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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13:42~52 2008-11-16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이 13장의 마지막 부분은 바울을 통한 구원 진리의 선포에 대한 반응들이다. 실지로 말씀을 듣는 자세나 결과는 듣는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하다. 진리를 듣고 감격하고 나누면 얼마나 좋겠는가 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 전한 말씀에서나 베드로를 통한 증거와 스데반을 통한 구원을 선포하는 말씀들에 대한 반응은 그야말로 가지각색이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바울 사도의 말씀증거는 성 전체의 사람들을 움직일 만큼 놀라운 반응을 나타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거가 유대인들에게는 역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고 오히려 바울 일행을 향해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나타내게 될 뿐 아니라 힘있는 사람들을 동원해서 바울 일행을 쫓아내려는 시도까지 하게 된다.

성령이 충만한 사도들과 하나님께 신실한 이 사람들을 도구로 생명을 전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지금보다도 훨씬 충만했다고 생각되는 그 때의 반응이 이랬다면 오늘의 말씀에 대한 반응도 마찬 가지일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면서도 오늘 본문에서는 바람직한 신앙의 면모들을 볼 수 있다고 하는 것과 어떤 시대나 조건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은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고 즐거워하는 역사 때문에 오늘도 말씀은 증거되어야만 하고 같은 결과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 일행이 떠났지만 말씀을 듣고 변함없이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던 안디옥 제자들처럼 오늘도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에게도 …



Ⅰ. 말씀에 대한 반응.(42~43)

“저희가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바울 사도의 군중을 향하여 증거된 말씀의 가장 구체적인 첫 번째 메시지라는데(다메섹의 회심 후에도 행9: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라는 기록이 있다.) 의미를 가지기도 하겠지만 우리 모두가 함께 나눈 바 있는 이 말씀이 뜻밖에 좋은 반응을 듣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생명의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이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련된 메시지라면 굶주린 사람이 음식의 종류를 가리지 않듯이 진리의 선포를 요청하는 모습이 바로 “저희가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42)

저들은 말씀을 가진 바울이 회당을 떠나는 것 자체가 아쉬웠고 그런 마음으로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청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어떤 말씀을 전했는지는 이미 우리도 함께 상고한바 있다.

분명히 색다르거나 웃음을 주는 말씀이 아니라 이 역사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위한 구약의 예언의 말씀과 그 언약이 이루어져서 주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죽고 사신 부활의 역사를 증거하였음에도 “이 말씀을 하라”는 부탁을 하고 있다는 데서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이 많은 것을 본다.

또 말씀 증거는 단순히 회당에서 끝나지 않았다. 모임이 파하고 난 후에도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43f) 라는 사실로 미루어 갈급한 심령을 채우기 위한 저들의 헌신을 보게 된다. 그 대상을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울 설교의 첫 부분의 요지였던 구약성경을 아는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라는 표현으로 볼 때 영원을 사모하는 대단히 종교적인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당시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음란한 시대였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는 가치가 다른 경건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사모한 것을 말씀하고 있다.

사람의 욕구는 언제나 두 가지 방향에서 요구되는 것을 보는데 그것이 육신적이고 세속적인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쾌락이거나, 아니면 영혼이 진리를 듣는 신령한 쪽으로 짐승과 다른 영혼의 갈증을 채우려는 종교적인 욕구가 그것이다. 그런데 바울 일행을 따르는 사람들은 당연히 후자의 사람들이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표현하기를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두 사도(두 사람-바울과 바나바(행14:1, 3, 4, 5, 14, 26)] 앞의 바울의 복음 증거가 일방적이었다면 “더불어 말하고”는 서로 나누는 대화를 뜻하는 말이다. 말씀이 증거된 후에는 그 말씀을 적용하고 나누는 교제가 귀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유형은 사도행전 속에서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행17:11~12) 라는 결과적인 부분까지 기록하고 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이것은 믿음의 사람들이 머물러야 할 장소적인 것을 의미한다. 여기 “항상”이 중요하고 머물러야 할 장소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이다. 이 세상의 역사 속에는 엄밀하게 두 가지 장소밖에 없다.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와 ‘진노의 자리’ 즉, ‘오만한 자의 자리’(시1:1)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표현이 부정적으로 쓰이는 것이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롬11:23f) 란 표현이다.

우리 각자가 어디에 더 잘 어울리고 적합한가의 판단이 그래서 중요하다. 여러분 모두가 주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실 때까지 항상 은혜의 자리에 머무르기를 바란다. 그러면 그 이후에는 당연히 주님께서 우리를 은혜의 자리에 영원토록 두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비시디아 전도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한가지 이적도 행하지 않았지만 다만 말씀을 듣고 사모하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이 말씀을 전해 달라는 요청을 드리고 있다. 이렇게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을 듣고자 하는 영적인 식욕이 있어야 한다. ‘밥맛을 잃었다(떨어진다)’는 것은 靈肉에 다 좋은 것이 아니다.

여러분 모두가 “다음 주님의 날에도 이 말씀을 전해주시오!” 라는 영적인 굶주림을 갖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는 …



Ⅱ.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들의 시기.(44~47)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한 주간이 지난 “다음 안식일 날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라는 바람직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처음에는 회당에서 말씀을 증거했지만 이 성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원의 진리를 듣고자 해서 모였다는 기록이다. 모르긴 해도 말씀에 대한 입 소문은 한 주간 동안 이 안디옥성에 시끄러울 정도로 퍼져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사도행전의 다른 모습과 다른 것은 ‘병 고침을 얻고자 해서’ 모인 것이 아니라 “말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한 것이다. 이래서 시작이 중요하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또 듣고자 약속하고 모인 사람들은 여전히 다른 이적을 보고자 해서가 아니라 말씀을 듣고자 해서 모였다는 사실이다. 이래서 기적의 신앙보다 말씀의 신앙이 중요하다.

그러나 언제나 양지가 있는 곳에는 음지가 있듯이 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고 복음의 향기가 퍼지는 생명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한편에서는 어두움의 세력들도 자신들의 어두움이자 음지의 부흥회를 하는 모습이 유인들로 통해서 일어나게 된다.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45)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해서 온 성의 사람들이 거의 다 모인 모습이 하나님보실 때는 얼마나 아름답고 보시기에 좋았을까 만은 어두움의 종들에게는 시기심만 가득하게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글의 본래적인 표현이 바울을 통해서 증거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를 반박하는데 열을 올리는’ 유대인들을 보게 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움이요 비극이다. 어떤 일에 몰두하고 열을 올리는 것은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는데 열을 올리는 것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는 비극이다.

이러한 상황을 보는 바울과 바나바의 마음은 참으로 안타까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46f) 하나님의 진리를 거역하는 것에 열을 올리는 저들을 향하여 바울과 바나바도 대담하게 대항했다. 생명의 진리, 영원히 멸망할 사람들을 살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전하는데 방해를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저주받아 마땅한 행동이기 때문에 두 사도도 책망하고 나서는 것이다.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46b) 우리가 로마서 9~11장을 읽어보면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짐작이 된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나서 나름대로 하나님을 알고 섬겨온다고 하면서도 정작 그들이 기대하고 기다리던 구원의 메시아를 소개하는데도 자신들의 특권이나 자존심을 앞세워 그 하나님의 은혜가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흘러 갈까 봐 전전긍긍하는 … 그래서 정작 자신들조차도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는 동족의 모습은 바울이나 바나바에게 적지 않은 안타까움을 줬을 것이다.

오늘 우리도 두려워하고 경계해야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 다 놔두고 우리 각자가 행여라도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데 자신이 애써 그 사랑을 거절해 버리는 비극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 시느니라”(딤전2:4) 바울 사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사65:2) 라는 내용처럼 하나님이 사랑을 구걸하시는 것처럼 만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래서 믿음의 고백은 계속 주님을 긍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이렇게 하나님의 진리로 설득되지 않는 이스라엘 동족들을 향하여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47)는 선언을 하고 만다.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49:6)는 예언이기도 하지만 바울 자신이 다메섹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입었을 때 아나니아에게 바울에게 가라시면서 주셨던 말씀이기도 하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9:15)

구약의 이사야를 통하여 또는 신약성경의 바울에게 주셨던 이 말씀은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귀한 언약의 말씀이다. 주님께 먼저 부르심을 받은 우리를 등불 삼아서 아직도 불신의 어두움에 갇혀있는 사람들이 구원의 예수 그리스도를 찾을 수 있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이래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빛의 역할을 이 역사 속에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언제나 기쁨과 슬픔은 같이 올 수도 있다. 온 성이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듣고자 하는 아름다운 열망이 넘치는 가운데 이 복됨을 오히려 시기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이 먼저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자기 민족들이었다는 데서 스스로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책망하고 이스라엘과 자신들을 통해서 이방 구원의 도구가 되기를 소원했던 하나님의 안타까움을 지적하면서 유대인 회당에서 구원을 갈망하는 이방인들에게로 발길을 돌림이 결국 유대인 자신들의 잘못됨 때문임을 분명히 한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심도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확신한 만큼 아직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복된 신앙의 자세로 나아가는 …



Ⅲ.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의 모습.(48~52)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비록 동족인 유대인들은 바울을 통한 구원의 복음을 거절했지만 이사야를 통한 예언처럼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48f)는 그야말로 복음에 합당한 반응을 보였다. 죽는 것이 정해진 운명인데 살게 되었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의 역사를 듣는다면 기뻐하지 않을 강심장은 없을 것이다.

다만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이 자신의 것으로 깊이 다가오지 않아서 기뻐하지 못할 뿐이다. 내 자신이 죽을 자리에 대신 죽어서 나를 살렸다면 감사하지 않을 심장은 막되 먹은 사람 가운데서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는 자연적인 수순이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48b) 우리는 하나님을 全知全能하신 분이라고 고백한다. 한마디로 모르심이 없으시고, 못하실 일이 없으신 분이라는 표현이 바로 ‘全知全能’이라는 고백이다. 그러나 이 고백은 이 역사 속에 국한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드시기 전에 이 역사 속에 오고 갈 모든 사람들을 이미 다 아셨다. 믿습니까?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9~30)는 고백은 합당한 고백이다.

이러한 논리를 전제로 할 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48b)는 말씀이 이해될 수 있다. 각 사람의 상태를 미리 아신 하나님은 믿고 순종할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죄값으로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 그들이 누구인가? 바로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이다. 오늘 우리 각자가 그들에 포함되는가?

그러한 사람들은 모두 복음을 듣고 기뻐했고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했고 이런 가운데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49)는 기록은 당연한 결과이다. 복음이 좋은 것임을 바로 안다면 확산되는 것은 당연하다.(생활의 지혜도 나눠 쓰려고 하는데)

그러나 또 다른 어둠의 세력들은 이 복된 소식이 전파되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적인 수단을 동원함을 보게 된다.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50) 만약에 이 귀부인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잘 예배하는 여인들이었다면 절대로 바울 일행을 쫓아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유대교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으면서 남편들이 이 안디옥의 유지들일 가능성은 ‘그 성내 유력자들’이라는 표현 속에서도 나타난다.

여기 “선동하여[헬, 파로트뤼노(parotryno), (절대적으로) 자극시키다, 충동질하다, 흥분시키다]” 라는 말은 신앙인들의 방법이라기 보다는 정치가들의 일반적인 수단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넘본다고 여겨지는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도록 힘있는 사람들을 동원한다. 이것은 오늘도 여전히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교회에서 어떤 일이건 이런 방법은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을 것이다.

마침내 두 사람은 주님께서 가르치셨던 마태복음10:14의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막6:11; 눅95)는 모습으로 비시디아 안디옥을 떠난다.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51)

그러나 이들을 통해 복음을 받은 은혜 속에 들어간 사람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희락을 맛보게 된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52) 결국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늘로부터 오는 기쁨은 대상이나 장소에 상관없이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바울과 바나바는 떠났지만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감격을 잃지 않았고 계속해서 그곳에 구원의 감격은 그 후에도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성령으로 인한 구원 감격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시디아 안디옥 사람들에게 바울은 아무 기적도 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두 사도를 통해 전해진 복음은 나누어지고 확산되어서 안디옥 성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들으려 모였고 이 아름다운 그림에 흠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났다고 하는 유대인들로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전하는 복음을 왜곡하고 비방하는데 영을 올렸고 바울과 바나바는 마지막 말을 그들에게 선언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46)

그러나 어디서든지 상황과 시간에 관계없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는 가운데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제자 된 감격의 삶을 누렸다.

오늘 나는 이 두 가지 중 어느 부류에 속하는 사람인가! 자신들의 입지를 잃지 않기 위하여 진리를 전하는 자를 쫓아내기 위하여 혈안이 된 유대인들일 수도 있고, 상황이야 어떻게 돌아가건 복음을 자신의 것으로 믿고 말씀을 사모하며 성령의 충만으로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 수도 있다.

이말 씀과 함께 하는 모두는 후자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