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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롬 16:1~16 2007-12-23
문안하라, 문안하라, 문안하라 …!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과 부활과 승천을 믿고 순종하며 수용하는 자들의 엄청난 복을 당시 세계의 중심인 로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이후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역사 속에 오고 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증거 하는 귀중한 인간 구원의 공식을 증거 하였다.

이 구원의 원리는 결코 바뀌거나 새로운 것이 필요 없는 완벽한 것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1:16) 어떤 인종이든지 종교를 초월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입을 수 있는 기준은 이 외에는 더 이상 있을 수 없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2)

물론 당시에나 지금이나 여기에 대한 선택은 각자의 책임이지만 이 진리를 어리석은 것으로 대하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그 사람들이 어리석을 뿐이며 이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죄에서 완전히 자유하여 운명을 바꾸어 지옥에서 천국으로 돌아서는 놀라운 권능이 될 것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바울은 다시 조금 진행해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3~24)고 감격하고 있다.

이제는 이 엄청난 구원의 논리를 마감하면서 같은 이 생명에 참여하며 수고하는 자들에게 하늘의 일꾼의 겸손과 사랑을 가지고 격려하고 감사하며 응원하면서 그리스도의 평강을 전하고 있다. 이 부분도 사람들의 성격에 따라 분류를 해 볼 수 있겠지만 박진감 있게 달려온 말씀을 역시 지루하지 않게 마감을 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마무리 했으면 한다.

단순히 문안 인사로만 기록되는 말씀 같지만 이 문안 속에서도 서로를 향한 간절함과 기대와 기쁨이 충만히 교차하는 것을 읽게 된다. 이 편지의 말미의 감격과 감사가 오늘 이 말씀을 일고 나누는 우리들 속에서도 같은 간절함과 기쁨을 바울과 로마 교우들과 같은 심정으로 누릴 수 있기를 …

오늘은 순서적인 귀절들의 이해보다는 전체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었으면 한다.



Ⅰ.성도들의 합당한 예절과 신앙의 점검을 본다.

그리스도인들 상호간의 예우를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이 편지의 마무리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친교의 일부를 보게 된다. [문안하라, ajspavzomai, aspazomai, (17회salute-13, greet-4) 팔을 접다→ 경례하다, 환영하다, 포옹하다, 인사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만날 때나 헤어질 때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진지 잡수셨습니까?)처럼 언제나 인사를 나누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습은 역시 이 로마서를 쓰고 있는 당시인 일세기의 모든 사람들 즉,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까지도 일반적인 것으로 역사가들은 전하고 있다.

[히, 샬롬(shalom); 헬, 에이레네(eirene)하나님의 주시는 평화가 함께 하였습니까?; 하나님의 평화가 당신을 지키시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관계는 어떤 대상이나 형편에서든지 예의를 가지고 대하고 문안한다. 그러나 그것은 격식에 매인 억지가 아니다.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2)

바울의 편지 말미마다 적는 축복의 글귀는 당시에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들도 일반적인 형태로 썼을 정도라고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한 차원 높은 인사를 나누게 되는데 그것은 단순히 만들어진 습관이 아니라 한 아버지를 모신 가족으로서의 친밀감과 사랑을 나누는 방편이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3:15)고 말 함으로써 교회가 우주적인 한 가족 공동체임을 공언(公言)하였다.

그러므로 이 문안의 내용에서 가족 서로간의 친밀감과 감격이 깊이 베어 있다. 그리스도인의 관계는 서로를 그리워하고 또 의지하는 관계요, 그러면서도 기대하는 관계이다. 마치 긴 시간동안 만나지 못해서 보고싶어 하는 그런 관계이다.

비록 일상을 깊이 알지 못하고 형편을 세세히 알지 못하고 심지어는 얼굴을 본적이 없어도 상대의 영적인 부분의 독특성과 받은 은혜를 나눌 기대감으로 서로를 보고싶어 하고 만남을 기대하는 그런 관계 속에서 주고 받는 문안을 오늘 본문에서도 느끼게 된다.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었다면 어떻게 그 형편 속에서 죄와 싸워 이겼는가 가 듣고 싶고 또 좋은 형편에 있었다면 어떤 모습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실천했는가를 역시 궁금해 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조금은 추상적일지 모르지만 떨어져 있는 기간 동안의 삶의 모든 사건 즉, 그리스도와의 삶이 추억으로 남고 그것이 서로에게 궁금해 지는 그런 모습이다.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민족인 히브리 사람들의 문안의 형태를 구약에서 많이 보겠지만 대표적으로 하 곳만 살펴보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다니엘이 모함을 받아 사자 굴에 던져져 있다가 날이 새어갈 무렵에 그를 찾아 다급하게 문안하는 다리오 왕을 본다.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단6:20) 여기에 다니엘은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22) 했는데 이 문안은 어쩌면 사자 굴 같은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고난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문안과 고백과 같은 것이다.[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부활 후에 갈릴리 바닷가에 오셔서 조반을 준비하고 사도들을 만나시는 주님께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요21:5) 물으시는 모습도 이런 입장에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물론 너무나 빤히 제자들의 형편을 아시지만, 밤새 그물질을 하고도 빈 그물과 함께 소득 없이 밝아오는 아침을 맞고 있는 제자들에게 그 밤의 평강을 묻고 있는 것이다.

주님을 떠나 인간적인 노력과 지침으로 아침을 맞는 그들에게 주님 없는 밤의 형편을 물으시는 것이다.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문안을 주실 것이다. 아니 이 역사의 아침이 밝을 때까지 주님을 떠나 있는 세상의 밤과 더불어 지낸다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의 문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간음 중에 정죄하기 위해 돌을 들고 와서 여자를 고발하는 바리새인들 틈에서 죽을 것을 각오하고 입술을 깨물고 섰던 여인에게 그 돌을 던지려는 사람들이 다 떠난 후에 주님은 역시 물으셨다. “…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요8:10) 여자는 이슬이 맺힌 눈으로 대답한다. “주여 없나이다!”(11f)

문안의 질문이 어떠하든지 각자의 형편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의 맛을 처음 맛보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신앙적 문안은 또 색다를 것이다. “에이레네!” “예 참으로 살맛 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각자의 신앙의 상태를 점검하는 또 다른 차원의 문안에 여러분은 어떤 답변을 드릴 수 있는가? 이 땅에 죄와 상관없이 다시 오시는 주님 앞에 감격의 문안을 준비하는 …



Ⅱ.문안을 받는 자들의 역할들…

바울은 자신과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하던 자들과 교회를 위해 가정을 헌신하고 물질로 복음을 위해 헌신한 다양한 사람들이 이미 로마에 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들에게 문안하고 있다.

먼저는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1)를 추천한다고 말하는데 겐그레아 교회는 고린도 동쪽 바로 옆의 도시로 사도행전 18:18b에 “바울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는 기록 외에는 다른 기록이 없지만 이 뵈뵈를 두고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2b)고 소개하는 것을 보면 언제나 위기에 쳐했던 바울에게 비록 여자였지만 바울뿐만 아니라 복음을 위해 애쓰는 여러 사람들을 감싸며 보호한 여장부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역시 비슷한 사람들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3)가 이미 로마에 다시 가 있는 것으로 문안한다. 본도(소아시아의 북부해안에 위치) 출신의 부부로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는 명령에 의해서 고린도로 와서 함께 장막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던 부부로 학문이 많았던 아볼로를 진리로 개종 시키는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부부이다.(행18:26)

이 부부를 두고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4)는 고백을 한다. 그러나 칭찬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5f) 로마에서도 이 부부의 희생은 가정을 교회로 제공한 것으로 바울은 말하고 있다.(일세기의 예배처소)

어떤 경우 오늘에 있어서는 많은 사람들이 신앙으로 인해 자신의 사생활이 침해 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지만, 자신의 가정을 내어줄 정도의 믿음의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런 것을 짐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맛볼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을 맛보는 것을 듣는다.(세화-진주)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5~7)

“나의 사랑하는” “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8~9b)

바울이 사랑하고 ‘칭찬 듣는’(에배네도) 아시아의 그리스도께 첫 열매가 로마에 가 있고 유대인 중에 흔한 이름의 ‘마리아’지만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다. 비록 신분은 다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바울은 이 표현으로 감사하고 있다.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12)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8)

‘마리아, 드루배나와 드루보사, 버시’ 등등 로마교회를 위하여 어떤 수고를 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들의 공적을 칭찬하고 있고, 자신의 친척이라고 하지만 이것이 혈육의 친척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가족이라는 색체가 진한, 로마의 감옥에 자신과 함께 갇혔던, 그래서 사도들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바울보다 먼저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는 부부 인듯한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역시 생사의 고락을 함께한 존경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권속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10~11) 세상에서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는 사람들, 그들이 로마 교회의 구성원들이었고 ‘아리스도불로의 권속, 나깃수의 권속’ 역시 단순한 가족들이 아니라 신앙의 가족들을 이렇게 부르고 있는 것이 분명하고 만약에 혈육의 가족일지라도 믿음의 가족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라면 더욱 귀한 모습이다.

독특한 로마교회의 바울의 문안을 받고 있는 인물 중에서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13)는 내용은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막15:21) 라고 한 바로 그 루포의 가족인 것으로 이해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셨을 때 가장 힘겨운 시간에 억지로 십자가를 져줬던 시몬은 집으로 돌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원이 되었고 로마에 가 교회의 귀중한 일원으로 있었다는 것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바울 사도는 자신과 함께 일하던 사람을 기꺼이 동역자라고 고백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 ”(9) 이 이름이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처럼 당시 흔했던 라틴식의 노예 이름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겠지만 바울은 어떤 출신이나 인종을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일하는 자들을 기꺼이 하늘나라의 영광스러운 일꾼으로 증거 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고, 자신과 같은 대 사도의 입장에서도 “우리의 동역자” 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저희와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 자매와 올름바와 저희와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14~15) 이 거명되는 이름들에는 흔한 노예들의 이름과 부인의 이름들이 함께 거론되면서 개인적인 친분에 관한 언급 없이 “…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는 부탁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왕국인 교회에서 무엇이 귀중한 목표가 되어야 할까? 세상과는 구별되고 하나님의 소유가 된 “성도” 라는 이름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명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예로운 이름과 함께 그 그리스도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죄악 된 세상에 가치보다 신령한 하나님의 가치인 성도로서의 하나님을 닮는 삶을 살고 또 지향해야 할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 모든 문안과 함께 마무리 하면서 “…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골4:11b)는 표현을 쓰고 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역사하는 자들이요, 바울의 위로가 되었던 사람들 … 오늘도 진리를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이 로마에 바울의 사랑과 격려의 문안을 받는 생명의 담보자들이요 위안이요 소망이 되는 사람들이 풍성한 교회와 …



Ⅲ.문안을 받는 사람들의 다양한 신분들.

바울 사도의 “문안하라, 문안하라, 문안하라 …!”는 사람들은 당시 로마의 인종의 다양성 만큼이나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심지어는 과거에 바울과 실제적으로 복음을 전하며 동역했던 인물에서부터 감옥에 함께 수감되어 옥고를 치르며 서로를 위로하던 사람, 핍박과 협박의 와중에서 바울의 생명을 대신 담보하고 자신이 죽기로 각오하고 바울을 피신 시킨 육신의 생명의 은인들, 또는 사생활이 침해를 당하면서도 자신의 가정을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인 교회로 기꺼이 내놓은 사람들과 …, 그런가 하면 노예출신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름들이 본문에는 다른 사람들의 수보다 훨씬 많다.

하늘의 가치로 거듭난 신령한 공동체인 교회는 이렇게 부와 권력과 지식의 차이들이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거룩한 공동체를 이룬다. 이것은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모습이다. 오로지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모신 교회만이 가능하다. 또 역사 속에 교회는 그래야만 한다. 어떤 세상의 기준을 이유로 차별 되어서는 안되는 곳이 교회이다.

야고보는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약1:9~10)고 했다. 우리의 세상에서 소유한 것들은 다 사라질 것들이다.

‘형제 자매’란 같은 테에서 난 자녀를 의미한다. 그리고 ‘형제 자매’는 빈부귀천(貧富貴賤)의 차이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한 거룩한 신부인 교회를 통해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결코 세상과 같이 차별되어서는 안된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3:26~29)

교회에서 존경 받아야 될 이유는 세상적인 가치가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수고하고 헌신하고 충성하는 것 때문이어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16) 이것은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이나 동방, 그리고 유럽의 관습이었다. 서로 볼을 대는 육신적인 문안의 표현이었지만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을 기원하는 것 역시 거룩한 입맞춤이 될 것이고 그 대상은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이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뿐이며 교회에서 유일한 권위를 가지신 분이시다. “…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엡1:22) “…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 (엡5:23)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 (골1:18)

때문에 교회는 그의 소유이기 때문에 그의 이름으로 불려져야 한다. 성경에는 지역이름 외에 다른 명칭으로 교회가 이름 붙여진 흔적이 전혀 없다. 아무리 신앙의 중요한 과제요 지향하는 목표가 된다고 해도 교회의 이름으로는 합당하지 않다.

그러므로 교회의 이름은 비록 합리적이지 못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것으로만 불려져야 한다. “…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16) 이 문안에 부끄러움이 없는 성도로서의 신앙과 교회가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