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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11:1~18 2008-09-28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로 베드로를 통하여 이방구원의 길이 열렸지만 이전에 없었던 이 역사에 길지는 않았지만 직접적인 경험을 하지 못했던 복음의 발원지인 예루살렘 사도들의 오해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고, 베드로는 이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증언하고 오히려 모든 사도들과 더불어 온 교회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결과 한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상당히 긴 글이지만 앞에서 경험한 일의 서술적인 반복인 만큼 나눌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함께 다루고자 한다.

베드로 사도는 요한과 함께 유대인들이 예수님 당시에도 개처럼 취급하던 사마리아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갔었기 때문에 이 고넬료의 가정이 전혀 생소한 것은 아니었고 또 룻다와 욥바를 거쳐 가이사랴에 가게 된 것도 앞에서 생각했던 것처럼 결코 베드로의 의도이거나 처음부터 결심한 것도 기대한 것도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였다.

특히 오늘 본문의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믿음의 형제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환상을 통해서 먹으라 명하셨지만 먹을 수 없다고 부정하는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같은 환상을 통해서 깨닫게 하신 일들이 자신의 어리석음이었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한 베드로에게는 자신의 과거를 보는 것 같아서 더욱 안타까웠을 것이고 그런 일면에서 이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권위나 강압보다는 자세히 하나님께서 주신 경험을 보고함으로써 저들의 오해를 풀어주고 있다.



Ⅰ. 믿음의 사람들 안에서의 오해.(1~3)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복음의 발원지요 출발지였던 예루살렘을 포함한 유대는 적어도 주님께서 몸소 다니시며 기적과 더불어 회개의 복음을 증거하셨던 곳으로 이것 자체로도 대단한 자긍심과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찌 보면 이런 부분에서는 신앙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 심한 부분도 없지 않는 것 같다.

믿음생활의 또 다른 문제는 자신이 받은 은혜는 강조하면서 남이 받음 은혜를 하찮게 여기거나 반대로 남에게 일어나는 기적을 보면서 자신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볍게 여기는 것으로 이러한 병패들은 어느 시대나 반드시 고쳐져야 할 불미스러운 모습이다.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당연히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말씀하신 사실을 확인하고 감격해야 하는 것(1:8)이 어쩌면 성령의 사람들에게 더 어울리는 모습일 것임에도 들은 것에서부터 부정적인 의아심을 갖는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아마도 이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 베드로를 통해서 라는 사실 때문에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올 것을 기대하고(벼르고) 있었던 것 같다.

나중에 비록 자세한 사실을 전해 듣고 오해를 풀기는 했지만 이러한 비난을 한 사람들이 [할례자들]이었다는 사실이고 분명한 복음을 듣고 체험하고도 할례의 우월성을 내세우는 것을 보면 어떤 표면적인 증거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우쭐거릴 이유가 더러 되는 것 같다.

이들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그 복음을 전하는 과정과 결과 속에 있었던 일들을 문제 삼고 나선다.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3)

오늘도 어떤 경우 우리들은 이런 모습을 가지는 경우들이 더러 있게 되는데 그것은 사건의 전체적인 진행이나 과정은 무시해 버리거나 뺀 체로 어느 부분만을 듣게 되고 보게 되는 경우이다.

어찌 보면 서로 깊은 신뢰를 가질 수 있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오해를 부풀리고 벼르는 안타까운 모습들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더러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특히 성결의 문제나 계명에 관한 것들에서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가 있을지라도 그것이 끝까지 갈 수 없는 것도 믿음의 사람들의 특징이다. 같은 진리와 한 성령 안에 있다면 아무리 큰 오해조차도 자신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깨닫고 화해가 될 수 있는 것도 세상에서 보다는 바른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현상들이다.



Ⅱ. 은혜의 경험 증거.(4~10)

이 부분은 앞장의 10~16절의 내용과 거의 다르지 않은 자신의 경험의 간증이다. 미묘한 차이를 본다면 12절에서 없던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했던 것이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라는 것뿐이다. 우리는 이 사도행전을 기록하고 있는 세밀한 역사의 저술가인 누가의 영향이기도 하겠지만 경험한 사실이나 남들에게 전달하는 모습에서도 전혀 다르지 않음을 본다.

1. 베드로의 변화를 확실히 본다. 우리는 이 베드로의 변화를 여기서도 확실히 실감하게 되는데 늘 덤벙대고 좌충우돌(左衝右突) 하는 베드로가 여기서는 모습이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예전 같으면 “베드로가 저희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4) 라는 것은 적어도 베드로의 사전에는 없었다. 성령의 강한 능력에 제압당한 베드로의 다소곳한 모습을 보는 것이다.

2. 영적인 경험에 대한 조심성을 배운다. 적어도 이러한 모습이 성숙한 진리의 전달자로서의 모습일 것이다. 오늘날 진실로 경건치 못한 사람들의 그것과는 다르다. 바울이 말하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5) 고 경계한 것처럼 결코 꾸밈이나 과장이 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그대로를 증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앙의 사람들은 누구나 베드로가 직접 증거하는 것처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벧전4:11) 라는 자세가 중요하다. 그렇지 못하면 마치 사람이 화장이나 옷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꾸미는 것과 같이 구원의 진리에도 그럴 수 있다는 경계를 가져야 한다.

3. 자신의 감정보다는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것을 증거한다.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경험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가르치셨는가’에 집중하지 않고 반대로 그 말씀을 받는 자신의 입장을 전하고 변명하려고 하는 일들이 더 많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우리)에게 주시 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인가를 가려 듣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상황에서는 베드로 보다 오히려 유대의 사도들과 형제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잘못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 들이게 되었는가 보다는 할례자 들의 위신에 타격을 입었다는 자신들의 입장 때문에 베드로를 힐난하고 있는 것을 본다.

우리가 사람으로서 어쩔 수는 없지만 우리의 감정과 입장보다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들으려 한다면 자신의 감정보다는 진리에 더 충실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베드로의 영적 체험의 증거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중요한 도전을 주는 동시에 오늘 우리가 말씀을 듣는 자세에 까지 경계를 주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내가 이런데 그렇게 말씀을 전하면 되는가!’ 라는 식의 자신의 입장을 내세우기 쉽다. 그러나 어떤 입장에 있던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교훈이 첫째요 중요하다는 사실을 지나쳐서는 안된다.

말씀을 좌우에 날 선 칼이라고 했을 때 그것을 경건하고 성숙한 사람, 인격적으로 갖춰진 사람이 다뤄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성숙치 모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말씀이 들려진다면 그것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할 수도 있고 자신을 베는 위험한 짓을 할 수도 있다.[이단]

이런 입장에서 베드로의 주님께서 주신 이상과 상황을 가감(加減)없이 증거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자세요, 배워야 할 자세이다.

개인적 신앙의 경험이 여러 사람들에게 객관적으로 들려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입장과 처지보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바탕으로 증거되어야 함으로 십자가 중심의 복음 증거는 더욱 중요한 것이다.



Ⅲ. 말씀의 확증.(11~15)

베드로의 경험적 증거의 둘째 마당은 자신의 경험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확증되는 내용이다. 여기에 서술되는 내용도 10장에서의 차이를 찾는다면 [12, 이 여섯 형제도…] “…욥바 두어 형제도…”(10:23) 한 것과 오늘 14절의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는 말씀으로 이것은 베드로가 보탠 내용이 아니라 바로 베드로를 청했던 고넬료의 입에서 고백된 내용이다.

베드로의 이상으로 인한 고민 중에 하나님께서 사실적인 증거로 그 이상을 확증하는 경험을 고백하는 내용이 “마침 세 사람이 내 우거한 집 앞에 섰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11~12f) 라는 사람과 성령의 지시가 함께 확증되었음을 고백한다.

사실 아무리 놀라운 이상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면 신앙적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그런데 베드로는 기도와 함께 지붕 위에서 보았던 비전이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12b) 결국 베드로의 영적 체험을 확증하는 데는 욥바의 최소한 여섯 형제가 함께 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는 자신을 청하러 보냈던 고넬료의 초청을 역시 고백한다.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13~14) 베드로는 자신의 환상과 고넬료의 이상이 하나로 만나게 된 주님의 역사를 증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서로의 비전이 주님께서 주셨다는 사실이 확증되는 현실을 소개한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15)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넬료의 가족이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내려오신 성령은 유대에 머물면서 지금 이 증거를 듣고 있던, 전에 오순절 날 베드로와 함께 사도들이 받은 성령과 꼭 같은 내용과 모습이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17)

이 역사적인 사건으로 인하여 이방인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과 더불어 구원에 받아 들여졌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애써 부정하려 했던 베드로는 물론 모든 사도들이 인정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런 이유에서 이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의 임재를 일반화 할 수는 없다. ①가장 일반적인 성령의 임재의 약속인 2:38의 말씀과 반대되는 내용이다. ②보는 옆의 사람들이 시각적으로 분명히 보고 느낄 수가 있었다. ③하나님의 이방인의 구원을 사도들로 하여금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분명하고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 ④성령께서 말씀을 들을 때 내려 오셨다. 오순절이 이미 이루매-약속의 때가 이르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멀리서부터 보면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는 모습이다. 창세기12:2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17:4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라 하신 약속이 이방의 구원에 들어오는 이 역사적인 사실을 통해서 가장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Ⅳ. 더불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16~18)

베드로는 자신을 통해서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그 말씀을 듣는 고넬료의 가정에 내리시는 성령의 역사를 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생각 났노라고 고백한다.

세례요한은 직접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3:11)라고 말했고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와 같이 모이셔서 이 사실을 회상시키면서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1:5)

그런데 베드로는 오순절 날 자신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때 이 사실이 이루어지는 것을 확신했었는데 다시 이방인들도 동일하게 이 약속이 효력이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고백을 유대인 형제들 앞에서 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모든 사람에게 차별을 두지 아니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를 로마서에서 선언한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1~22)

다시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 하시도다”(롬10:11~12)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일 수도 없고 사랑의 하나님이실 수도 없으실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베드로는 담대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라고 선언하고 나서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막아도 안되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사람에게 임하는 것을 막아 서서도 안될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가로막는 장애요소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이유에서 주님께서는 두려운 선언을 하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마18:6~7)

결국 이러한 베드로 사도의 진실이 통하여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18)는 결과를 이룬다.

바울 사도는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10:5) 라고 선언했다.

모든 인간의 판단과 생각은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 앞에 사랑의 지해 앞에 잠잠해져야 한다. 구구한 이론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피 흘리신 십자가의 복음이 사람을 구원하고, 인간의 입장과 감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그래야 나만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라 더불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이 자신의 특권에 손상을 입었다고 생각할 때 오해의 골은 깊어지지만 주님처럼 자신의 특권을 포기하고 내려 앉을 때 오해는 해소될 것이다. 성령의 사람들도 일순간의 오해는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나누고 받아드리는 곳에 오해는 불 앞에 양초처럼 녹아질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자는 확실히 삶이 변화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은혜는 은혜돼지 못하고, 영적인 경험은 항상 조심성을 요한다. 진리를 부풀릴 필요가 없고 진리의 경험은 자신의 입장이나 감정보다는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교훈과 요구를 들을 수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에게 혼란을 일으키기 위해서 영적인 경험을 주지 않으신다.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교훈은 반드시 우리의 삶 속에 실재적인 변화와 그 속에 다른 사람을 참여시키므로 확증 되어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시킬 뿐만 아니라 차별 없이 주시는 구원과 은혜를 가로막기 보다는 나누고 베풀 때 더불어 영광을 돌리게 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통로를 막을 수 있는 경계는 있다. 이왕에 하나님의 십자가의 도구가 될지언정 하나님의 사랑을 막아서는 어리석음을 경계 해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