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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롬 15:14~21 2007-12-09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  
우리는 바울을 통한 복음의 변증 즉,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바 십자가의 복음을 통한 구원의 은혜를 믿음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성령과 함께 증거 하는 아름다운 구원의 논리를 계속 적으로 나누어 왔다.

비극적인 인간의 죄로 인한 저주의 상태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함께 사는 논리를 세례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이렇게 세상에서 불러낸 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라는 새로운 공통체를 통하여 어떻게 교제하며 살고 복음을 전하는가 하는 실제적인 면까지도 지난 시간까지 증거 하였다.

이제 남은 부분인 오늘 본문에서부터 16:27절 마지막 까지는 이러한 신앙적 논리의 결론적인 부분과 더불어 바울의 조금은 개인적인 입장과 문안의 부분들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지금까지 보다는 사뭇 진지하고 애정어린 말투들과 감사의 내용들로 이루어 지고 있다.

오늘의 다루는 내용이 이 로마서를 기록하기 이전의 과거에 관한 사실이라면 다음시간에 다루는 이 15장 말미의 내용들은 자신의 앞으로 행할 미래에 관한 계획이다.

이 부분은 동일하게 같은 복음 속에 있는 우리의 관계와 자신들의 태도를 돌아보게 하는 데 있어서 귀중한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이 말씀들을 통해서도 바울과 같은 확신과 감사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교회와 세상 속에서 바울과 같지는 못할지라도 나름대로의 귀중한 역할들을 잘 감당하여 복음에 기여하는 …



Ⅰ.내게 주신 은혜를 가진 자가 남의 가진 은혜도 인정한다.(14~15)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

바울은 처음부터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1:11~12)고 그들의 믿음을 강하게 세우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같은 믿음으로 서로 위로를 얻고자 한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러면서도 편지를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저들의 가진 믿음에 신뢰와 함께 그들을 향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14) 바울은 상대를 만난 적이 있건 없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체들을 향하여 누구에게든지 서슴지 않고 “내 형제들아!” 라고 부르고 있다. 어떤 칭호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같은 사랑을 입고 사는 자녀라는 사실에 강한 자부심과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

누가 복음을 전해서 교회가 섰는지 지도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당시에 세계의 중심인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고백은 이 편지를 받는 자들에게 대단한 감동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신앙의 균형을 지키는 귀중한 양 바퀴의 축을 말한다. 인간 스스로는 절대로 선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성이 선하고 착한 사람들은 악에게 이용당하기 쉽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진리에 관한 지식으로 충만해야 한다.

여기 “가득하고”나 “차서” 라는 말은 각각 다른 단어이긴 해도 뜻은 같은 의미이다. 선함이 없는 지식은 교만하고 지식이 없는 선함은 보존될 수 없기 때문에 선함과 지식은 언제나 충만해 있어야 하는 것이 신앙의 균형을 잃지 않게 한다.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앞에는 “너희가 스스로” 라는 수식어가 있다. 남의 선함이나 지식, 듣는 선함이나 지식은 한계가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을 듣고 선함과 지식으로 충만해 있어야 균형 잡힌 믿음 생활을 하고 교만이나 악에게 이용당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서는 안된다. “능히 서로 권하는 자”로 역할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이러한 경지에 있다고 바울이 인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선함과 지식이 충만한 균형 잡힌 신앙의 사람이 권면 한다면 상대에 대한 신뢰로 인하여 잘 받아들이고 수긍할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지식은 없고 선함만 가지고 있어서 권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선함은 없는 지식만으로 권하기 때문에 반항심을 가지게 한다.

‘서면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들이여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다른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 …

바울 사도는 다시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15) 라고 고백한다. 우리는 신앙으로 완숙하다고 할지라도 계속 그 믿음을 불러 일으킬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남에게서 전해 들은 것이 아닌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은혜를 가지고 신앙의 여러 부분들을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증거하고 권면 한다고 증거하고 있다.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1:12)고 고백하고 있는 내용도 같은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15b) 罪에 대하여 義에 대하여 律法에 대하여 聖靈에 대하여 信仰의 이것 저것들을 들어서 권면 하는 내용 등등의 신앙적 덕목들과 교리들을 다른 것보다 더욱 커다란 확신을 가지고 여기저기를 기록하였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라는 내용이다.

만약에 다른 책들은 없고 로마서만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우리는 균형 잡힌 신앙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요한 복음도 사도행전도 구약도 서로 함께 하나님의 진리를 보다 완벽하게 이해하고 그리스도께서 이 역사에 오심의 목적으로 인간 구원의 사실을 보다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다. 할렐루야!

여러분 모두가 바울 사도의 권면처럼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서로를 격려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



Ⅱ.자신의 직분에 대한 확신을 고백한다.(16~18)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로마의 성도들을 향하여 격려한 바울은 이제 자신의 역할과 주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이루신 구원의 역사들을 증거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이 이렇게 일할 수 있었던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고 있다. “이 은혜는” 우리가 어떤 작은 일이라도 이루었다면 그것은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신 것이라는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은 처음부터 부르신 목적을 분명히 하신다.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눈이 먼 사울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라고 하시는 주님께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행9:13b~14) 라고 머뭇거리며 항변을 하는 아나니아에게 주님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의 때묻지 않은 어부 출신의 제자들을 이스라엘을 위해 택하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찌 보면 당시의 헬라 문화가 꽃을 피운 지식이 추앙을 받던 그리스 시대에 이미 사울이라는 이방을 위한 도구를 주님은 준비해 놓으셨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이러한 주님의 의도대로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은 그 시대의 이방의 중심이었던 로마를 향하여 이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또 이런 이유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동족인 유대인들에게는 배척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어떤 일꾼이냐 하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시려고 택하셨고 구약의 제사장들은 짐승을 제물로 제사를 드렸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한번의 희생으로 온전한 제사를 완성하신 하나님은 이제 하나님을 떠나 동일하게 짐승이 되어 있는 이방의 모든 사람들을 제물로 드리도록 바울을 부르셨다.

그래서 연이어지는 고백이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 이라고 하였고 그 냄새 나는 짐승인 이방인들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서는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고백 드리는 것이다.

이러한 고백은 달리 말하면 바울은 성령의 역사가 없으셨다면 한 사람의 이방인도 제물로 드릴 수 없었을 것이라고 고백 함으로서 역시 자신의 사역이 주님께서 직접하신 역사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짐승의 우릿간 구유에 나신 것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 버리고 짐승이 된 모든 인류를 생명으로 먹여 살리기 위하여 오신 것이고, 그 주님을 먹어야 하는 것은 선택 받은 이스라엘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차별이 없으시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증거 된 바 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10:12)

바울은 자신의 귀중한 증거를 역시 안팎으로 두 가지로 증거 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17~18)

첫째로는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자신이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자체가 자랑이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믿음을 부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요 자랑 거리여야 한다. 바울은 옥중서신에서 말끝마다 “예수 안에” 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그리스도 안에” 라는 자긍심을 자신과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아울러 감격하고 있는 것을 읽게 된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감격을 항상 잊지 않고 감격하고 있습니까?

두 번째는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들이다. 물론 다른 사도들로 인하여 일으키신 표적과 기사가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바울 사도 자신의 “나로 말미암아”이다. 또 단순히 ‘표적과 기사’ 뿐만 아니라 ‘말과 일’들 까지도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들이라는 것이고 이것을 주신 이유는 바로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라는 것이다.

참으로 바울에게 희한한 능력이 없었다면 많은 이방 세계에서 그렇게 복음을 담대하게 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오늘 우리가 읽고 듣고 감격하는 이 성경도 없었을 것인데 이것은 오로지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성령께서 하신 것이라는 목적과 능력의 근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렇게 바울은 안팎으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감격으로 고백하고 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도 주신 것이 있다면 그것이 말이든 일이든 能力이든 자신을 자랑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사람을 믿어 순종케 하려는 하나님의 아버지의 의도로 확신하고 오직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감격을 가지고 복음을 위한 제사장의 직무를 잘 감당하는 …



Ⅲ.명예를 귀중히 여기며 일했다.(19~21)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이야말로 오늘의 시대에 대단히 귀감이 되고 권고가 되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셔서 같은 성령을 받고도 유대인들에게만 구원이 허락되었다고 주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다른 사도들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범위에까지[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복음을 빠뜨린 데가 없이 두루 증거하고 다녔다.

여기에 나타나는 ‘일루리곤’ 이라는 지면은 사도행전에나 다른 바울의 서신서 들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곳이지만 바울의 이곳을 말하는 의도는 당시 복음의 발원지였던 예루살렘에서 당시의 가장 먼 곳으로 여겨지는 ‘일루리곤’ 이라는 도시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두루두루 전했다는 이야기이고, 그런 놀라운 자신의 열정에도 한가지 지켜졌던 규칙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미 복음이 증거 된 곳에서는 절대로 복음을 전하지 않으려고 힘쓴 이유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교훈 하신 대로 아직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곳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듣게 하려고 애썼다는 고백으로 드린다.

특히 20절의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는 내용 중에서 “힘썼노니” 라는 말을 상고해 볼 필요가 있다. 사람이 많은 일을 하다 보면 사실 좋은 평판을 듣기 힘들다. 그럼에도 바울은 세상의 두루두루에 복음을 편만하게 전파하였어도 그의 자세는 한결 같았다.

[힘썼노니, 헬, 필로티메오마이(philotimeomai), 명예를 좋아하다, 진정한 가치를 사랑하다, 필로스(philos) + 티메(time), 명예, 값, 가치, 영예, 평가, 위엄, 존귀, 경의]는 의미들을 갖는 말이다. 하나님의 복음을 가진 자들은 이러한 바울의 자세를 꼭 본 받을 필요가 있다. 첫째로는 하나님의 위엄과 존귀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해야만 한다.

오늘 우리 시대는 다른 사람들의 가치 평가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과정은 무시하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식의 자세에 익숙해 지는 모습들이 더러 있다. 이런 현상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 당하게 하는 경우들이 더러 일어난다.

물론 바울의 시대에는 교회에 다른 종파가 오늘처럼 난립하지 않았고 그런 입장에서 복음이 증거 되었다면 다른 복음 즉, 변질된 복음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이라면 당연히 그냥 지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이단이 판을 칠뿐만 아니라 각 종파들이 난립하여 꼭 같은 하나님과 같은 성경과 한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곳의 건물에는 각각의 다른 종파의 간판이 몇 개씩 걸려있고 그런 현상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불신자들에게 장애요소로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다.

참으로 바울의 가치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더럽히는 일들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이미 2장에서 율법을 받았으면서도 그 율법을 범하는 동족을 향하여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23~24) 라는 두려운 책망을 한바 있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면서도 영예를 사랑하는 자세로 복음을 전하도록 조심했던 것이다.

둘째로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아니,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자신의 영예로운 평가도 사랑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의 행위를 세상 사람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보기 때문이다. 나 하나의 평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나를 보면서 그리스도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벧전3:10~11)고 당부하고 있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가치를 찾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의 평가와 가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영광과 명예를 위하여 절제할 필요가 있다. 자신을 온전히 죽이고 위엄을 잃지 않는 주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 솔로몬이 권고한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잠22:1)

우리 신앙인들로 인하여 주님의 영광이 가려지는 일들이 이 현실 속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고 이런 일들을 바울의 고백과 함께 회개할 필요가 있다.

영예를 잃게 되는 원인들은 현실을 영원보다 더 귀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유들 때문임을 더러 본다. 땅에 것에 연연하다 보면 결국 영원의 존귀를 잃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깊이 고민해야만 한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향하여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2~4)고 경계하고 있다.

자신이 은혜를 받은 자가 남의 은혜를 인정하고 격려하게 된다. ‘나만이 은혜 받은 자’라는 독선은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못한다. 우리가 가진 직분이나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성령과 더불어 이방인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일꾼들이나 백성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에 누를 끼치는 일에 조심해야 할 것이고 자신의 평가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자세로 살아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