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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13:1~12 2008-10-26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오늘부터 사도행전의 새로운 역사를 접하게 된다. 여태껏 예루살렘을 중심하고 베드로를 주축으로 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의 복음의 확산을 봤다면, 이제 출발지는 안디옥으로 바뀌고 바나바와 바울이 주축이 되어 땅끝을 향해 복음이 나아가는 복음 확산의 두 번째 단계라는 역사와 만나게 되고, 예루살렘 교회와 함께 하였던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는 이제는 하나님의 사용하시는 종들이 이르는 데마다 같은 표적과 이적으로 함께 함을 보게 된다.

13: ~ 21:26은 15장을 제외하고 계속되는 이방전도의 역사를 다루고 있고,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가는 기록을 21:27~28장에서 보게 된다. 땅끝을 향해가는 바울을 통한 복음의 행로로 3차에 걸친 안디옥 중심의 선교여행을 기록하는 중에서 이 13~14장은 또 다른 비시디아 안디옥을 돌아 오는 1차 여행을 다루게 될 것이다.(2차-15:36~18:22; 3차-18:23~21:26)

1~3절 이방 선교의 중심지로 서는 안디옥과 선교사들, 4~12절 최초의 선교지에서 있었던 어두움의 종의 방해 공작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승리의 역사를 다루게 된다.

이 이방 선교의 중심지로서의 안디옥을 기점으로 바울과 바나바는 계속 기도와 물질과 필요한 것들을 지원받으면서 복음을 전하게 되고, 안타까운 사실은 이 이방인 전도 중에도 바울과 바나바는 언제나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다음으로 이방인들에게로 가지만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확산될만하면 뒤따라 온 유대인들에 의해 방해를 당하는 경험을 같은 이13장 말미에 고백하고 있음을 본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13:46)는 가슴 아픈 고백을 듣는다.

오늘 복음의 출발지인 안디옥의 준비와 첫 선교지에서 만나게 되는 어두움의 종을 만나 방해를 받지만 오히려 그 방해가 더 큰 결실로 나타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마지막 로마에까지 복음을 들고 가는 존귀한 이름을 주님께 드리고 지극히 작은 자라는 바울로 이름을 바꾸는 희생에서부터 하나님의 성령의 충만으로 응답 받는 모습을 보게 된다.(특히 유대인들에게 ‘사울’이라는 이름의 영향력은 훨씬 유리할 것임에도…)

영광과 아름다운 이름을 미래에 맡기도 겸손과 순종으로 최선을 다하므로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



Ⅰ. 최초의 이방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1~3)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우리는 2장에서 오순절 날 약속대로 이 땅에 성령께서 오셔서 교회가 세워지고 먼저 3천명이 세례를 받아 교회에 더해지고 그 교회 안에서의 교제의 모습을 본바 있다. 물론 예루살렘 교회의 주축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직접 배우고 훈련된 사도들이었지만 이 안디옥교회는 또 다른 교회의 모습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음을 본다.

지역적인 입장에서도 이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과 비교할 때 새로운 시작이 되고 있고, 구성에서도 독특한 조직을 가지고 있다. [안디옥 교회] 지난번에 말한 것처럼 당시 안디옥이라는 도시나 지명은 많았지만 여기 안디옥은 길리기아 안디옥이라 하고 다음 시간에 바울 일행이 전도하러 갔던 비시디아 안디옥이 주로 이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도시이다.

원어적인 의미는 [안디옥에 있는 교회]로 강조적이다. 성경의 지역적인 교회 이름은 모두 이런 형태만 나타난다. 요즘처럼 중요한 신앙의 지표가 교회이름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성경에는 찾아볼 수 없다. 이름은 곧 나타내려는 것의 가치와 질을 표현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친히 십자가에 주신 우리 주님의 이름과 가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다.

요즘 이런 명칭의 예들은 오히려 큰 기업들의 지점이 더욱 그렇다. 장림, 사상 현대자동차 A/S 등등, 오히려 자동차를 잘 고치는 것을 알리기 원한다면 [테크노 자동차 써비스] 라고 할 법도 한데 자동차 메이커를 더 강조하고 지역적인 위치를 이름으로 선택하는 것을 보는 데서 신앙인들이 오히려 배워야 할 부분이다.

만드는 회사의 이미지에 대한 자부심이 오히려 다른 그럴싸한 이름을 마다하고 이름을 쓰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됨을 본다면 교회는 더욱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교회들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건전치 못한 무리들이 성경적 이름을 들먹이면서 바르지 못한 믿음을 전파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1) 아직 교회의 헌장인 신약성경이 쓰여지기 전의 교회에는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와 함께 직접 하늘의 계시와 가르침을 사람들을 통하여 직접 주시는 시기였기 때문에 안디옥 교회의 다섯 사람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은 대단히 귀중한 진리의 도구로 역할 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오늘도 이런 하나님의 바른 진리를 가르칠 수 있는 일꾼들이 있을 때 교회는 장성하고 선교의 일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이 [선지자들과 교사들]의 구성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이 이 역할을 했던 반면에 주님께서 이 이방인 교회의 선교기지로 세우신 안디옥교회는 가르치는 사람들 구성 자체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골고루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맨 앞의 바나바와 맨 마지막의 사울도 이미 앞에서 봐온 사람들이지만 독특한 차이를 가진 사람들로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 당시의 라틴어 즉, 로마식 이름과 유대 이름을 같이 쓰고 있는데 니게르[헬, 니게르(Niger), 검은] 이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 아프리카 출신의 사람인 것으로 보이고 역시 북아프리카의 [구레네 사람 루기오]는 앞의 11: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한 사람 중의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루기오[헬, 루키오스(Loukios), 빛을 비추는)”는 이름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생명의 빛을 비추는 도구가 되었다는데 의미가 크다.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앞의 사람들과는 또 다른 출신의 사람이다. 친어머니가 아니었고 유모였을지라도 헤롯과 함께 젖을 먹고 자란 왕가 출신이 여기에 들어 있다는 것도 세상의 모든 계층을 복음으로 가르치는데 분명히 귀중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출신과 성격의 사람들이 모여 안디옥 교회의 가르치는 일꾼들로 구성되게 하신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도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은혜임이 분명하고, 이들이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2f)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자신들을 쳐서 복종하고자 할 때에 성령의 일깨우심을 듣게 된다. 하나님의 참된 뜻을 깨닫고 맡기기 위해서는 금식하며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오늘날에도 필요한 신앙의 부분이다.

그럴 때에 신령한 응답이 주어졌다.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2) 다섯 사람의 선지자와 교사들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안디옥 교회만을 위한 비전이 아니라 처음부터 사도들에게 약속하신 비전을 보게 하신다.

특히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과제이다. 우리는 곧잘 사람이 기뻐하고 원하는 일들을 위하여 신앙적인 부분을 할애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순종하는 공동체의 모습은 하나님이 불러 시키는 일이 현실과 입장에 어울리지 않을지라도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이것은 안디옥 교회에는 대단한 어려움이었을 것이고 희생이었을 것이다. “따로 세우라[헬, 아포리조(aphorizo), 경계선에 의해 규정하다, 제외하다, 지명하다, 나누다, 구별하다, 단절하다] 어찌 보면 “내가 그들에게 맡기려 하는 일이 따로 있으니 안디옥 교회에서는 제외시켜라”는 명령과 같다.

안디옥교회의 입장에서는 한창 발전하려는 시작에서 너무 심한 것 같고 힘을 잃을 것 같기도 했지만 이것이 교회주인의 말씀이기 때문에 즉시 순종하는 것을 본다. 이것이 안디옥교회의 입장에서는 힘겨운 것이었지만 이러한 주님의 명령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자신들을 치면서까지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또 응답으로 주신 말씀에도 같은 자세로 응하고 있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3)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보내는 일에도 주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시 주님께 맡기기 위한 모습으로 모두가 함께 금식하며 기도하고 하나님의 위임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손을 얹어 기도하여 하나님의 복음의 일을 위하여 보낸다.

이것은 역사 속의 교회의 모형이다. 인간적으로 역사가 깊지 못하고 일꾼이 부족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할 때 안디옥 교회는 계속해서 보내는 선교의 일을 감당함을 보는 것이다. 오늘날도 이 안디옥교회를 모델로 선교의 사명을 시작부터 시작하는 교회들을 보는데 그들이 말씀을 따라 실행하는 일이기 때문에 넉넉히 감당하는 차후의 결과도 같이 누림을 보게 된다.

복음의 증거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롬10:15) 하는 말씀처럼 주님의 명령을 따라 보내는 교회의 자세가 있어야 하고 보내는 모습은 주님께 맡기기 위하여 모두의 금식과 성령의 함께 하심을 손을 얹어 위탁하여 의지하는 것이다.



Ⅱ. 이방교회 최초의 선교와 하나님의 복음에 대항하는 어둠의 세력.(4~8)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니,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이 박수 엘루마는(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이제 주님과 교회로부터 보냄을 받은 바나바와 바울의 첫 선교지에서 있었던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는 내용이 오늘 내용의 두 번째 단락이다.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가로막는 어려움은 어디에나 있지만 믿음으로 주님께 맡기고 의지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오히려 그 가로막는 장애를 통하여 복음을 더욱 확산시키고 영광을 거두심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다.

바나바와 바울은 육지여행보다는 먼저는 항구인 실루기아에서 배타고 가까운 섬인 구브로로 복음을 가지고 간다. 이유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바나바의 고향이었다는 것 외에는 별로 인간적으로 유리한 점은 없었다.

앞의 11:20에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라는 기록으로 이미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받고 박해로 인해서 안디옥에 와서 신앙하는 구브로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먼저 구브로의 동(안디옥)쪽에 위치한 ‘살라미’라는 항구 도시에서 유대인의 회당들을 다니며 말씀을 전하면서 바나바의 생질인 마가(골4:10)의 협력을 받았고 섬의 맨 바깥쪽인 총독이 머물고 있는 바보에까지 온 것을 보면 온 섬의 회당이라는 회당은 다 거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섬의 통치자인 총독에게 복음을 전하려 하지만 생각지 못한 방해꾼을 만나게 되는 데 이 사람은 이름과는 정반대의 사람(바예수-여호수아, 예수의 아들)이었다. “박수[헬, 마고스(magos), 마법사, 마술사≒ 페르시아, 메데, 바빌로니아의 현자를 일컫는 말 - 마2:1, 7, 16]는 높은 학식의 사람도 있지만 한마디로 눈 속이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오랫동안 총독을 잘 속여오면서 안정된 생활을 해 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중 에베소의 은감색들이 그랬던 것처럼(행19:24~28) 진리인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자신의 자리가 위태하다는 사실을 안 이 마술쟁이는, 생명의 진리를 사모하여 바울 일행을 초대하여 복음을 듣고자 하는 총독과는 반대로 하나님의 종들을 대적하여 서기오 바울이 믿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게 된다.

사실 복음이 제대로 들어가는 곳에는 반대로 망하는 곳들이 더러 있다. 술집, 무당이나 우상 숭배, 도박장, 무도장, 담배포, 매춘 등등 빛이 들어가면 어두움은 도망가게 되어 있다. 그럼으로 이 복음이 들어가는 것을 어둠의 영들은 싫어할 수 밖에 없고 이 바예수처럼 복음을 방해하는 세력은 악한 어두움의 세력들이다. 때문에 바울은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4)고 경계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복음의 확산을 방해 하고 있다면 이런 입장에서 두려워해야 한다. 그럼에도 땅끝까지 생명의 복음을 전하게 하여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이 일이 반대를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만약에 방해 받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그만 두게 하려 했다면 애당초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위에서 구속의 피를 흘리시지도 않았을 것이고 죽음을 박차고 부활하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Ⅲ. 성령에 충만한 하나님의 종과 주님의 권능의 역사와 승리.(9~12)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려 하면 세상은 팔을 벌려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생명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는 세력은 온 갓 방법을 다 동원해서 방해 하려고 하는 것이 공중 권세 잡은 자들에 의해 움직여지는 이 불신의 세상이다. 나중에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갔을 때 유대인들이 이렇게 말함을 듣는다. “…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 하더라”(28:22)

오늘도 다르지 않다. 자주자주 말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서 일하고자 하면 모든 것이 잘되고 순탄하리라고 생각은 처음부터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 일에는 주님의 성령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할 수는 있지만 망할 수는 없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8~9)

사실 “사울”이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초대 왕이라는 역사에서 보듯이 존귀하고 높은 이름으로 자긍심을 가질만한 이름으로 나중 바울이 고백하는 모든 자랑거리의 핵심이었다. 이 사울이라는 이름에 따라 다니는 자랑이 바로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22:3) 하였고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3:5~6)는 화려한 이력이 사울이라는 이름을 지탱하고자 했던 노력이었다.

그럼에도 이 첫 번째 위기 중에서 위대한 히브리 이름 사울을 내어 던지고 로마식의 라틴이름인 ‘지극히 작은 자’라는 뜻의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주님을 의지 하였고 자신을 바닥까지 낮춘 이름 바울에게 드디어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주님을 뵙는다.(9:17다메섹의 아나니아에게 약속하신-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성령에 충만한 바울이 “… 너 속임수와 악행으로 가득 찬 악마의 자식아, 모든 정의의 원수야, 너는 주님의 바른길을 굽게 하는 일을 그치지 못하겠느냐?”(10-표준 새) 라고 주님의 책망을 증거한다.

그리고 마침내 심판을 선언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핍박했던 다메섹에서 자신에게 당했던 같은 형벌을 선언한다.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11f)

역시 독특한 것은 자신의 경험처럼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 하였고 자신이 회개하고 다시 눈을 떴던 것처럼 이 바예수도 그랬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책망은 언제나 사람을 아주 망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시켜 살리는 것이 최종적인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 주님께서 성령으로 선언하신 책망은 즉시 그대로 응하게 된다.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11b)

이러한 모습도 자신이 주님을 거역하다가 주님을 만났을 때 당한 모양과 다르지 않았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9:8)

이러한 어두움의 세력의 방해공작은 오히려 서기오 바울에게는 더욱 더 큰 확신을 가지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12)

만약에 바예수라는 어두움의 하수인의 방해가 없었다면 이렇게 큰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역시 총독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7) 했기 때문에 듣긴 들었겠지만 이렇게 극적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래서 여기서도 다시 한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오늘도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인하여 당하는 난관이나 어려움은 오히려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엄청난 결과를 주실 것이라는 확신으로 어려움 앞에 오히려 확신을 가지고 대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