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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15:22~29 2008-12-28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지우지 아니하리라!  
율법과 복음을 분명히 규명하는 이 예루살렘 회합을 많은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교단 총회의 시작으로 본다. 그러나 분명 이 과정을 보면 범위에서뿐만 아니라 자격에서도 오늘날의 총회성격과는 분명히 다르고, 어떤 신앙적 문제를 판단한다고 할지라도 당시의 사도와 장로의 권위가 오늘 날의 교단 총회의 총대들과 같지 않은 권위자들이라는 데서 차이를 가진다.

성경에 거론되는 두 명의 발제자들인 베드로와 야고보는 주님의 직접 부르심을 받았거나 육신의 형제로서 주님의 일꾼이 되었다는 데서 성경의 집필자들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들의 결정의 전달은 강제성이 전혀 없었고 지극히 자연스러웠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 토론과 결정이 예루살렘은 물론 모든 이방지역을 비롯해서 시간에 있어서는 그 때부터 지금까지 유효한 결정이었고 무엇보다도 이들의 결정에는 충만하신 성령께서 강하게 지배하셨을 것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성령의 오심의 목적을 따라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는 역사를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여하튼 오늘날에도 복음이 전해짐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믿고 거듭남을 통해서 죄의 문제는 해결되고 모든 얽매이는 것들에서 자유케 되어 유쾌하게 되는 일이 주님으로부터 옴을 증거할 뿐 어떤 인간의 공로나 금전이 하나님의 구원을 비롯한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왜곡된 가르침은 없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인 된 사람들에게 주신 생명의 복음은 죄나 우상숭배가 아닌 이상 사람이 만든 계율에 얽매이게 하거나 세상에서 힘이 있는 돈으로 무엇을 사는 것처럼 인식시킨다면 이 예루살렘의 회합을 무효케 하는 것이다. 오늘날 지나치게 헌금이 강조되어 믿음의 장애를 주는 일들도 분명 하나님의 원하심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면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 되는 일은 한 순간에 불과할 뿐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들을 그대로 순종하여 손해나 어려움 당할 것은 전혀 없다.

하나님은 못하심이 없으신 분이시다. “내 하나님은 크고 힘있고 능 있어 못할 일 전혀 없네, 내 하나님은 크고 힘있고 능 있어 못할 일 전혀 없네, 저 산들도 그의 것 골짝도 그의 것 별들도 그의 솜씨, 내 하나님은 크고 힘있고 능 있어 못할 일 전혀 없네”

그렇기 때문에 믿음대로 된다는 신앙적 논리는 어느 시대에나 진리이다. 오늘도 이 생명의 말씀과 함께 자유를 위한 교훈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인한 무한한 하늘의 자유를 만끽하는 …



Ⅰ. 예루살렘교회의 가결과 편지.(22~23)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결정한 사실을 전하는데도 이들은 최선을 다하고 흐트러짐이 없다. 길리기아의 안디옥교회에서 이 문제로 예루살렘에 파송된 바울과 바나바를 비롯해서 이들을 신뢰하고 사랑한다는 모습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어떤 직책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인도자[헬, 에게오마이(egeomai),(공적인 권위를 가지고)명령하다, 중요 인물이 되다, 통치하다, 다스리다, 판단하다] 라고 칭하는 ‘유다’와 ‘실라’를 함께 보낸다.

이 사람들을 보내는 문제에도 한 사람의 반대의견을 가짐이 없이 보내기를 “가결하니”[헬, 도케오(dokeo), 생각하다, 여겨지다, 기뻐하다, (좋게)여기다, 믿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26:9] 라는 하나된 모습은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에서 하나되어야 할 오늘 교회의 모범이기도 하다.

또 이러한 중요한 결정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자세는 절대적으로 평행선상에서 부탁함을 본다. ‘곧 형제 중에’(22)‘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23) 어찌 보면 이러한 혼란에 대한 책임과 함께 혼란을 겪고 있는 이방인 형제들의 어려움에 마음을 같이 한다는 정중한 자세로 이 편지와 사람들을 맞게 될 안디옥과 이방 교회에 호소력을 갖는 모습이었다. 물론 여기에서 파송된 실라가 나중 이 문제를 정리하고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을 떠나는 바울의 협력자가 된 것도 역시 우연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요즘은 공적인 우편을 이용하여 국가적인 인정과 함께 어떤 문서나 공문을 전달하려 하지만 이 일이 세상적인 일이 아닌 영적인 일인만큼 온 예루살렘 교회가 마음을 모은 당부를 그들이 절대적인 신뢰를 함께 하는 신앙의 사람들을 통하여 전달하는 것 역시 역사 속의 교회의 모범이다.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형제 된 사도와 장로들-공동)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23)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된 사도와 장로들은’ 역시 이방인이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형제 된 그리스도인 된 동일한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가족들에게 사랑의 안부를 전하는 것이다.

이들의 정중한 자세와 언어는 성령의 역사와 함께 이방 교회들에게 전달되었고 같은 믿음과 감격을 가진 이방인 형제들 역시 이들의 사랑과 관심에 큰 기쁨과 확신을 끼칠 수 있었을 것이다.

같은 뜻이라도 형제를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이라면 오늘도 이러한 자세를 본받아 교제하는 모두가 되어서 분열을 일으킬뻔한 문제는 오히려 확신과 기쁨으로 마무리되고 있는 것이다.



Ⅱ. 시킨 것도 없이 괴롭게 하고 혹하게 하는 것들에 조심…(24~27)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여기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24f)이란 바로 이15:1의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라”는 내용이다.

신앙의 문제는 하나님의 권위로부터 나오는 것 즉, ‘시킨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바로 구분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것보다는 곧잘 자신들이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마치 하나님께서 시키신 것처럼 확대하고 과장하는 모습들이 더러 있고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옳지 못한 행동이다.

어제 한미교회의 양상용전도자께서 오늘 증거할 메시지를 참고로 하라고 보내왔는데 열상22:1-7을 본문으로 제목을 “거짓말 하는 설교자를 원함”이라고 정하고 서론을 시작하면서 “1991년 피터 김과 제임스 페터슨 함께 쓴 “미국이 진실한 말한 날” 이라는 보고서를 보면 저자들이 미국 50개 주 전역에 걸쳐 50명과 인터뷰를 해 본 결과 91%가 거짓말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라고 시작하고 있다.

하나님의 종 특히 그의 말씀을 대언하는 종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시키심을 따라 증거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것이 생명이 되고 능력이 되고 구원이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을 유쾌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유익에 따라 어떤 부분은 강화하고 어떤 부분은 약화시킨 것들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심한 책망을 들었고 오늘도 만약에 저를 포함해서 그런 사람이 있다면 역시 같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는 무서운 책망을 들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24b) 언제나 말이 문제다. 오늘날도 신앙 즉, 성경에서 나오지 않은 말로 많은 사람들이 실족될 수 있다. 말은 마음을 혼란케 할 수 있다. 바울은 이 표현을 갈라디아 교회에게 증거하면서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갈1:7)고 경계하고 있다.

“혹하게[헬, 아나스큐아조(anaskeuazo), 본래적 의미로는 (짐을)꾸리다, 뒤집어 엎다, 전복시키다] 라는 의미로 마음(영혼, Psyche)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음 절에서는 이런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25)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않는 바나바와 바울 같은 사람들이라면 절대로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칭찬과 신뢰의 추천이고 적어도 이런 신앙적 지도자를 모시고 있는 안디옥 교회는 절대로 흔들릴 필요가 없다는 격려이다.

나중에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행21:13)는 고백을 하는 것을 보면 이들의 확신과 기대가 진실한 것이었음을 확인 수 있다.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이것이 믿음의 발원지인 예루살렘 교회 전체의 확신이고 기뻐하는 것이요 좋게 여기는 믿음이라는 선언이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의 파송자들을 함께 소개하고 있다.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27) 아무리 많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바울과 바나바만을 보낸다면 객관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믿음의 사람들만이 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신앙은 한쪽 구석에서 몰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함께 수긍하고 인정하는 객관적인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아닌 주님과 성령과 성경이 시키지 않은 말로 믿음의 사람들을 혹하게 하는 일들은 얼마든지 있다. 아니 오히려 마지막 시대가 될수록 이런 일들은 더 흔할 것을 주님께서는 경계하셨다. 성경은 억지로 다른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신비로만 풀리는 닫힌 책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는 충분히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것이지만 함정이 되는 것은 하나님을 제쳐둔 체 사람의 유익만을 위해서 뀌어 맞춘다면 그것은 영원히 책망 받고 저주받을 죄악이다.

이것 때문에 말세에는 이 생명 진리의 교훈을 각 사람의 손에 들려주셔서 구원의 진리를 바로 판단하고 이해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우리모두는 하나님께서 시키시지 않은 말에는 “아니오!” 라고 판별이 가능한 성령의 사람들로 사시기를 …



Ⅲ. 복음 속에서도 요긴한 것들…(28~29)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적어도 주님을 옆에서 친히 뵈었고 성경을 집필한 사람들이었지만 이방교회의 형제들에게 자신들을 앞세우지 않는 바람직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성령과 우리는” 이 한마디의 고백 속에 성령의 도구가 되고 있는 자신들의 자세를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있고 또 이 편지를 받는 저들도 그러해야 함을 직접 지적하지 않아도 부탁하고 있는 내용이다.

사실 이 사도행전이 성령의 행전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 사실이고 교회의 역사는 사도행전의 모형을 따라 성령의 도구로서 사람들이 성령과 동역 할 때 바람직한 모습을 갖추어 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세상 속에 연약한 신앙의 사람들은 성령과 동역보다는 곧잘 사람들의 모임으로 전락하고 마는 경향들이 있다. 우리의 교회를 비롯해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조심해야 할 신앙적 과제이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28) 율법은 물론이고 복음 속에서도 신앙의 핵심이 되는 것들은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지적하신 중요한 것들이 사람들에 의해서 언저리로 밀려나는 것이다. “요긴한 것[헬, 에파낭케스 (epanangkes),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반드시, 부득이= 에피(epi), ~위에, ~곁에, ~가에, ~앞에, ~에 대한, ~을 + 아낭케(anangke), 없을 수 없음, 불가불, 아니할 수 없는, 반드시].” 결국 율법의 시대가 지났다고 할지라도 신앙에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환원운동을 부르짖으면서 “성경이 말하는 것은 말하고, 성경이 침묵하는 곳에서는 침묵한다.”는 슬로건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러한 부분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부분이기 때문에 경계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이다.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28) 결국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지적한 것들 외에 율법의 모든 부분이 복음 속에서 지켜야 할 어떤 항목도 아님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당시의 신앙적 지도자들을 책망했던 이유도 자신들은 감당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만 강요했던 짐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 도다”(눅11:46)

실제로 베드로는 앞의 10절에서 지적하기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고 책망한 바 있다.

사실 모든 사람에게 죄는 스스로 질 수 없는 짐이었고 이 짐을 짐으로 인식시키는 것이 율법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오셔서 모든 인류의 죄의 짐을 십자가에서 단번에 해결하신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자신을 위한 것으로 믿기만 하면 이 죄의 짐을 벗을 수다 있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공의의 실현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죄를 감당할 수 없는 짐으로 묘사하기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24)고 비극 속에 소망을 증거한다.

오늘의 마지막 절에서는 이 요긴한 것이 무엇인가를 확증해 주고 있다. 이것은 사실 20절에서 야고보에 의해서 확정된 것이었다.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것이 다만 순서적으로만 바뀌어 있을 뿐이고 내용에서는 전혀 다르지 않다.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29f) 이 말씀은 요한 계시록 2:14의 버가모교회에게 책망한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는 내용으로 기록되고 있다.

적어도 우상 제사와 거기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경계는 율법은 물론이고 신약성경에서 수없이 지적되고 있는 부분이다. 또 음행은 율법시대뿐만 아니라 1세기에도 반드시 우상숭배와 더불어 행해지는 보편적인 범죄였었고 특히 고린도 같은 곳에서 수없이 경계되고 있는 것을 고린도전서 8~10장까지 책망하고 있는 부분이다.

또 “피와 목매어 죽인 것”은 결국 한가지로 율법이전부터 경계 되어 지고 있는 부분이라는 데서 율법에 국한 된 것만이 아님을 본다. 처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창1:29) 하셨지만 노아 홍수역사 이후에 하나님께서 비로소 육식을 허락하시면서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 것이니라”(창9:3~4)고 경계하셨다.

여기서 보는 대로 ‘피는 곳 생명’이라는 등식과 함께 생명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데서 경계 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모든 동물이 ⅓이상의 피를 흘리면 생명이 위태로운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 되어지는 사실이다.

그리고 연이어 하나님은 이 피에 대한 경계를 더하시는데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9:5~6)

그리고 율법의 정결의식에서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17:11)고 증거하셨고 이것은 복음 속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어지고 있는 내용을 히브리서에서 보게 된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그러므로 이 피는 곳 생명의 속전이 되었던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죄 없으신 무죄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모든 인류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이유에서 피는 사람의 영역이 아닌 하나님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사람이 임으로 취하는 것을 금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피의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고 지금은 비린내 나는 직접적인 피를 통한 제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기념함으로 하나님 앞에 확인하는 것이 예배의 중심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가 오늘도 이 피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이런 이유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오늘도 기념되어야 하고 이것이 예배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29b) 이러한 당부는 어려운 일이 아니라 순종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가능하기 때문에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이를 믿음으로 순종할 때 평안할 것이다.” 확신을 주고 있는 것이다.

복음 속에 요긴한 것들은 어려운 과제가 아니라 순종으로 완성되고 채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정욕을 주님께 맡기고 성령을 의지하여 삼가 한다면 형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권면으로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라 다만 순종이 관건일 뿐이다.

Conclusions : 복음의 중심에 있는 예루살렘의 사도와 장로들은 이방인들로서 복음 속에 들어 오는 자들에게 주님처럼 단지 순종을 일깨워 주었다. 자신들이 불가능했던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고, 사실 복음만큼이나 편한 것은 세상 어느 종교에도 없다.(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구원 받을 수 있는가?’ 의심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죄를 벗어버리는 유쾌함에서 부터 어떤 대상도 정죄를 당하지 않는 영육의 자유를 사람에게 주는 것이 복음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4)

말씀과 성령께서 시키지 않은 말로 사람들의 영혼을 혹하게(뒤집어 엎는, 전복시키는) 하는 것은 말씀을 전하는 자의 권리가 아니다. 다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 바나바와 바울 같은 증거 자들만이 사람들에게 확신과 평강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복음 속에 요긴한 것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들은 복잡한 것이 아니다. 생명의 영역인 피는 하나님께 그리고 주님 외에 더 사랑하는 것은 유, 무형을 막론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삶에 합당하지 않으므로 나를 위해 피 흘려주신 주님 앞에 영육의 성결을 성령께 맡긴다면 신앙에 있어서 평안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믿으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