)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범죄 한 에덴이후에 사람들은 나눔이 아니라 경쟁의 형태로 변하여 아담과 하와 때부터 이미 부부간에도 불행의 원인을 자신 속에 찾으려고 하는 것 보다는 늘 상대에게서 찾으려는 사악한 습관이 생기고 말았다.

오늘의 시대에도 외형적으로는 즐거움의 잔치도 축하해주고 어려움을 당한 동료에게 위로는 하는 일들이 있기는 하지만 바울을 통해서 주시는 이 교훈은 이런 정도에서 머무는 의무적인 부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적인 세상 속에서 상대의 행복이 자신에게는 불이익이 될 수 있다고 판단되거나(각 당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박수를 치는 낙선자들) 음지가 양지 되면 양지가 음지 된다는 일반적인 상황들 때문에 즐거워 하는 자들의 기쁨에 진심으로 참여치 못하는 세상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슬픔에는 그래도 동정을 보내는 것이 조금은 쉬운 이유가 다른 사람들의 슬픔을 보면서 자신의 슬픔을 떠올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늘의 사람들은 이 상대적인 가치에 머무르는 사람들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시지만 나사로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리셨고(요11:35), 포도주가 떨어져 흥이 깨어진 혼인 잔칫집에 포도주를 만들어 주셔서 기쁨을 회복시켜 주셨는가 하면, 전도를 나갔다가 돌아와 ‘귀신들이 항복하고 질병이 도망하더라’는 흥분된 제자들의 모습과 함께 성령으로 기뻐하시는(눅10:21) 주님의 모습을 뵐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러 온 세례 요한은 예수께로 몰려가는 사람들을 시샘 하듯 보고하는 자신의 제자의 말에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3:29~30)

반대로 신앙이 잘못되었던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이 다 교회로 몰려가는 것을 보고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행5:17) 라는 간악함의 차이를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가 아닌 이상 어느 누구의 즐거움에든지 함께할 수 있는, 그래서 그 기뻐하는 자들이 더 큰 감격을 갖도록 돕는 적극적인 기쁨의 나눔과 슬픔을 나눠지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는 말씀은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명령이다. 구약의 욥이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었던 이유는 바로 이런 삶의 자세를 가진 사람이었다. “고생의 날 보내는 자를 위하여 내가 울지 아니하였는가 빈궁한 자를 위하여 내 마음에 근심하지 아니하였는가”(욥30:25)

특히 가족이나 친척, 동료가 즐거워하거나 슬퍼할 때 나눌 수 있지만 자신을 미워하거나 적대시 하는 사람들의 형통과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나누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여기 ‘즐거워하는 자들, 우는 자들’은 반드시 그런 사람들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늘의 가치로 사는 사람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도 사람들로부터 다르게 취급될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오늘 바울과 같은 당부를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벧전3:8)

결국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 수 있기 위해서는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는 삶의 자세가 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도 죄인에 대한 긍휼과 함께 겸손이 중요하고 자신을 더 낳은 존재로 생각치 않을 때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우리의 마음은 같이 두거나 낮은데 둬야지 높이 둬서는 주님의 명령을 어떤 것도 순종할 수 없음을 배운다.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진정한 즐거움도 없고 슬픔을 다 소화하지 못하는 인류를 위하여 그 낮고 천한 고통의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중심에 모심으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고 주변의 기쁨을 나의 기쁨처럼 즐거워 해주고 슬픔을 나눠지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짐으로 주님께 영광이 되며 주변이 화평의 복음으로 충만해지는 도구들로 사는 …



Ⅱ.악에도 선으로 대항하는 평화의 도구가 되라.(17~18)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이 교훈 역시 베드로 사도의 당부와 더불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벧전3:11~12)

우리 인간은 악을 대함에 있어서 악으로 대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러나 악은 악으로 정복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악을 도말 하시기 위하여 의로운 십자가를 지셨다. 하나님께서 그러셨음에도 우리는 곧잘 악에 악으로 대항하려는 무모함을 보일 때가 많다.

특히 이 대상이 “아무에게도, anyone, 모든 사람, everybody”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악으로 대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선을 한 일을 해야 될 대상은 이 인류 모든 사람들 앞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교회 속에서의 섬김과 교제 속에서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9)는 당부를 생각한 바 있다. 바로 오늘 17절의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는 말씀도 교회 속에서와 다르지 않다. 이것은 우리의 삶의 지침이 다를 수 없음을 의미한다.

베드로는 좀더 적극적인 당부를 주고 있는데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벧전3:13) 라고 악보다 선을 행함이 얼마나 유익한가를 가르친다. 물론 여기의 선은 하나님을 닮을 자세를 말씀한다.

주의 해서 봐야 할 것은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한 것이다. [도모하다, 헬, 프로노에오(pronoeo), 미리 생각하다, 미리 준하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선을 행할 것을 늘 ‘미리 준비하고 계획하라!’는 의미이다.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려고 하든지 미리 그 일에서 선을 행할 것을 계획하여 주님의 선하심을 들어내라는 말씀이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18)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들과도 화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말씀이 화평을 위하여 죄를 지어도 좋다는 말씀은 아니다. 하나님의 평화의 하나님이시고 화평으로 우리를 부르셨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평화의 사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전제되는 것은 역시 “할 수 있거든”이다. 이 전제는 화평을 이룰 수 없는 대상을 念頭해 두고 있다. 아무리 평화의 관계를 원해도 상대가 거부하는 어쩔 수 없는 대상을 말하는 것으로[김정일] 회교도들은 그들의 삶의 원리상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과는 평화를 거부한다. 그래서 그들은 포탄을 몸에 감고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긴다.

다윗 시대에 군대 장관이었던 요압은 평화의 시대에 자신에게 대하여 의심 없이 나아온 두 사람을(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 칼로 죽이므로 많은 공로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같은 운명으로 죽고 만다.(왕상2:5, 34)

“할 수 있거든”이라는 또 다른 의미는 모든 사람들과 평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동원하라는 당부의 말씀이다. 우리가 먼저 모든 일을 평화로 가져가기 위하여 애쓴다면 불행한 일에 가슴 저미는 일은 많이 줄어들 것이다.

이것이 적어도 불신의 세상에서 조차라면 우리는 교회 속에서 얼마나 더 형제자매 간의 평화와 불신의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평화 하게 하는데 힘써야겠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형제 자매 간에 불화를 화평케 하는 일에 어떤 경우는 더 어렵게 만들어 버리는 경우도 있는데 참으로 주의 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가능케 할 근거를 지적한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

악을 악으로 대항하면 결국 나도 악의 도구가 될 뿐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당부하고 그리스도인의 세계를 넘어서서 모든 사람들과 화평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평화의 복음을 심는 …



Ⅲ.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몫이 아니다.(19~20)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는 아닐지라도 어쩔 수 없이 원수로 자처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지적한다. 사실 그리스도인에게는 ‘원수’ 라는 대상 자체가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우리의 대적은 오직 마귀 사탄 즉, 하나님의 원수일 분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 이 악의 영들에 대하여는 영적으로 무장하고 적극적으로 대적할 것을 성경은 명령하고 있다.(엡6:10~18)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그러나 이 어두움의 세력의 하수인 노릇 하는 원수가 있을지라도 그것을 대적하는 데 우리는 너무나 연약하고 부족하다는 사실을 아시는 주님께서 그 원수를 우리가 직접 대항하는 것조차 경계하시는 것이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19) 이 말씀은 신명기32:35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보수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 때에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니 당할 그 일이 속히 임하리로다”

시편94:1에도 “여호와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취소서” 하였고 NT 에서는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 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살전4:6)

비록악의 하수인이 되어 스스로 원수로 자처할지라도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보다 적극적인 원수에 대한 승리의 비결인 것은 이것이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승리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악으로 악을 이길 수도 없고 또 악으로 악을 이겼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이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갚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사탄의 수하에 사로 잡혀 있는 가련한 영혼을 위하여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는 것이다.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 이것은 결과적인 것이다. 만약에 이유가 원수를 이렇게 힘겹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벌써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을 잃은 것이 될 것이다.

다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보다 적극적인 원수를 이기는 방법일 것이기 때문이다. 일 세기의 많은 그리스도의 반대자들은 무력과 폭력으로 괴롭히는 자신들을 대적하지 않고 오히려 축복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회개한 사래들이 얼마든지 있다.

서로가 싸우면 둘 다 상하고 만신창이가 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에 대한 대항을 친히 감당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결론적인 주님의 명령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21)는 것이다. 절대로 우리가 악에게 어두움에게 질 수는 없다. 그러나 세상의 죄악의 방법인 같은 악으로 이길 수는 없기 대문에 하나님께 맡겨서 이기는 것이야 말로 선으로 이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