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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14:19~28 2008-12-07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루스드라에서 있었던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은 많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이끈 반면 바울 일행을 향하여 이를 갈며 벼르던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을 더욱 미워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큰 확신과 기쁨을 주는 반면에 반대자들에게는 더욱 하나님의 사람들을 미워하게 되는 이중적인 결과를 세상에 가져오게 하는 양면성이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은혜를 인하여 환호성을 지른다면 어두움의 세력들은 더욱 이를 갈며 벼르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산다면 너무 지나치게 교만하거나 은혜가 없다고 생각할 때도 절망치 않을 이유가 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바울이 가는데 마다 구원의 예수 그리스도는 증거되고 그러한 역사를 즐거워할 리 없는 어두움의 하수인들은 안디옥에서부터 이고니온까지 적어도 70Km가 넘는 거리를 그들을 박해하고 죽이기 위해서 달려오는 것을 본다면 우리는 생명의 일을 위해서 얼마나 더 열심을 내야 하는 가를 배우게 한다.

다르게 말하면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시간과 물질을 쓰는가에 따라서도 우리의 현실을 바로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물질과 시간과 정력을 과연 무엇에 먼저 쓰는가 헤아리고 오늘 우리의 현실을 바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눅12:34)고 하신 말씀은 사실 이를 두고 주시는 교훈이기도 하다.

결국 바울 일행은 복음을 전하고 선한 일을 하다가 죽는데 까지 이른다. 그만큼 생명을 전하는 데는 생명을 내걸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7)는 교훈은 말과 같이 쉬운 것은 아님을 깨닫는다.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음을 당하고 나서 우리에게 하는 바울 사도를 통한 고백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는 말은 요즘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 주님을 섬기는 일이 이 땅에서부터 모두 평탄하지만은 않다는 각오를 가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한번 나선 생명의 길이 어떤 어려움과 고통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힘들 때마다 “그러려니” 하며 낙심치 않고 주님께서 그러셨고 그의 사도들과 종들이 간 어려움의 길을 나도 당연히 가야 한다는 각오로 믿음의 발걸음을 더욱 힘차게 내딛는 여러분 모두가 되실 때 주님께서 그러한 자들과 함께 하셔서 바울처럼 죽는 한이 있어도 주님께서 살려 주실 것을 확신하는 오늘 이 말씀과 함께 하는 …



Ⅰ. 대적 자들의 끊임없는 박해.(19~21)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율법을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적용하면 그것은 생명이 되지 못하고 죽임을 부르는 무서운 칼이 될 수도 있다는 경계를 자주 말해 왔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으로부터 멀리 원정을 온 유대인들이 어떻게 루스드라의 사람들을 선동을 했는지는 기록에는 없지만 사람들을 동원하여 바울에게 돌을 던져 죽게까지 하는 것을 보면 어두움의 세력들도 얼마나 힘이 있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어찌 보면 이러한 일은 사실 바울 자신이 교회를 박해할 때 저질렀던 일로 의로운 하나님의 일꾼인 스데반을 성밖에 내쳐 돌로 쳐죽인 사건을 돌아본다면 그래도 성안에서 죽여 죽은 것으로 판단하고 성밖에 내쳐진 것은 자신의 행했던 것보다 덜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일을 보면서 깨닫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꾼들에게 어려움과 죽음을 끼친다면 자신이 그와 같이 받을 각오를 하고 그런 일을 해야 한다는 두려운 경계를 일깨워 주는 교훈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19) 그러나 여기서도 스데반과 다른 것은 스데반은 돌을 맞고 죽어 장사 되었지만(8:2) 하나님은 바울을 그냥 죽도록 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시 살리심을 보는 것이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20) 이래서 또 사명은 각자에게 다르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스데반은 돌을 맞아 죽고 하나님 곁으로 일찍 갔지만, 바울은 죽었음에도 다시 살리시는, 죽음까지 가는 핍박에서도 각각 다른 결과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다시 살아서 나중에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 사실을 회고하기까지 하는 것을 본다.(고후11:25)

유대인들은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은 것으로 확인하고 성밖에 버리고 갔고 제자들은 아무래도 장례를 치를 양으로 둘러 섰든 것 같고 그런 가운데 일어나 같이 성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적을 하나님께서 주심을 본다.

또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이 함께 움직였는데 왜 사람들은 바나바가 아닌 바울이었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지만 본문에 역시 그 이유를 적고 있지 않아서 모를 일이다.

여하튼 성안에서 맞아 죽은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서 스스로의 걸음으로 그 죽음의 자리에 다시 들어가는 용기를 통해서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적지 않는 감동을 줬을 것이고 유대인들은 바울이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떠나온 곳으로 모두 돌아가 버렸을 수도 있다.

결국 루스드라의 박해도 바울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은 다시 동남쪽인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21f) 라는 것으로 봐서 바울의 희생으로 인하여 더 이상 쫓아다니는 유대인들이 없어서 효과적인 전도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계속해서 시험이 온다면 사람들이 감당치 못하기 때문에 한번 호된 고난 뒤에는 평강을 강물처럼 주시는 주님의 은혜도 헤아리게 한다.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21b) 이제 두 사도는 자신들이 복음을 전한 도시들을 되돌아 가면서 믿음의 사람들을 격려하는 이 14장 마지막까지의 내용을 먼저 전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이곳들을 거쳐오면서 계속 유대인들의 방해를 받았었고 또 바울을 죽이려고 왔던 사람들도 이곳의 사람들인데 그럼에도 바울 일행은 죽음에서도 일으켜 주시는 주님의 능력을 더욱 확신하고 그 환난과 어려움 속에 있는 믿음으로 낳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하여 그 고통의 소굴을 다시 찾아 들어가는 대담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참된 복음에는 언제나 당연히 방해 세력이 어디서나 있다는 사실을 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끊임없는 대적들의 박해나 악한 공작 속에서도 주님은 그들보다 훨씬 강하다는 믿음과 확신이 오늘도 동일한 역할을 할 수 있게 하고, [고전10:13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치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는 주님 이시라는 확신이 그 때도 지금도 그리고 그곳 소아시아와 이곳 또 세계 각처에서 함께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넉넉히 감당케 해 주심을 믿으시기를 …



Ⅱ. 신앙인의 각오와 자세.(22~23)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이런 박해와 어려움이 어디에서나 산재해 있는 세상에서 그렇다면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믿음을 지켜갈 것인가가 오늘 두 번째로 우리가 나눌 교훈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이 거치면서 전도하여 복음에 들어와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 박해의 자리를 다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권면하는 내용이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각오와 결단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22) 라는 내용이다.

1. 마음을 굳게 하라 당부한다. “마음[, psyche, 목숨, 마음, 영혼, 생명]을 굳게[, episterizo, 더욱 지지하다, 즉 재건하다, 힘있게 해주다, 확고히 하다]” 이것은 단순히 그냥 마음을 단단히 가지라는 내용이 아니라 영혼을 굳게 하고 성령께서 자리를 잡으시도록 하고 영혼의 호흡(기도)을 더 건강케 하라는 당부이다.

믿음에 있어 잘 못 굳어진 마음은 오히려 문제가 되겠지만 영적인 것으로 확고히 하는 것은 신앙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2. 이 믿음에 거하라고 당부한다. 인간 세계에는 믿음이라는 것이 참으로 많다. 그런데 여기 “이 믿음”이 무슨 믿음인가? 바로 죄의 절망에 있는 저주받을 인생을 위하여 대속의 피를 흘려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친히 저주의 제물로 십자가에 죽고 사실뿐 아니라 하나님 우편에 승천하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실 뿐만 아니라 그를 바라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 주신다. 어둔 밤에도 주의 밝은 빛 인도하여 주신다.”(620후렴) 사실 이 믿음 외에는 다 사라질 소망이요 없어질 영광이고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주신 이 믿음만이 영원히, 영원이 유효한 믿음이기 때문에 이 믿음에 거하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3.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결단을 요청한다. 우리는 짐짓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이 세상에서 어던 어려움도 없도록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지켜 주시기 때문에 전혀 어려움 없이 순풍에 돛 단 배처럼 형통하고 순탄한 인생이 될 것으로 기대하며 어려움이 닥치면 견디지 못하는 그런 신앙을 더러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시험을 당할 수 있고 환난을 겪을 수 있는 것도 믿음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어려움과 고통을 이제는 나 홀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성령께서 함께 견디게 하시고 이기게 해 주신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는 말씀은 주님이 주신 말씀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 신앙의 사람들을 더러 보는데,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가르침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에서는 고난 받을 수밖에 없는 사실들을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다. 비슷한 내용들은 빼고 분명한 내용들만 몇 군데를 보면 …

주님께서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15:18)고 말씀하시고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1:29)고 보다 적극적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살전3:3)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3:12) 하였다.

베드로 사도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1)고 하였고 요한 사도는 계시록을 기록하면서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계1:9)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쩌면 예수 믿으면 고난이 없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마귀의 속임수일 수 있다. 고난이 없다고 우리를 속임으로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읽게 만듦으로써 믿음을 잃게 만들려는 달콤한 유혹이 예수 믿으면 고난이 없다고 속이는 것이다. 고난을 각오하고 고난이 있을 때 적극적으로 그 고난과 더불어 싸우라는 것이 성경의 격려이다.

그렇다면 불신자들하고 차이가 무엇인가? 불신자들은 다만 저주로 고난 받을 뿐이기 때문에 인생을 저주하고 견디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난에도 가치가 있기 때문에 의롭게 의연히 그 고난에 대처하게 되는 것이다.

믿음의 장인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히11:24~25) 라는 고백을 본다. 그러므로 믿음의 삶이란 무사안일이 아니라 성령과 더불어 환란을 대항하여 싸우고 이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증거로 복음을 믿게 된 사람들에게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23) 라고 기록하고 있다.

4. 믿은바 주께 부탁하는 것이다. 환난을 이길 힘이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기 때문에 믿은바 주께 부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죄악의 세상에서 환난과 싸워 이긴 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곳임을 믿으시기를 …



Ⅲ. 믿음의 격려는 지속적으로 필요하다.(24~28)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라고 포괄적으로 기록한 누가는 좀더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부분이 오늘 마지막 부분의 말씀이다. 지금까지 바울 일행이 더베까지 왔다가 지나온 행로를 뒤돌아서 자신들은 파송한 길리기아의 안디옥으로 돌아오는 일련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부르기아와 밤빌리아를 거처서 버가로 내려오고 자신들이 구브로에서 배타고 처음 상륙했던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자신들이 거쳐온 구브로는 제외하고 길리기아의 안디옥으로 되돌아 오는데 이곳이 바로 자신들을 금시하며 기도하여 파송한 곳이었고 두 사도의 이룬 일이 이 안디옥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 사람이 이룰 수 있는 영적인 일은 없다. 다만 하나님의 성령의 도구가 되고 말씀의 도구가 될 때만 가능한 것이 구원의 복음역사이다. 그래서 자신을 금식하며 기도하여 파송하고 지금까지 이 일을 위하여 기도의 등불을 끄지 않았던 이 교회를 모아놓고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을 소상히 보고하고 있는 것이다.

즉 두 사도의 고백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통하여 이루신 이 모든 일들은 바로 여러분들의 기도로 이루신 것이라고 격려하며 감사하고 영광을 하나님과 교회에 돌리고 있는 모습으로 대단히 높이 사야 할 신앙의 모습이다.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27f)

그러므로 당연히 이방인들이 마음을 열어 복음을 듣게 된 것에 대한 역사도 교회의 기도와 금식이 이뤄낸 결과로 고백하는 내용이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27b) 라는 보고이다.

선교는 가는 선교와 보내는 선교를 함께 감당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맞는 말씀이다. 외지를 향해 가는 것도 보통의 용기와 결심으로 어렵겠지만 그들이 복음을 위한 소정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보내는 교회의 기도가 없이는 역시 감당되지 않는다는 데서 보내는 선교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28) 말씀으로 오늘 말씀은 결론되고 있다. 제자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요 그런 서로는 격려와 위로와 소망을 나누는 대상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과의 교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 속에서 나누어 지고 이루어 지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제자들과 함께 하는 교제는 아름답고 지루하지 않고 영원까지 지속될 모형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의 일선에서 돌아와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28)는 말씀은 복음의 수고에 대한 위로와 격려뿐만 아니라 자신들 속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서로 나눔에서 힘을 얻고 더 얻는 교회의 교제의 모형인 것이다.

Conclusions : 복음의 현장에는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든지 대적 자들이 있고 그들은 어두움의 세력을 힘입고 빛의 일꾼들을 죽이려고 온 갓 방법을 다 동원하지만 히스기야의 고백처럼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앗수르 왕과 그 좇는 온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는 자가 저와 함께 하는 자보다 크니”(대하32:7)라는 확신이고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는 바울의 고백은 바로 자신의 경험 속에서 얻어낸 확신이다.

이 땅에 천국을 향해가는 순례자들인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어려움이 없는 무사안일이 아니라 많은 환난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영혼을 굳세게 하고 구원의 주님을 믿는 신앙 안에 살면서 죄악의 세상에서 의로운 백성으로 살려면 환난을 당할 수 있다는 각오로 자신의 믿음을 자기 스스로보다는 믿은 바 주께 부탁하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

이 세상에 아무리 훌륭한 능력의 일꾼이라도 독불장군은 없음을 알고 서로의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믿음의 행진을 접고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서로를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는 기도와 자신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보낸 자로서의 기도 속에 이루신 역사를 가지고 격려하고 감사하는 교제를 위하여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 교회를 주셨음을 잊지 않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