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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12:1~12 2008-10-12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새로운 복음의 전진기지인 안디옥에 복음을 위한 헌신자들의 준비된 모습을 소개한 누가는 다시 예루살렘의 박해와 교회의 모습을 삽입하여 역시 복음의 발원지이자 이 일에 먼저 선택을 받은 사도들에 대한 관심을 끄지 않는다.

사도들을 옥에 가두고 천사들을 통하여 놓여나게 한 역사는 이미 5장에서도 있었지만 (행5:17~25대제사장과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17~19)

앞의 감금이 신앙적인 시기심에서 당시 성전을 점유하고 잇속을 챙기는 사두개인들의 분개로 인한 일이었다면 여기에서는 성격이 전혀 다른 정치적인 이유에서 주님의 일꾼들을 가두고 죽이는 모습을 보게 된다.

신앙의 사람들은 이렇게 세상에서는 종교적이든 정치적인 이유로든 많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성경에서나 역사 속에서 더러 보게 된다. 정신병자였던 네로의 학정(虐政) 밑에서 로마의 대화제가 바로 네로의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 뒤집어 씌워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함으로 더 많은 시련을 당한 것을 비롯해서, 역사 속에 종교 때문이 아닐지라도 수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권좌(權座)를 지키려는 야비한 수단으로 수없이 학살을 당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헤롯의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갇혔던 두 사도 중에 야고보는 세례 요한처럼 목 베임을 당하고 베드로는 천사에 의해서 기적적으로 구출을 받는 각각 다른 두 사람의 결과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을 생각하게 한다. 왜 꼭 같이 놓임을 받으면 더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복음 증거에도 효과적일 것 같은데 야고보는 죽도록 하고 베드로는 살게 하셨는가? 하는 신앙적 고민이다.

그러나 분명한 한가지는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언제나 옳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보기에나 판단에서 볼 때는 불공평하게 보이는 일들이 궁극적으로는 절대적이신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조차 불평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즉, 결과가 어떻게 되건 하나님에 대한 신뢰나 믿음에 흔들림이 없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건 사도들을 죽이려는 정도의 박해는 예루살렘 교회로 하여금 더욱 기도로 뭉치게 했고 자신들조차도 믿지 못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얻어냄을 다음 주의 말씀에서 까지 보게 된다.



Ⅰ. 세상권력의 사악함은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기 까지 한다.(1~5)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일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애굽 왕을 바로라고 했듯이; 로마의 황제를 성경의 표현대로 가이사(Caesar) 라고 불렀고; 이스라엘의 분봉 왕은 헤롯으로 표현되면서 헤롯의 가문(家門)은 여러 대[대 헤롯(37BC~AD4), 아켈라오(AD4~6), 안티파스(BC4~AD34), 아그립바(AD37~44), 아그립바2세(AD49~100)]를 이어 그리스도 탄생을 전후한 이스라엘의 역사와 깊은 연관을 갖는다. 대대로 비도덕적이고 야비한 것 때문에 심지어 예수께서는 [여우] 라고 까지 말씀하셨던 것을 볼 수 있다.(눅13:32)

그만큼 자신들의 자리를 지켜가는 데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인물이었고, 세상의 정치세계는 대부분 이렇게 야비할 수 밖에 없는 것이 그 때나 이 때나 사실이었던 같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헤롯 아그립바]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기 위하여 이스라엘 속에서는 유대 관습을 흉내내기도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간교함과 억척같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만 이 12장 23절에 벌레에 먹혀 죽는 것을 보면 이러한 세상의 영광에 연연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불쌍하기까지 하다. 복음이 왕성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땅에서 영생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땅의 영광에 연연하다가 비참하게 죽음을 맞는 것을 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헤롯은 당시에 대세를 이루고 있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그들이 비상처럼 싫어하는 주님의 교회 중의 몇 사람을 죽이려는 결심으로 선택한 인물이 바로 야고보와 베드로였다.

성경에 [야고보] 라는 이름은 대단히 흔한 이름이었고(구약의 야곱) 마태복음10:2~3에 보는 대로 주님의 제자 중에도 두 사람의 야고보가 있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본문에서 “요한의 형제 야고보”(2) 라는 것으로 봐서 변화 받기 전에 이 두 형제는 대단히 성미도 급하고(눅9: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막3: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마가복음10:35~45에 보는 대로는 정치적인 욕망도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37’

38~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결국 야고보가 첫 순교자가 된 것은 어찌 보면 이 주님의 예언이 이루어 진 것이라고도 하는데, 이 야고보, 그 형제 요한, 그리고 베드로는 주님의 중요한 역사의 현장에 언제나 동행했던 인물 중에 한 사람이고, 사도들 중에서 가장 짧은 생을 마친 인물이 이 야고보였다면 가장 길게 장수한 사람은 그의 형제 요한이라고 하는 데서 이렇게 이해하게 된다.(죽임을 당하는 순교도 쉽지 않은 것이지만 평생을 주님과 함께 고난을 당하는 것도 역시 쉽지 않은 순교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을 유대인들의 명절 중에 이행하는 데도 헤롯의 의도하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일이라”(3) 우리가 아는 대로 무교절은 유월절 전 한 주간을 말하는 것으로 역시 출애굽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한 행사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바로 이 절기 중에 잡히셨다. 이런 날이 결국 정치적 야심으로 더럽혀지고 있는 것이다.

어두움의 하수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죽이려는 대상에 어떤 한계도 느끼지 않는다. 헤롯에게 있어서는 주님께서 그 대상이셨고 그의 제자인 베드로가 예외일 수는 없었다.

바벨론에서는 의롭고 지혜로운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었으며 성경의 역사 속에서 이러한 욕망의 표현은 끝이 없다. 때문에 우리 모두가 어두움에 사로 잡히지 않도록 주님께서는 경고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요12:35)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4b)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이런 검은 속셈이 신성한 절기에 이루어지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고 이미 잡았다가 놓진 경험(5:19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을 들은 헤롯은 그들을 지키는 것으로 부족해서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게…”(4) 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는 같은 사도인 야고보는 죽는 것을 허용하시고 베드로는 살렸는가 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바 있지만 이러한 일은 오늘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는 일이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으로 돌릴 수 밖에 없다.

꼭 같은 믿음의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중병에서 낳게 하시고, 어떤 사람은 마침내 악화되어 죽도록 허용하시는 가가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공평하고 이해가 안되지만 조건에 상관없이 주님의 입장에서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 들이는 자세가 중요하다.

여하튼 이 일은 예루살렘 교회로 하여금 합심하여 기도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5) 귀중한 신앙의 지도자를 한 사람 잃었지만 교회는 좌절보다는 기도로 나머지 사도들을 지켜 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게 되었다.



Ⅱ. 베드로에게서 천사의 도움을 받을만한 믿음을 본다.(6~10)

“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적시적소(適時適所)에 이루어 진다. “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6) 물론 이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적시적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한 적시적소이다. 무교절기 중에 몇 일인지는 정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지만 베드로는 몇 날을 감옥에 군사들에게 손이 묶인 체로 보냈고 행여 있을 탈옥을 방지하기 위하여 군사들은 베드로를 군사 틈에 묶어두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겹겹으로 보초를 세우고 있음을 누가는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베드로를 석방하신다. 그런데 이 역사가 이루어지기 전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동원하실 만한 믿음을 베드로에게서 보게 된다.

우리 믿는다는 사람들조차 어려운 일이 생기면 우왕좌왕(右往左往), 좌불안석[坐不安席] 갈팡질팡한다. 그런데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6b) 참으로 믿음의 사람답다.

내일이면 백성들 앞에 끌어내어 야고보처럼 목이 잘려 죽을 운명이 더 확실한데도 그 불편한 옥중에 군사들 틈에 양손이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 베드로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불신의 눈으로 본다면 ‘이미 체념했겠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베드로는 인생을 체념한 사람답지 않은 평안함에 있기 때문에 그 밤에 잠을 잘 수 있었을 것이다. “…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127:2b)

특히 천사가 나타나 옆구리를 쳐서 깨우는 것을 보면 얼마나 깊이 자고 있었는가를 짐작케 하고, 또 베드로가 천사를 따라가면서 까지 ‘환상을 보는가!’ 생각한 것을 보면 참으로 편안한 잠을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잠결에서도 부정하지 않고 천사의 지시를 철저하게 순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급히 일어나라”는 말에 순종하자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는 기적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기적은 언제나 순종의 사람들에게 일어난다. 믿습니까?

천사는 계속 베드로에게 지시를 한다. “…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8) 상황적인 면에서 과거의 베드로라면 바다위로 오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바람을 보고 빠져갔던 것처럼, 옆에 군사들을 보면서 ‘안되겠는데요!’ 라고 부정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하라!”는 천사의 지시에 묵묵히 “그대로 하니” 라는 철저한 순종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고백하게 되는 이유였음을 믿는다.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11)는 고백이 순종의 열매였음을 보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9) 이것은 적어도 불신의 고백이 아니라 갇혀있는 자신에게 환상으로 라도 위로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Ⅲ. 교회의 기도는 닫힌 문을 열게 하는 능력을 깨닫는다.(10~12)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리는지라 나와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모든 닫힌 것을 열 수 있는 이는 하나님 한 분뿐 이시다. 이사야는 바로 그것이 가능한 분을 메시야에게 돌린다.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사22:22)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믿음으로 승리한 교회에게 이 약속을 확인한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계3:7~8f)

아무리 인간의 힘과 기술로 만들어 닫은 철문도 창조주 앞에는 없는 것과 일반이다.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리는지라”(10)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고자 하는 순종의 사람에게는 어떤 장벽도 벽으로 남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2:14) 한 것처럼 이미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의 담을 해결해 버린 자에게는 막힘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나아 가는 데나 그분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길이 비록 좁고 협착하기는 해도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이상, 더 이상 장애로 남겨두지 않으시는 주님이시다.

그리고 그것은 큰 확신으로 다가오는 것을 베드로의 고백 속에서 듣는다.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11)

우리가 때로는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지 못한 체로 은혜가운데 있다가 어느 순간엔가 영적인 각성을 하게 되어 이런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고백의 흔한 이야기가 바로 ‘발자국 이야기’이다. 주님께서 ‘내가 가장 힘겨운 그 때는 어디 계셨었습니까?’ 물을 때 주님께서는 답하시기를 “네가 그때는 걷는 것을 감당치 못하여 너를 업고 걸었었노라!”고 답변하신다.

“…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11) ‘나를 자신의 정치적 수완으로 이용하려는 헤롯의 간악한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간교한 종교 꾼들의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셨군요!’

베드로가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절대로 간악한 세상의 손을 들어 주시거나 바른 진리를 저버리고 거짓된 것을 행하면서 진리를 행하는 자들을 괴롭히는 종교를 빙자해서 악을 행하는 무리들의 편이 되어 주시지 않으실 것이다.

“내 하나님은 크고 힘있고 능 있어 못할 일 전혀 없네 정말/진짜 ×2 저 산들도 그의 것 골짝도 그의 것, 별들도 그의 솜씨, 내 하나님은 크고 힘있고 능력 있어, 못할 일 전혀 없네”

다윗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결국 베드로에게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 라는 찬양을 드리게 하는 것이고 이것은 베드로처럼 목숨을 바쳐서 주님을 순종하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최종적인 승리의 고백이 되게 하실 것이다. 할렐루야!

우리는 때로 자신 혼자의 경건이나 기도로 수렁에서 벗어나고 닫힌 문을 열고 나오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들이 더러 있는데 바른 믿음의 사람이면 베드로와 같은 믿음의 고백을 드리게 될 줄 믿는다.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12)

“깨닫다(헬, 쉬네이도(syneido) = 쉰(syn, 함께)+에이도(eido, 알다) =모든 정황을 헤아려 알게 되다. 전후 좌우를 헤아려 알게 되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고 찾아간 것도 자신의 신상의 안전을 위해 예루살렘 성밖으로 도망하기에 바쁜 것이 아니라, 바로 평상시에 모였던 요한의 어머니 집에 믿음의 사람들을 찾았고 거기를 갔기 때문에 더욱 절실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게 되는데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교회의 사랑에 감사하게 되고 더 큰 확신과 감사로 영광을 돌리게 된다.

세상 권력의 하수인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그 장애가 되는 대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하려고 음흉한 간계를 부린다. 비단 주님과 베드로뿐만 아니라 오늘의 시대에도 같은 일들은 수없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빛의 도구인 교회는 세상의 간악함에 길들거나 이용당해서는 안되고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죽거나 살거나 는 주님께 맡기고 힘을 합하여 기도하고 주님께 의지해야만 한다.

비록 우리의 이성으로 판단이 불가능한 위기를 당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의지함으로 우왕좌왕하지 말고 의연할 필요가 있다. 다만 주님을 순종하는 곳에 우리를 묶었던 사슬들은 벗어지고 가로막힌 장벽은 열리게 되어 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를 확인하며 감사할 이유를 찾게 되고 구원의 감격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악한 자의 손을 들어 주시지 않고 목숨을 걸고라도 자신을 순종하는 자의 손을 최종적으로 들어 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은혜와 함께 신앙하는 모든 지체들의 합력하는 기도와 사랑으로 완성됨을 알고 스스로의 경건을 과시하지 않고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