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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15:1~11 2008-12-14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우리는 이 사도행전의 절반을 지나면서 어찌 보면 복음을 다시 한번 정리하는 모습으로 이15장을 대하게 된다. 아직까지도 교회 속에 분파는 있었고(6:f 11:f) 율법과 복음의 분명한 한계를 정리하지 않은 체 이방 선교가 이루어지고 벌써 바울의 첫 번째 전도여행을 마치고 이방인의 선교센터 같은 안디옥에서 이러한 문제가 대두되는 것 자체가 인간의 어리석음과 완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일 것으로 이하게 된다.

또 비록 진리에 대한 것이 아닌 구습이므로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가능했겠지만 그래도 이 문제에 대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신앙의 발생지의 연장자들의 의견을 들으려고 한 것 자체가 이방 교회의 신앙의 미덕이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민감한 사안은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이었고 오늘도 이 문제는 더러 논쟁의 이유가 되고 있다. 이런 논쟁이 지나치면 신앙이 계산적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구원을 못 얻겠는가?” “그런 것은 구원과 상관 없으니” 함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논지는 사람의 판단할 부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이다.

구원을 주시고 거두시고는 인간의 감정이나 판단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한에 속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명령에 충실해야 하고 믿음의 중요한 부분을 모두 담당했다 하더라도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17:10)신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할 것이다.

앞에서도 바울과 유대인들 간의 충돌은 적지 않았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그것도 같은 신앙 안에서 논리적인 충돌은 이것이 처음이었고 사실 이 사건은 율법과 복음을 분명히 구분하는 계기가 된다. 우리가 자주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은 논리적인 이해가 아니라 순종이 관건이다. 그러나 어느 교훈이 오늘 우리의 것인가 하는 바른 판단은 대단히 중요하다.

복음 속에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면서도 율법을 따르려 한다면 위에는 한복 저고리를 입고 아래에는 양복을 입은 것과 같은 어설픈 영적 상태가 될 것이라는 데서 이러한 구분은 대단히 중요하고 바르게 이해되어야 할 부분이다. 복음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보혈로 구원받은 사실에 혼란이 없이 진리를 알고 진리의 자유케 하심을 누리는…



Ⅰ. 야기된 율법과의 충돌.(1~2)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라,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어쩌면 한번은 꼭 있어야 했던 일이 안디옥에서 발생했다고 본다. 그러나 이것이 예루살렘에 아닌 이방 세계였고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보내지게 된다.

복음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 은총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자람 때문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자신의 문화와 입장에서 재해석하고 그것을 절대시하는 것은 성경에서부터 있어온 문제였고 그런 전례들이 역사 속에서도 더러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본래의 유대인들의 만들어 놓은 종교적 계율을 어긴다고 하여 ‘이단자’니 ‘괴수’로 묘사 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임에도 역사 속에서 이런 일은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쉽게 표현하는 분파문제는 어디서나 어느 때나 있었지만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를 지키려고 하는 것과 사람의 입장이 고려되는 차이 또한 어느 시대 어디에서나 있어온 것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단의 난립은 후자의 원인 때문이라는 데서 우리는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바울의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15:20)는 자세와는 다르게 유대로부터 안디옥에 내려온 어떤 형제들은 바울이나 바나바와는 의논도 없이 그곳의 형제들에게 복음으로 이방인이 하나님의 약속에 들어 왔음을 인정하면서도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는 새 술과 같은 복음을 헌 가죽부대에 다시 담아야 한다는 인간적인 판단과 생각으로 죄에서 자유 한 복음 속의 자유자들에게 생각지 않았던 짐을 질 것을 강조하면서 단호하게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두려움을 주게 된다.

나중에 바울은 이를 가리켜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갈2:4) 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 날에도 이러한 율법적 논리에서 자유치 못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요즘 어떤 건전치 못한 분파들은 ‘유월절을 지켜야 된다’는 그야말로 허무 맹랑한 말로 복음 속의 사람들을 혼란케 한다는 말을 듣는다. 또 이런 사람들을 대상해서 아무래도 히브리서는 기록이 되었을 것이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새 언약은 과거의 언약과 전혀 다름을 예레미야를 통하여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렘31:31~32) 강조하고 있다.

또 끊임없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백성들을 향하여 호세아를 통하여 “내가 그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호2:11) 라고 선언하셨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새워진 언약은 구약을 조합해서 적당히 고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 언약이라고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20)

오늘 우리의 문제도 어쩌면 다르지 않다. 구원의 복음을 자신들의 관습과 문화를 적당히 조합해서 그것이 절대적인 생명의 진리인양 가르치는 것이 문제이다. 예전에 대통령 한 사람이 “한국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정치는 그 나라와 문화를 아우러야 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절대적 진리는 사람의 것을 혼합하면 생명의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

결국 이 문제는 안디옥에서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2f) 는 현상을 일으켰다. 사실 종교적인 논쟁만큼이나 과격한 논쟁은 없는 이유는 그것이 유대에 온 사람들의 말처럼 구원과 관련된 생명과 관련된 것이라는 데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저들은 이성을 회복하고 올바른 선택을 하고 있다.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2b)

그 때 당시에는 예수님의 말씀이나 바울의 서신들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처럼 통합되어 있지 않은 때였고, 무엇보다도 주님을 직접적으로 모셨던 사도들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바로 복음의 발원지요 출발지라고 할 수 있는 직접 들은 자들에게서 판단을 받는 것이 최상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오늘 이러한 원리는 당연히 사람이 아니라 성경을 찾아서 해결하는 것의 모범이다.

바울은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딛3:8~9)고 경계하고 심지어는 연이어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V10)고 까지 경계하고 있다.

변론과 분쟁과 다툼은 모두 경계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을 없애기 위해서 지혜의 주님께서 이런 교훈을 주셨다면 먼저는 진리에 견고히 서는 것이 중요함을 배운다.



Ⅱ. 예루살렘 교회에 파견된 대표자들의 행보.(3~5)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안디옥에서 예루살렘으로 파송된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은 예루살렘에 가는 길도 시간을 거저 흘리지 않는다. 지중해 연안인 베니게와 사마리아를 비롯한 이방인들로서 복음에 돌아온 형제들을 방문하며 다른 곳에서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격려하고 힘을 얻게 한다.

어찌 보면 이스라엘의 변두리에서 유대인들로부터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던 베니게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유대인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감격을 가지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 동안의 편견과 멸시 속에서 눈물을 삼키며 살았던 이들의 죄에서의 자유 소식은 그 기쁨을 다 표현할 수 없이 큰 것이었을 것이고 오늘 우리 또한 거기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확증시켜주는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엡2:12~13)는 증거는 우리나 그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은혜요 감격이다.

바울 일행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중에 이런 확신을 발이 닫는 이방인의 교회들마다 확인시키며 기쁨을 나눈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예루살렘에 이른 바울 일행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까지도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도구로 이방세계에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소개하여 영광을 돌리지만 바리새인으로서 믿음에 들어온 바울과 같은 전처를 밟은 사람들은 역시 여전히 율법에서 자유 하지 못하고 복음 속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율법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지켜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안디옥에 찾아갔던 사람들의 입장을 옹호하고 나선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5) 이스라엘에게 할례를 통해서 육적인 이스라엘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면 하나님의 나라 즉, 교회 속의 구성원이 되는 것은 하늘로부터 거듭나는 세례를 통해서라는 전혀 새로운 방법이었음에도 율법의 핵심은 복음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고 중요하다는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나중에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2:29)고 죄와의 고리를 자르는 거듭남이야말로 진정한 할례임을 주장한다.

결국 영적인 계명은 육신적인 부분까지도 채워짐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죄를 잘라버리는 할례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은 보이는 어떤 것을 행함으로 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잘라버리는 신령한 할례는 반드시 거쳐야 할 하늘로부터의 거듭남임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은혜를 자신의 것으로 진실로 받아들인 자들마다 신령한 할례를 마음에 받은 참 이스라엘 사람임을 확신할 수 있는 …



Ⅲ. 수사도인 베드로의 의견.(6~11)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여기까지는 적어도 문제의 발단이었고 해결을 위해서 오늘 본문과 다음주 말씀에서 두 사람의 영향력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의견을 말하는데 나중에 나타나는 결론은 실제로 제기됐던 문제가 아니라 율법주의자들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결론을 내게 되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다.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6)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논한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직접 불림을 받은 사도들과, 다음 주에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같은 존재로 장로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주님의 육신적인 형제 야고보로 모두 직접 주님을 육신으로부터 성령으로 대한 영적인 사람들이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7) 영적인 사람들이었지만 적어도 영원한 생명에 관한 일이기 때문에 가볍게 결정지을 수 있는 과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많은 토론이 오가고 또 기도했을 것이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계실 때에도 언제나 중요한 장소나 가르침에는 늘 함께 하였지만 오순절날 성령을 받기 전에는 많은 시행착오와 덤벙대는 모습을 보였고 성령께서 오신 후에는 그의 모습은 놀랍도록 변했다.

무엇보다도 그가 유대인들에게 인정받는 사도였다는 데서도 그의 가르침은 호소력이 있었을 것이다.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7) 사뭇 다정하고 진지하다. 아무래도 고넬료의 가정의 사건을 마음에 두고 입을 열고 있는 것이다.

고넬료 전에는 적어도 이방인에게는 구원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주님께서 고넬료의 가정에 보내시는데도 얼마나 많은 가르침을 통해서 가게 했는가가 아마 이 말 속에는 다 들어 있는 것으로 들린다. 오히려 바울을 앞에 두고 있지만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라고 고백한다.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8) 이 고백은 사실 고넬료의 가정에 복음을 전하고 예루살렘에 올라와 다른 사도들로부터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먹고 마셨다는 비난을 들었을 때 했던 답변과 다르지 않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행11:15) 하나님께서 성령을 자신들과 꼭 같이 차별하지 않고 주신 분이라면 구원에서도 차별이 없을 것이라는 고백이다.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9) 믿음 자체가 인간에게서 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은혜로 주시는 선물을 받은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으셨다는 고백이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10:11~12) 함에도 그 때나 이때나 이스라엘에서나 이 지구상 어디에서나 사람들이 차별을 둔다는 것 자체가 비극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가진 온전치 못한 땅에서 난 믿음(잘못된 확신)으로는 영원한 것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주신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게 하셔서 저희의 마음 즉, 이방인들의 마음을 깨끗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10) 이 고백이야 말로 가장 핵심적이고 귀중한 고백이자 가르침이다. 이것은 바울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계율을 지키기 위한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갈2:16b) 우리는 이 말씀이 기쁘진 않지만은 “아멘”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것 역시 진리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새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하신 주님의 예언에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렘31:32)라고 이유를 말씀하시는 것처럼 할례로 시작한 옛 언약은 죄를 깨닫게는 해 주되 그것을 해결하지 못했던 것은 인간의 연약함 때문이었고 그래서 두 번째 언약인 그리스도의 피로 새운 새 언약은 완전히 하늘에서 완성해서 주신 것이다. 믿습니까?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11) 베드로의 이 고백은 어쩌면 자신들의 입장을 이방인들과 바꿔서 하는 고백이다.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여기는 이방인이 주체가 되고 있다는 데서 놀라운 고백이고 모든 일류는 어느 시대 어느 장소 어느 사람이나 다르지 않게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아멘!

Conclusions: 세상의 복음이 가는 곳에는 어디서나 복음과 종교적 계율이 충돌을 일으킨다. 복음은 생명이 아닌 모든 사람들과 종교와 충돌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 그래서 A. W. Tozer 는 “세상과 충돌하라”는 책을 쓰기도 했고 이 사도행전이 마무리 되는 28장에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은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 하더라”(행28:22)고 말함을 듣는다.

그러나 복음과 함께 살았던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의 증거한 복음을 평가하러 가는 예루살렘 길에서도 복음 속에 돌아온 이방인들을 격려하는 것은 그만큼 확신과 감격과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가장 율법을 강하게 지키려고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보내시는 것을 철저하게 거절 하려던 베드로 사도가 이방인을 하나님께서 받으심의 표적으로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게 한 사실적 경험을 소개하면서 오히려 복음 속에서는 역할을 바꾸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처럼 유대인들도 동일하게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 아노라는 고백을 드리고 있다.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성경 속의 사건이라면 우리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여전히 예루살렘으로 사람을 보낼 것인가!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은 이미 이 말씀을 통해서 그런 문제를 해결하였고 또 성경이라는 불변하는 원칙을 주심으로서 혼란치 않을 근거를 주셨다.

그럼에도 무익한 변론과 분쟁과 다툼을 일으키려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의 권위를 위한 것이고 어두움의 세력의 부추김임으로 판단할 수 있는 말씀과 성령과 함께 하는 하늘의 신령한 지혜자 들이 되어서 “…모든 것을 판단하나…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는”(고전2:15) 거룩한 주님의 사람들로 사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