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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27:1~20 2009-09-13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행27:1~20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에게 보여주시고 또 고대하며 기다리던 로마로 마침내 가게 된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볼 때는 복음을 위해 주님을 만난 후 생애를 헌신하고 순종하는 오직 복음을 위해서 사는 바울에게 로마로 보내는 과정은 너무나 힘겹고 어려운 여행이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결국 바울은 자신의 육신적 삶을 늙도록 살지 못하고 참수형으로 로마에서 생애를 마무리 하는 것을 보면 주님을 따름이 육신적으로 반드시 형통한 것은 아니었음을 바울에게서도 본다. 그러나 바울의 확신은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서 읽을 수가 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딤후4:7~8f)

과연 죽음을 앞두고 이만한 확신에 찬 기대를 무덤너머에 가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보면 바울은 과연 하늘의 사람임에 분명하다. 오늘 우리 각자가 죽음을 앞에 두고 있다면 이만한 확신으로 그 죽음을 환영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볼 일이다.

결국 인생의 가치는 삶의 길이보다 질에 있다는 사실을 바울 사도에게 배우면서 우리 모두도 이러한 확신으로 마지막을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에게 최종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정신병자 취급을 받은 바울은 가이사에게 상소한 사실과 총독도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왕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결국 로마로 보내지게 되고 마침내 로마 행이 작정되어서 행선을 시작하게 되는데 바울이 어떤 기대를 로마로 가는 길에 가졌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를 죄수들과 함께 죄수로 가게 한다.



Ⅰ. 바울의 로마로 가는 길이 시작되었다.(1~8)

앞에서도 우리는 바울이 이달리아 즉, 로마로 가고자 했던 신앙적 고백을 여러 곳에서 들은바 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로 가고자 했던 것은 세계의 통치자가 있는 여러 나라의 수도의 위용이나 관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일편단심 세계의 중심에서부터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오직 한가지의 일념에서 로마를 보고자 했다.

그런데도 그의 가는 길은 하나님이 아실지 모르나 인간적으로는 초라하고 안타깝다. 마치 욥이 당한 자신의 고백과 같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바울은 로마로 가는 이 길의 초라함도 불평이 없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심정을 알아 주시리라 믿고 내키지 않을 모습을 그대로 받아 들인다.

그의 일행은 “다른 죄수 몇 사람”으로 결국 자신도 죄수 취급을 당하며 죄수들과 함께 가고 있는 것이고, 그를 인솔해 가는 사람도 천부장이 아닌 총독이나 각 나라의 왕과 가이사의 사이에 연락병 역할을 하는 “아구사도대의 백부장”이었다.

타고 갈 배 역시 로마로 직항하는 여객선이 아니라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 즉 각 섬들을 거쳐가는 화물선과 다름이 없는 배였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누가와 아리스다고(몬24; 골4:10) 두 사람이 함께 하는 것이 격려가 되었을 것이고 이들은 로마의 감옥 속에서 보낸 편지들에 기록되는 것을 보면 끝까지 바울과 喜怒哀樂을 함께 한 것으로 보인다.

로마에서 어떤 결과가 있을지도 모르고 또 지루한 뱃길 여행가운데서 배가 대는 곳의 성도들과의 교제는 바울에게 큰 위안이었을 것으로 마치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가는 우리에게 성도 상호간의 격려가 힘이 되듯이 바울은 교제를 통해서 큰 위안과 소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또 백부장 [율리오] 라는 사람이 바울에게 대단히 우호적이어서 아시안의 대는 항구마다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받음을 허락” 한 것이었다. 특히 여기 3절의 [친구] 라는 명칭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다른 이름이었다는 이해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근거는 요삼1:15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각 친구 명하에 문안하라”

결국 큰 바다를 건널 수 없는 작은 배였기 때문에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성에”서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에 오르게 된다. 알렉산드리아는 애굽의 북부도시로 주로 애굽의 곡물을 로마로 실어 나르는 비교적 큰 배였고 이런 배들은 알렉산드라에서 이탈리아로 곧바로 가는 위험 보다는 조금은 육지 쪽으로 붙어서 아시아의 최남단 항구인 [무라] 항구를 중간 기착지로 삼았다고 한다.

바람으로 가는 배는 바람이 맞지 않아서 계속 소아시아 밑인 니도까지 육지를 따라서 돌아가다가 밑의 그레데 섬으로 내려와 섬의 남쪽 항인 [미항]이라는데 겨우 닻을 내리게 된다.

복음을 품고 이탈리아 즉, 로마로 가는 바울에게 바다길 조차도 시작부터 순탄치 못했다. 그런 기간이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적어도 보름 정도의 시간이 걸렸을 것으로 학자들은 짐작한다. 지금처럼 기관으로 가지 않는 큰 배는 바람에 의해서 움직이기 때문에 더욱 하늘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항해가 되었고 그 지루함 속에서도 보필하는 누가와 아리스다고 그리고 항구마다 같은 믿음으로 바울을 맞는 그리스도인들이 큰 위로와 힘이 되었던 것처럼 오늘도 교회라는 배에 올라 천국을 향해가는 믿음의 항해 속에서 서로 서로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되는 서면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들이 되시기를 …



Ⅱ. 언제 어디에서나 세상은 힘있는 사람들의 말이 호소력을 가진다.(9~13)

유대인들의 금식하는 절기는 요즘으로 치면 10월초에 해당하는 때였고 이때는 이탈리아 쪽으로는 뒷 바람이 부는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바다 여행에 익숙한 바울은[고후11:25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행을 계속하는 것이 어려움을 가져올 수 있음을 알고 이들에게 조언을 하면서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10)고 경계를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모든 조건과 사람들은 바울의 이러한 경계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지금 이 배를 움직일 수 있는 명령권은 백부장이 가지고 있었고 백부장의 입장에서도 로마에 가서 재판을 받을 바울이 가는 것을 미루는 것 자체도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오늘 날에도 신앙적인 입장에서 의견을 할 수 없는 세상 사람들이라면 다른 생각 없이 이 백부장의 모습을 따를 것이다.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11) 당연히 바울보다 항해에 더 경험이 많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신뢰하는 것은 백부장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아무리 믿음으로 호소하고 부르짖을 지라도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믿을 것이라는 사실에 우리가 실망할 필요가 없다. 세상이 그런 판단이나 선택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에 금융에 관한 의견을 듣는다면 당연히 조경만 지점장의 말을 들어야지 이종배의 말을 듣는 것은 사실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같은 섬이지만 로마 쪽에 가깝고 항만이 클 뿐 아니라 지형적으로 더 안전해 보이고 조금만 더 가면 되기 때문에 [뵈닉스(Phoenix)=감람나무] 그레데의 서쪽 항구인 그곳에서 겨울을 지내는 것이 더 좋다는 의견에 백부장은 움직이기로 한다.

아름다운 항구라는 이 [칼루스 리메나스(Kalous Limenas)]는 항만이 적고 많은 인원이 머물 수 있는 숙소를 찾는데도 쉽지 않아서 겨울을 지내기에 사실적으로 적절치 못한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상황은 더욱 백부장 쪽으로 힘을 실어주는 일이 나타났다.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행선하더니”(13) 돛에 바람을 가득히 싣고 항해할 수 있는 남풍이 적절히 불기 시작한 것이다. 일이 잘 못 되려면 언제나 이런 조짐이 나타난다. 이럴 때 세상 사람들은 “하늘이 도왔다.”고 말할 것이다.

“득의한 줄 알고”[protheseos kekratekenai,-(prosthesis-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단의 진설 병), (krateo-의도하다, 보이다, 획득하다, 붙들다, 취하다)]

이는 마치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고 도망하려던 요나가 만난 상황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욘1:3)

그러나 시작할 때 형통은 의미가 없고 오히려 요나처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데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거역하려고 하는데 일이 형통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복이 아니라 저주임을 알아야 한다.



Ⅲ. 하나님의 말씀이나 종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결국 어려움을 당하고 만다.(14~20)

적어도 백부장을 비롯한 선주와 선장은 남풍이 순하게 불기 시작하자 “기회는 이 때다 몇 시간 안에 뵈닉스에 닫겠다. 저 바울이란 사람의 말을 들었더라면 어떻게 할 번 했어!” 라고 생각하며 닻을 감아 올렸지만 그들의 이러한 환상은 결코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14) 지구의 여러 해안 지역은 그 지형의 특성상 일어나서 육지로 올라오면서 큰 피해를 입히는 강풍들이 더러 있다. [유라굴로]는 지중해에 주로 일어나는 바람으로 이 바람을 만나면 바다 쪽으로 더욱 밀리면서 모래톱 같은 데를 만나면 아무리 큰 배라도 부서지고 말 정도의 지중해에서 만나고 싶지 않은 풍랑이라고 한다.

몇 시간 행선하지 않아 뵈닉스 항에 가서 편히 쉬리라 계산했던 백부장의 생각은 여지없이 풍랑을 맞고 만다.

이것도 어쩌면 요나의 상황과 너무나도 같다. “…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욘1:3b~4)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15) 이러한 표현은 사람의 힘에 의해서 배를 움직일 수 없는 비극적인 결과를 예상할 수 밖에 없는 것을 묘사한다.

미항에서 서쪽으로 65Km 떨어진 뵈닉스가 아닌 남쪽으로 약 35Km까지 떠밀리면서 배 뒤에 끌고 다녔던 구명보트를 마지막 상황을 위해서 배 위로 끌어 올리는데 그 표현이 “간신히(겨우)”이다. 배가 깨어질 것에 대한 대비로 줄로 배를 둘러 감고 유라굴로를 만나면 아프리카 쪽으로 배가 밀리다가 바다가운데 모래톱인 스르디스에 걸려 깨어질 것에 대한 염려로 돛도 배를 움직이는 모든 연장을 낮게 내리고 물결에 밀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아니하고 자신의 욕심과 정욕대로 가다가 만난 어려움을 묘사하는 것 같다. 그럴 때는 인간적인 모든 것을 내리고 최대의 겸손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할 것을 여기에서 배운다.

바울의 조언을 무시했던 저들은 결국 자신들의 모든 의지와 소망 조차도 내려놓고 만다.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①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②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18~19) 결국 그 배를 로마까지 운행하는 이유인 아프리카와 애굽으로부터 싣고 왔던 저들의 이익의 소망을 다 바다에 내려 놓고, 이제는 배를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도구들 조차 사공들의 손으로 버리고 만다.

이것은 이제 인간의 수단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이 배는 저들의 기술과 수완으로는 로마로 끌고 갈 수 없음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마는 것이다. 마치 홍수에 떠밀려가는 죽은 나무토막처럼 흘러가는 대로 부딪히는 대로 맡기고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들의 판단과 생각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위기를 만났을 때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20) 이제 이 배에 인간적인 기대와 소망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공동번역은 20절의 말미를 “마침내 우리는 살아 돌아갈 희망을 아주 잃고 말았다.”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당신의 역사를 시작하시는데 이유는 거기 하나님의 종 바울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손을 털 때 비로소 시작하시는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가운데서 홀연히 바울은 일어나서 절망에 빠져 목숨마저 포기해 버린 인생들을 권면하게 되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그러기 전까지 여기 표현대로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지는 데까지 이르기 전에는 그들의 뜻을 움직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으로 볼 때 어쩌면 모든 사람이 자신에 대해서 철저하게 절망하도록 하나님은 버려 두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되기 때문이다.

혹시 오늘 이 자리에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기술과 방법을 더 신뢰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실을 명심하시고 철저하게 자신을 부인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래야 살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