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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27:20~26 2009-09-20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소아시아의 남부 무라 성에서 알렉산드리아에서 이탈리아를 다니는 배에 바울 일행과 다른 죄수들을 옮겨 태운 백부장 율리오는 그레데의 동남쪽 항구인 미항에서 겨울을 지내고 다시 항해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바울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어서 뵈닉스항에 가서 겨울을 지낼 것을 결정한다.

처음 순풍을 만난 배는 얼마 가지 못하고 지중해의 고질적인 해풍인 유라굴라를 만나서 가려던 서쪽이 아니라 오히려 남쪽으로 떠밀려서 결국 배에 실었던 화물과 배를 운항하는 기구들 조차 다 바다에 버리고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배가 떠밀려 가는 대로 맡기지만 그러는 가운데도 스르디스 라는 모래톱에 배가 걸려 부서질까 두려워하는 저들의 모습을 지난 주에 봤다.

이제 구원의 기대 조차도 없는 캄캄한 바다 위에서 한숨과 탄식으로 힘겨워하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자신과 함께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선포하면서 사람들을 격려하는 바울의 모습을 오늘은 읽게 된다.

어쩌면 오늘의 이 성경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의 시대에 우리의 역할을 일러주는 그런 생각마저 들게 하는 비슷한 오늘의 시대와 상황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의 시대의 강한 도전을 준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바울같이 절망가운데서 분연히 일어나서 사람들을 향한 궁극적인 하나님의 구원의 소망과 의연함으로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소망을 끼칠 수 있는 이 말씀과 함께 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



Ⅰ. 인간적인 기대는 완전히 없어지고 절망적인 것들만 에워싸고 있었다.(20~21)

이 상황을 좀더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주 말씀의 마지막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18~19)

그리고 오늘 본문의 첫 절로 잡은 20절을 공동번역 말씀으로 보면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로 보이지 않고 태풍만이 거세게 불어 닥쳐서 마침내 우리는 살아 돌아갈 희망을 아주 잃고 말았다.”라고 기록되고 있는 내용을 본다. 그야말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하나같이 사라지고 완전히 이제는 절망으로 하얗게 질린 체념한 배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눈으로 보는 듯하다.

이제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만 “배가 언제 스르디스에 부딪혀서 깨어지고 몇 사람이 그 상황에서 죽고 나머지 사람들은 파도에 휩쓸려서 또 얼마나 끈질긴 생명과 싸우다 언제 바다 위에서 모두 죽을 것인가?” 라는 상상뿐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안타까운 상황을 간추려보면…

1.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였다.(20f) 날과 시간을 헤아리는 것도 그쳤다. 고통과 두려움의 시간은 1분이 여러 시간처럼 길게만 느껴지고 광명도 기대도 없었다.

2. 큰 풍랑이 그대로 있었다.(20m) 힘겨운 격양의 파도가 이제는 그들의 심장을 철석이며 죽음의 공포로 몰고 가고 있었다.

3.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다.(20b) 이제는 살아날 가망은 아무것에도 없었다. 이런 표현을 우리는 “이제는 생명 줄을 놓아버렸다.” 라고 표현한다. 살 수 있는 사람도 생명을 포기해버리면 더 이상 가망이 없다. 마치 죄로 인하여 이 역사의 한 사람도 살 수 없는 절망의 상태를 묘사하는 것 같다.

4. 오래 먹지 못하였다.(21) 심한 배멀미로 건강을 잃었다. 생명에 대한 애착이 있어야 ‘어쨌든지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한다.’고 하는 기대로 밥 숟가락을 드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이제는 오히려 ‘이왕 죽을 것 죽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라고 체념하는 분위기였을 것이다.

어쩌면 이 내용은 이 세상의 축소판이다. 돈을 벌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에서 화물을 싣고 로마 정부와 약간의 죄수들을 싣는 계약으로 이 배의 안전을 보장받고,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를 향해 출발해 보지만 과정 속에 만나는 것은 질병과 불황과 같은 파도와 싸우며 인생의 바다를 건너고 있는 우리 모두가 아닌가!

인생이 이것뿐이라면 참으로 불쌍할 수 밖에 없다.



Ⅱ. 하나님만이 위로할 수 있으시다.(22~23)

그러나 이 죄로 충만한 세상에도 역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있었던 것처럼 이러한 끝나버린 인생들이 즐비한 이 배 안에도 하나님은 그의 종을 두어 이들을 살리게 하신다. 아니 어쩌면 이 배를 탄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끌고 오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절망의 한가운데서 배에 탄 사람들을 격려하는 바울의 모습을 보면…

1. 절망에서 위로를 줄 수 있어야 생명이 있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22f)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25f) 조금이라도 기대되는 소망의 여지가 보인다면 이럴 수 있지만 이렇게 위로하는 바울이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미치광이였을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를 건너다 풍랑을 만난 제자들에게 바울은 비록 그 배에 없었지만 물위로 걸어오셔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27(마14:22~33) 하셨던 주님의 모습을 또 다시 보는 것 같아서 흥미롭다.

사실 우리 주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40:1) 위로는 사실 절망에 있는 사람에게 필요하고 왠만큼 상황이 좋은 사람에게 위로의 음성은 들리지 않는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고후1:3)

2. 절망 속에서도 나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셨다. “①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②어제 밤에 ③내 곁에 서서 말하되, ④바울아 두려워 말라”(23~24f) 어떤 위기 속에서도 그 위기를 넉넉히 극복할 수 있는 분이 함께 계시면 사실 견딜 만 하고 절망치 않을 것이다.

3. 나에게 말씀하셨다. “내 곁에 서서 말하되” ‘이 풍랑 이는 바다뿐만 아니라 이 우주를 만드신 분이 내 곁에 서서 말씀하셨다.’는 자신만만한 고백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바울과 같은 믿음을 가진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은 사자 굴에 던져지든 불 가마에 던져지든 겁날 것이 없는 것은 어떤 악조건 가운데도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삶을 산다. 우리 주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시기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b) 사실 이 약속 때문에 오늘 본문의 바울도 큰소리 칠 수 있었을 것이다.



Ⅲ. 하나님을 고백하고 소망을 제시한다.(24~26)

이제 바울은 주께서 자신에게 주신 확신을 좀더 구체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두려워 말라!” 하시는데 이 한마디 속에는 모든 약속이 다 들어있다. ①현재의 상황, ②옆의 사람들, ③가이사 앞에 서는 일, ④미래 등등 이 약속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늘 함께 했던 말씀이다.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하고”(신31:6) 이 약속은 동일하게 오늘 하나님을 순종하는 우리 모두의 확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에서도 바울은 소망을 제시한다. 마지막 절망에서는 소망만이 위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절대적 절망에서 소망은 사람에게서는 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만이 소망의 아버지시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15:13)

사람이 끝났다고 손을 털 때 하나님께서 그분의 역사를 시작하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사람들이 아직도 무엇엔가 기대를 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주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신다. 완전히 인간적으로는 바닥이 나버린 상태에서 하나님은 이제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온전히 주님만 남았을 때 역사를 시작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시다.

[(엘리야←왕상17:8~16-시돈 사르밧, 가루 한 웅큼, 기름 조금-그 후에 죽으리라); (엘리사←왕하4:1~7-과부의 한 병 기름)]

사람은 진정한 위로를 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위로하는 말은 “당신은 나와 같은 입장이 아니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위로를 거부한다. 하나님께서만이 진정한 위로자가 되신다.

1. 말씀대로 될 것이다.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우리는 오늘 사람들 앞에서 같은 믿음으로 이 역사의 마지막과 주님의 다시 오심의 소망을 고백할 수 있어야만 한다.

2. 함께 행선하는 사람들을 다 내게 주셨다. 이것은 참으로 대담한 고백이다.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24) 지금의 현실적인 상황은 어쨌거나 바울이 죄수의 형태로 백부장에게 로마로 끌려 가고 있는 형편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미항에서도 백부장은 이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24) 라는 선언은 사람들의 보기에는 정말 주제넘은 말로 들렸을 것이다. 선주도 선장도 백부장도 다 자신의 수하에 둔다는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3. 구체적으로 미래를 제시한다.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당시의 상황에서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22m) 스르디스에 걸려서 배는 깨워지고 사람들은 다 죽을까 봐 두려워하는 선원들 앞에서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26)라는 말들은 확신을 주지 못하는 가운데 하는 말이라면 이것은 미치광이의 광기 어린 말로 들릴 수 있었을 것임에도 사람들은 오히려 이 말을 듣고 안심하고 순종하는 모습을 연이어 보게 된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서 같은 모습으로 복음을 전할 때 역시 바울과 같은 확신과 자세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주님의 재림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바울과 같은 믿음만 있다면 현재의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상황은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모든 것이 절망의 형편일 때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을 깊이 생각해 보고 창조주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위로의 주님 이시다. 그것은 세상의 없어질 것으로 위로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가지고 위로하시는 소망의 하나님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의 죄에 고통 하는 절망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는 위로가 되고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 십자가로 가련한 영혼들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이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1:3~5)

위로에서 끝내는 하나님이 아니라 소망을 제시 한다. 비록 사람이 범죄했지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여기서 끝내지 않으신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24)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에서 끝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아멘!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부르시고 순종할 것을 당부하시는 것이다. 에스겔33:11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18:31~32)

하나님은 우리가 절망을 이기고 살기를 원하시고 또 우리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살기를 원하신다. 믿으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