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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13:13~27 2008-11-02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구브로의 서쪽 항구도시인 바보에서 복음을 가로막는 바예수 라는 마술쟁이를 하나님의 권능으로 징벌한 바울 일행은 다시 이 항구에서 배를 타고 북서쪽으로 항해하여 비시디아 밑의 밤빌리아의 버가에서 내려서자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함께 돕던 요한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만다. 그리고 다시 육지 길로 계속 북쪽으로 나아가서 마침내 비시디아 안디옥에 다다르고 안식일에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구약성경을 읽은 후에 순서에 따라서 모인 사람들에게 권면하는 바울은 그의 전도에 있어서 처음으로 긴 구원의 역사를 돌이키는 것과 같은 내용의 긴 메시지 (13~41절)를 전한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쫓겨난다.(42~52)

이것은 마치 주님께서 이 땅에 살아 계실 때 나사렛 회당에서 하셨던 모습을 생각해 내게 한다. (눅4:16~28-결과는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예수를 죽이려 달려들었다.) 앞에서 베드로의 몇 번에 걸친 말씀증거와 스데반의 긴 강론을 들었지만 내용에서나 형태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어찌 보면 오늘의 일반적인 형태처럼 예화나 해설은 전혀 없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자체를 그대로 나열하는 형식으로 조금은 지루한 감정을 주면서 지금까지의 인류 구원을 위하여 일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역사를 소개하고 응답할 것을 요청하는 정도로 말씀을 증거한다.

우리 시대에는 말씀의 정확한 이해보다는 ‘세상에서 그 말씀을 어떻게 적용하여 열매를 얻을 것인가!’ 하는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사도시대의 말씀과 신앙은 그렇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먼저 말씀과 구원의 역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적용보다 귀중함을 배우게 되는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증거된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이는 하나님의 바른 뜻을 분별할 수 없다는 데서 경계되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이해되고 적용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을 우리의 삶에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되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모순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방법이나 지혜로 완전히 이해되고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귀한 생명의 말씀은 반드시 말씀을 쓰게 하신 성령의 가르침과 도우심을 통해서만 바로 이해 되어질 수 있고 그렇게 이해되어졌을 때 비로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의 경계처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2~14]는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씀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바로 적용할 수도 행할 수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말씀을 대하는 가장 중요하고 첫째 되는 순서라는 말씀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다시 한번 확신하면서 분량상으로 두 부분으로 나눠서 상고하고 중요한 인물들과 용어들을 통하여 오늘 우리의 교훈으로 삼았으면 한다.



Ⅰ. 안디옥 유대인의 회당에서 말씀 증거할 기회를 얻음.(13~16)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이 과정에서 나중에 바나바와 바울 사이에 선교 팀을 새로 짜야 할 만큼 큰 문제가 되었던 요한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린 이야기는 자세히 기록되고 있지 않아서 모를 일이지만 구브로의 바보 항에서 함께 출발하며 밤릴리아의 버가에까지 함께 온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13b) 라는 한마디로 바나바와 바울을 떠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많은 생각을 해보게 한다.

이러한 상황의 결과로 바나바와 헤어지면서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행15:38) 라는 표현으로 볼 때 분명히 개인적인 감정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복음을 위한 일꾼으로 합당치 못한 이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린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고, 나중에 또 화해를 했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옥중서신에서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골4:10)는 당부를 골로새 교회에 쓰고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

사실 함께 어려움을 각오하고 일을 시작했다가 정작 어려움이 닥칠 때 도망치는 것은 함께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크게 실망감을 주는 일들은 오늘의 신앙과 세상 속에서도 얼마든지 경험하는 사실들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고난이나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서로의 연대감과 신뢰가 중요하고 이런 관계가 넓어질수록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더욱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관습을 따라 그들이 모인 회당에 들어가 앉았고 회당의 운영자인 회당장은 역시 자신들의 모임의 순서를 따라서 구약성경을 읽은 후에 모인 사람들에게 “권할 말 [헬, 파라클레시스(paraklesis), 충고, 위로, 간청]”을 줄 것을 청했다. 이것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증거하는 복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영적으로 ‘권하는 말’이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이 되지는 않는 것을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결과에서 볼 수 있고, 처음부터 바울 사도 조차도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16)는 권면을 통해서도 이해할 수가 있다.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과 겨루어 복을 받아내는 야곱과 같이 한나님의 신령한 복을 사모하는 이스라엘에 속한 자들만 들을 수 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역시 육신적 이스라엘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님을 이어지는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영적인 이스라엘에 속한 자를 의미할 것이다. 주님께서도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8:47)고 탄식하신 바 있다. 하나님의 생명의 진리가 들려지는 …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귀가 있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 듣는 것은 아님을 주님께서도 말씀하신 바 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4:9, 23; 눅8:8, 14:35) 하나님을 창조주요 구세주로 또는 심판주로 두려워 할 줄 아는 사람만이 선포되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통한 어떤 말씀이든지 그 말씀을 들으므로 생명이 풍성한 …



Ⅱ.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심으로 인류구원의 토대를 마련하심.(17~22)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약 사백오십 년간),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앞의 7장 스데반의 설교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순서대로 전하고 있지만 거기서보다는 많이 요약된 이야기들로 역시 진지 함에서는 다르지 않은 내용으로 택함을 받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심으시기 까지의 내용 속에서 하나님의 많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증거하고 있다.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17f) 어찌 보면 시작의 말씀이 중요한 것은 믿음의 조상들을 하나님이 택하셨기 때문에 그 많은 불평과 불신에서도 그 후손들을 참으시고 용서하시는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17b~18)

다음으로 주어지는 교훈은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백성들에게 계속 주셨음을 증거한다.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약 사백오십 년간),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19~21) 살 터전인 기업을 주시고, 어려움을 극복할 사사들을 주시고, 비록 하나님은 원치 않으셨지만 저들의 요구대로 왕을 주셨다.[특이한 표현이다-주시고, 주셨더니, 주셨다가]

과거의 이스라엘에게처럼 오늘 날에도 하나님은 주시고, 주시고 또 주시지만 간악한 사람들의 마음은 차지 않고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달라고만 할 뿐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주심의 모든 것은 역시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었다. 애굽에서의 자유, 가나안 기업, 위기와 절망에서의 사사, 인간의 우려로 요구한 왕 등등 자신들의 수고나 공로는 아무 것도 없고 전적으로 주시는 사랑만 효력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까지는 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심이 아니었다.

그러나 22절에서는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의 요구에 의해서 주셨던 것들이 가치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폐하셨음을 증거한다.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

역사 속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드물었지만, 그래도 그런 사람들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구원의 역사를 펼치셨다. 오늘 여러분 모두가 이런 사람들이 된다면 이 역사는 놀랍도록 변할 것이다.

사람들의 요구로 세워진 왕이 교만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다윗을 세우셨고 다윗이 사울보다 결코 인간적으로 나아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것이 아니고 오늘도 하나님은 다윗과 같은 사람을 쓰시기를 원한다. 겸손의 사람, 회개(눈물)의 사람, 용서의 사람, 순종의 사람, 용기의 사람, 기도의 사람, 참으로 다윗은 그들의 삐뚤어진 형들의 보기에는 변변찮은 인물이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런 사람들과 함께 구원의 역사를 펼쳐 가신다.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22)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탄생이나 외모적인 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한다면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다. 할렐루야!

그러한 사람의 손을 잡고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약속하신다. 이 말씀도 오해하면 안된다.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고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다 이루게 하리라!” 말씀하신다. 마치 십자가의 주님의 고백 같은 말씀이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요19:30)

결국 이새의 아들 다윗의 뿌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오셨고 아버지 하나님의 약속대로 “다 이루셨다.” 그리고 온 인류를 위해 다 이루신 그 구원은 오늘의 시대에도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 역사의 마지막까지 다 이루실 것이다. 할렐루야!



Ⅲ. 약속의 땅에 메시아를 보내심.(23~27)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으니,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오늘 우리가 다루는 마지막 단락이 바로 앞의 다윗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성취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23) 사람의 약속은 신뢰할 수 없다. 아무리 신실하고 충성된 사람일지라도 내일을 보증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라서 주님은 내일을 자랑할 수 없고(약4:16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맹세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라고 하였다.(약5:12)

이런 이유에서 바울을 통해서 당부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빌3:3)고 확인 시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육체보다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의뢰하는 자들이 믿음의 자녀들이라는 약속이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23m) 이 말씀 역시 약속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이스라엘을 위하여”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라는 말로 바꿀 수 있고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예수’ 라는 이름 자체가 바로 구원을 의미하는 낱말인데 “구주를 세우셨으니” 라는 앞의 말이 강조가 되어 더 큰 확신을 주는 표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철저한 약속의 성취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시키기 위하여 먼저 엘리야인 세례 요한을 보내셨음도 지나칠 수 없는 언약의 이루어짐이다.

“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으니”(24~25) 라고 주님의 오심을 바로 앞서 준비했던 세례 요한의 역할을 지나치지 않는다.

더 중요한 약속은 나머지 두 절 속에 증거되고 있다.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26)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진리를 듣고 있는 회당의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보다 가까이 가지고 간다. 같이 믿음의 조상의 자녀들이요 언약의 메시아를 사모하는 입장에서 ‘형제들’에서 끝나지 않고 ‘아브라함의 후예’ 라고 부르고 결정적으로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부르고 있다.

사실 이 회당에서 바울의 증거를 다 듣고는 있지만 나중에 나타나는 결과를 볼 때 이 바울의 표현은 역시 다르지 않았다. 모두 말씀 앞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 교훈을 받아들여 자신의 생명의 교훈으로 듣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즉, 그 말씀이 참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교훈으로 두렵게 듣고 순종하는 사람들만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주어진 약속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일 뿐이다.

“…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이 말씀을 듣고 앉아있는 사람들이 사실 혈육으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었지만 그것 자체가 장애가 되는 일들은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도 있었다.[요8:39f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자신들이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는 자존심 때문에 생명의 주님을 외면해 버리는 안타까운 결과를 부르고 만다. 그래서 주님께서 다시 연이어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요8:39b) 이 말씀을 더 가까이 이해하면 ‘아브라함의 자녀라면 아브라함을 닮아야 하지 않느냐?’는 책망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는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3)고 증거하신 것이다.

이러함에도 약속대로 오신 그들이 기대하고 기다리던 약속의 도성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27) 자신들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진리를 듣지 모함으로 수없이 들었음에도 복의 약속으로가 아닌 저주의 약속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고 만 것이다.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이 시대도 그리고 미래도 마지막 때에도 그럴 것이다. 지금 바울의 말을 듣고 있는 것처럼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십자가에 죽이는 어리석음을 다음시간에 연이어 다루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은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아니라고 자위해서는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일 수 있음을 성경은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6:4~6)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남지 않는다면 나는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할 수 없다.

말씀을 전하는 자를 요리사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그 요리가 임시 기뻐할 별식 즉, 외식을 위한 것인지 진정으로 건강을 위한 것인지에 따라 요리의 방향은 달라지고 재료의 배합은 달라진다.

성경의 말씀 요리사들은 한결같이 임시적으로 단 음식을 만든 것이 아니라 영적인 건강을 위한 요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당시의 그 말씀을 듣는 자들이 적은 수를 제외하고는 기뻐하지 못했고 배척당하기 일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16)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들이 늘 하나님의 이해할 수 있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22) 다윗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의 후손으로 드디어 메시아를 보내셔서 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뜻을 다 이루셨고 오늘도 같은 순종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 구원의 약속은 계속 확산 되어지고 있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