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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롬 14:1~12 2007-11-11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  
일세기 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칭찬하기보다 비판하는데 더 익숙하고, 신앙의 상태에 상관없이 자기와 다른 것에 대한 아량을 갖는 것이 참 어려운 것 같다. 당시의 그리스도인들 사회에서 특히 문제가 되었던 유대주의 즉, 율법과 복음의 분명한 구분을 하지 못해서 어떤 경우에는 복음 속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생각과 그들이 이미 빠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과거의 종교적 관습을 완전히 벗어 버리지 못하는 모습들이 더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행15장)

믿음으로 들어와 있으면서도 아직 율법의 관습에서 완전히 자유하지 못한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들로서 복음을 받아 들인 사람들 중에서 바울은 전자에 속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어떤 관습에서 완전히 자유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을 ‘연약한 자’로 표현하면서 그럼에도 그들이 이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은혜의 언약 속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을 당부하면서 죄성의 병폐인 ‘비판’이나 ‘판단’에 대해서는 주님 오실 때까지 미뤄 두라는 경계를 주고 있다.

사실 바울의 믿음의 아들이라고 하는 디모데 조차도 경건을 위하여 금욕주의적인 삶을 살았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5:23)

아직 온전한 진리의 맛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자세만이 신앙에 있어 오른 것으로 알고 자신의 행동과 같지 않은 사람들을 세속적인 사람으로 치부해 버리는 경우가 경건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나타날 수 있는 잘못이다. 그럼에도 과격하다고 하는 바울조차 이런 온유한 자세를 당부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 이유를 본문에서는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3b)는 고백으로 부탁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의 사실적인 자세를 고백하는 것을 보면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9:19~22) 라고 증거하고 있다.

다음 시간에 다시 이 같은 신앙의 관계 속에서 서로의 관계가 대결이나 경쟁의 관계보다는 사랑이 지배하는 관계가 되어야 함을 확인하게 되지만, 같은 자세로 주님을 섬기는 우리 모두는 각자의 바탕과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각각 다른 가문에서 결혼한 신혼부부처럼 익숙치 못하지만 결국 사랑이라는 대전제로 그런 것들이 받아들여지고 소화되어질 때까지 서로를 “받아 주라!”는 당부를 주고 있다.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로 같은 믿음의 동료들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고 다만 서로가 성장하고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일로 극진히 사랑하는 하늘의 사람으로 살 수 있어서 하나님께나 사람들에게 믿음의 좋은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



Ⅰ.먹고 먹지 않은 것으로 비판치 말라.(1~4)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사람들은 늘 판단에 능사들이다. 어떤 사람을 고사하고 판단하는 일에는 대가들이다. 에덴에서부터 범죄의 세상에 판단할 자만 있고 판단 받으려는 사람은 없다. 또 신앙에 있어서 문제점은 내가 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하지 못한 사람들을 쉽게 매도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판단하는 데는 믿음의 강함과 약함에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신앙적 경건을 위하여 절제하고 육체를 영적으로 복종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못하는 사람들을 짐승 보듯 하고, 반대의 입장의 사람들은 또 “뭐 꼭 저렇게 하는 것만이 신앙인가?” 라고 비판하며 자신을 변명하기 쉽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1) 신앙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들이 아니라 죄악의 세상에 더 익숙한 사람들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처음부터 믿음이 강한 자는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장성할 때까지는 유치함을 받아 줄 수 있어야만 한다. 어린 아이들이 아무리 유치한 말과 행동을 할지라도 그것을 비판하는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처음부터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큰 믿음을 가지는 사람은 없다.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에 금한 것들을 아직도 그대로 지켜야 되는 줄로 알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결예법에 합당한 것들만을 먹으려고 한다.(나 자신의 경험) 그러나 그것이 비판되어서는 안된다는 경계이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2) 치아가 건강하고 아구에 힘이 있는 사람은 어떤 음식도 가리지 않고 먹고 소화할 수 있지만 아직 장성하지 못한 어린아이는 소화되지않는 것들을 먹거나 소화할 수 없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5:13~14)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3f) 업신여기고 판단하는 모두는 가족관계에 있어서는 안될 관계의 자세이다. 문제는 강한 자라는 사람이 약한 자를 업신여기고 또 약하면서도 강한 자를 비난하는 것은 일반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저들의 상태를 다 아시고도 받으셨음에도 우리는 다 알지도 못하면서 받지 못하는 불경을 저지르는 것이다.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15:7)고 당부하고 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4) 남의 집의 일꾼의 성실과 불성실을 우리가 감히 불평할 수 없는 것은 그 사람은 내가 고용한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주인이 고용했기 때문이고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의 세움과 넘어짐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받아드리고 인정한다면 그 사람에게 일을 시키는 하나님의 권한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모습에서 문제가 많았던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겸손을 강조하고 있다.

강한 자의 업신여김도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고 약하면서도 강한 자를 비판하는 것도 그를 받으신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비판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Ⅱ.날을 지키는 자와 그렇지 않는 자 모두 확정하라.(5~6)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바울 사도는 물론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4:10~11)고 복음 속에 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유대인의 관습에 붙들려 있는 그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면서 까지 복음을 전한 것이 헛되게 여겨진다고 한탄을 한다. 물론 이들의 신앙이 이미 오래 되었기 때문에 이런 안타까운 탄식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날을 우상화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예배 드리기 때문에 이 주님의 날이 중요하고 감사한 날이 되어야 한다.

골로새 교회를 향하여는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2:16~17)고 하여 이 모든 것들은 과거 율법 속에서 장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완성하실 그곳의 일들의 그림자일 분이고, 또 우리가 주님의 날 예배를 드리지만 이것 역시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것의 그림자에 불과할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를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라면 완전히 확신하고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특히 “확정할지니라”[헬, 플레로포레오(plerophoreo), 완전히 확신하다, 완수하다, 확실히 믿다, 완전히 알다, 증거 하다] 라는 말로 로마서4:21에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로 번역되고 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6)

여기서 중심을 이루는 낱말은 ‘위하여’ 라는 말과 ‘감사하다’ 라는 단어이다. 무엇을 위하여 중히 여기고 또한 누구를 향해서 감사해야 하는 가가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분명해야 한다.

사람을 위하여 이거나, 사람에게만 감사한다면 그것은 벌써 하늘과는 관련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주님의 날을 주님을 위하여 사용하고 주님의 날 예배드림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삶은 분명 영혼의 사람들에게는 귀중한 삶의 기준과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Ⅲ.살아도 죽어도 주님을 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7~9)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의 희생에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아 위로부터 거듭나고 하늘의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우리 자신의 삶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산 소망이 있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지불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을 수 있고 살아도 살아야 한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7)

그런 이유에서 바울은 고백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삶이 되게 하시려고 보혈을 흘리셨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8) 한 것처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 19~20) 하였다.

이런 당부는 신약성경의 도처에 나타나고 있는데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1:2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5:10)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깨달았던 일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영광스럽게 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지상에서 영광이 하나님의 복이라고만 가르쳐지고 있는 이 시대에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음에 이르는 것을 복으로 영광으로 확신할 수 있으며 오늘 나는 과연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을 수 있을까!

하나님은 산자와 죽은 자의 하나님이시다. 믿음으로 살다가 안식하고 있는 그의 충성된 사람들과 오늘을 최선을 다하여 주님을 위하여 살려고 애쓰고 힘쓰는 믿음이 살아 있는 산자와 죽은 자의 하나님이 되시고자 십자가에 기꺼이 죽으셨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마22:32)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내)가 주의 것이로라”는 고백에 부끄러움이 없는 …



Ⅳ.최종적인 판단의 권한은 심판 주이신 하나님께 있다.(10~12)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우리가 불완전한 안목을 가지고 어떤 것을 먹고 먹지 않거나 날을 지키거나 지키지 않는 것을 정죄할 수 없는, 오로지 주님을 위하여 살고 감사로 살고 죽어야 할 이유를 마지막으로 나누고자 한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10f) 우리가 만물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제쳐두고 형제를 판단하는 즉, 재판하는 것은 분명히 월권이며 업신여기는 것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무시하는 행위일 뿐이다. 우리는 다만 사랑할 권한만을 받았을 뿐이지 심판하고 판결할 권한은 받지 못했고 이 10절의 하반 절에서부터 더욱 그래서는 안될 이유를 기록하고 있다.

“(헬, 가ㄹ(gar), 왜냐하면) …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이러한 고백 역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이다. 주님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7) 하셨고 이 로마서에서도 이미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롬2:6)

디모데에게 “…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딤후4:14b) 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당부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딤전6:14)고 증거 했다.

주님 앞에서 남들이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춰서 참소하는 일은 적어도 마귀가 심판의 때까지만 가능할 것이고, 우리는 타인의 잘못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11b~12)

이것은 이사야를 통한 예언이요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 하였노라”(사45:23) 예수님의 희생으로 완전히 이루어진 언약이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11)

그러므로 우리가 영원한 영광과 광명의 아침에 스스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접 고하는 가운데 “주여 내게 다섯(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마25:20, 22) 라는 감격을 고백하는 대신 자신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자백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연약하거나 강한 형제를 판단하고 업신여기는 어리석음은 없어야만 할 것이다.

살아도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 하고 죽어야 마땅한 우리들은 고기를 먹지 못하고 채소만을 먹는 연약한 형제를 받아 주고 업신여기거나 판단하지 말 것은 그 사람을 내가 세운 것이 아니라 온 인류의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세우시기 때문이다.

주님을 위해서 날을 중하게 여기든 금식을 하든 먹든 모두 진정으로 주님을 위해 먹고 일하고 살고 죽는 모든 사람들의 그러한 더불어 영광을 돌리는 일을 위하여 주님께서 죽음의 희생을 통하여 그들을 죄에서 사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하기 때문에 그 때를 현실에 당겨서 사는 모습이 바로 형제를 심판하거나 업신여기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모든 무릎이 주님 앞에 자신의 일을 직고할 때 감사와 영광과 기쁨의 고백이 되기 위하여 거기에 합당한 삶을 이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이고, 그렇게 영원한 미래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 보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오늘도 미래의 거룩한 보좌 앞에 영광스럽게 서서 구원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로 고백하고 찬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 위하여 영혼의 사람 바울의 경계를 현실에서 귀담아 듣고 그대로 적용하여 영원한 영광과 기쁨을 예약하는 저와 여러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