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행 27:27~44 2009-09-27
마침내 사람들이 다 구원을 얻으니라!  
몇 일씩 해와 별이 보이지 않는 바람이 자지 않는 바다 한가운데서 사람들은 살아 돌아가리라는 기대조차도 잃어버리고, 먹지 못하고 절망으로 가득한 가운데 일어나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확신하면서 저들을 격려하며 소망을 주던 바울을 우리는 지난 주에 봤다. 일반적으로 이 지역에서

는 수일간 계속되는 태풍 때문에 11-3월 사이에는 항해를 하지 않는다고 전한다.

어떤 인간적인 기대도 남아 있지 못한 상황에서 당시로서는 항상 이 바다를 항해하던 선장이나 선원들은 물론 선주조차도 이제 완전히 포기해 버린 상황에서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생명도 결코 잃지 않으리라고 자신에게 말씀해 주신 주님의 약속은 반드시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확신한다고 인간적으로 볼 때는 참으로 무모한 선언을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인간적 판단이나 지식에서 이렇게 선언한 것이 아니고, 자신이 속하여 섬기는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해 주셨기 때문에 의심이나 두려움 없이 그러한 내용을 선포했다.

많은 사람들은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 증거한 말은 하나님이 책임을 지신다.” 라는 말들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말을 더 바르게 이해하려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앞뒤 전후 좌우를 보시고 아시기 때문에 자신의 종들을 통해서 이렇게 담대히 말씀을 전하게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종이 선포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책임지시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사뭇 허망하게 들릴 수 있는 바울을 통한 선언을 그대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를 오늘 우리가 읽게 된다. 사실 세상이나 상황에서 가능성이 보이는 것을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희망이거나 기대일 뿐이지 믿음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 라고 말하는 것이다.

한치 앞길도 안보일정도로 어둡고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불확실한 가운데서 사람의 판단이 서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것을 믿고 의지하고 묵묵히 나아가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고, 또 어리석으리만큼 순진하게 말씀을 의지하고 나아가는 그것이 바로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의 역사를 불러올 수 있는 믿음이다. 믿습니까?



Ⅰ. 바울의 예언은 현실이 되어가기 시작한다.(27~32)

미항을 출발한 후 몇 시간 후면 뵈닉스 항구에 다다르리라고 했던 저들의 기대는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고 남서쪽으로 떠밀리기를 무려 두주 동안이나 바람과 물결에 밀려 다녔다.

당시에 이탈리아, 아프리카, 그레비 섬, 그리스 사이의 바다를 아드리아 바다라고 가리켰다. 정확한 방향이나 위치를 완전히 잃어버린 선원들은 얼마나 힘겨웠던지 자신들이 어디쯤에 와 있는 것조차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 있었고, 오히려 저들이 보기에는 로마의 법정에 서기 위하여 함께 배를 탄 항해전문가도 아닌 바울이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26)했던 우수게 소리 같았던 사실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분명히 육지에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고 깊이를 재 보니 점점 육지로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볼 수가 있었던 것은 물의 깊이가[헬, 오레고마이(oregomai), 중지에서 중지를 펼친] 36m 에서 또 조금 지나서는 27m로 얕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걱정이 되는 것은 암초나 모래톱에 걸리면 배는 일시에 좌초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고물 즉 배의 후미에다 닻을 4개나 내리고 그 밤이 지나기를 기다린다. 본래 배들이 항구에 정박할 때는 비교적 얕은 고물을 가로 들이대기 위하여 배를 돌려서 이물에 닻을 주고 뒤로 들어가는 것이 보통이지만 당시에는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런 상황이 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도 그 밤중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공들이 자신들만 살아남고자 하는 욕망을 여지없이 드러내다가 영혼의 사람 바울에게 들키고 만다.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주려는 체하고 거루를 바다에 내려놓거늘”(30)

앞의 16~17절에서 간신히 물에서 거루를 끌어 올려 놨던 것을 닻을 주려는 체 하면서 이물에 내려서 도망하고자 한다. 사공들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지긋지긋한 상황에서 도망하고자 사공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사실 세상 죽음의 자리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더 많다. 죽어가는 사람도 그대로 버려두거나, 남들이야 어떻게 되든 나는 살아야겠다는 몰인정한 행동이다.

이것을 바울이 어떻게 알았든지 제제하고 나선다. “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31) 사실 이 큰 배는 아무나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노련한 숙련공만이 막다른 상황에서도 대처할 수 있고 피해를 줄이고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사공들이 끝까지 함께 있어야 함을 아는 바울로서는 말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백부장을 비롯한 군인들은 바울같이 민첩하지는 못하게 이 문제를 처리 한다. “이에 군사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32) 나중에 얕은 해변에 사람들이 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거룻배이만 그것을 급한 나머지 바다에다 끊어버리므로 일을 그르치고 마는 것이 바울의 말을 생각없이 따른 군인들이었다.

사실 이일 때문에 나중에 군인들은 바울을 비롯한 죄수들을 모두 죽이려고 까지 하는 것을 볼 수 있다.(42~43)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입으로 나온 말씀은 헛되이 메아리 치지 않고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55:11) 약속되고 있는 것이다.



Ⅱ.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고 약속한다.(33~37)

고물로 닻을 넷을 준 체 기다리는 긴 밤은 마침내 하얗게 새어가고, 다시 그들에게 바울이 격려와 음식 먹을 것을 권면한다. 다음에 있어질 배에서의 탈출은 실제로 음식을 먹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43~44) 체력 소모가 가장 심한 곳은 사실 물에서의 움직임이라고 한다.

물론 이들이 거의 보름 동안을 전혀 음식을 입에 대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야말로 살기 위해서 억지로 곡기를 먹었을 것이고, 제대로 된 식사를 먹지 못한 것이 분명한 이유는 만약에 폭풍우 속에서 전혀 먹지 않고 14일을 버텼다면 상했을 사람들도 더러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음식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34f) 구원을 얻기 위해서 음식을 먹고 힘을 내라고 당부하는데,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는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신령한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의 양식을 먹으라 권하는 것으로 들린다.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34b) 이러한 표현은 구약 때부터 전해져 온 하나님의 완벽한 구원과 보호의 표현이다.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사하였음이니이다…”(삼상14:45; 왕상1:52)

주님께서도 이러한 표현을 쓰신바 있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눅12:7)

이와 같이 바울의 안전에 대한 자신 있는 증거가 실제적으로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불안을 없애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을 이어지는 내용 속에서 확신할 수 있다.

“떡을 가져다가 ①모든 사람 앞에서 ②하나님께 축사하고 ③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④저희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35~36) 절망 속에 있던 276명의 사람들이 신분이나 입장에 관계없이 바울의 권면에 위로를 받고, 순순히 그를 따르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의 위력이다.

사실 이 [지구호, 부산광역시] 라는 배에는 다가올 미래의 불확실과 공포로 인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안해 하고 있고 이들에게 소망과 격려를 줄 수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울과 같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임을 알아야 한다.



Ⅲ. 마침내 말씀대로 이루어졌다.(38~44)

먹지 못하여 힘을 잃었던 사람들은 바울의 권면과 격려에 힘입어 밝아오는 아침을 소망으로 맞으면서 차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도 믿음으로 다가가는 것을 보게 된다. “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38) 이미 앞에서 18절 말미에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라는 기록이 있었지만 그 때도 곡식까지 다 버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되도록 옅은 해안가까이 접근하기 위해서는 최대한으로 배를 가볍게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배 안의 무게가 나갈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버리는 것만이 사람들이 육지에 나아가는데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선원들이 도망치려고 몰래 내렸던 거룻배라도 있었더라면 몇 번에 걸쳐서 육지와 왕래하며 상륙을 할 수 있었겠지만 성미 급한 군인들은 뒷일을 생각지도 못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끊어 버린 것이 이제야 후회가 되었을 것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결국 바울의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2)는 예언은 점점 현실이 되어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밤인지 낮인지 하늘이 보이지 않던 일기는 그래도 아침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낳아 졌고 “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거늘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한 후”(39) 사공들 조차도 자신들의 위치 파악이 안되고 있는 모습을 누가는 단적으로 독자들에게 전달해 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바울의 사공들을 도망하지 못하게 한 당부가 효력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하게 되고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Ω킷줄을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을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40) 즉, 바다에서 지탱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인 닻조차도 바다에 버림으로써 더 이상은 자신들의 수완과 기술에 의지하지 않고 이제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바울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18),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19)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고”(38) 이제는 닻을 바다에 끊어 버림으로써 사람을 제외한 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리라 예언한 바울의 말(22)이 다르지 않음이 이루어지고 말았다.

배의 이물이 물이 소용돌이 치는 곳에 걸려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고물은 바다 쪽에서 계속 밀려 닥치는 파도에 깨어져 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리에 배가 서고 말았다.(41)

그러나 위기는 여기에서 또 한번 하나님의 사람 바울과 같은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죄수들에게 생명의 위협으로 다가오게 된다. “군사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저희를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42) 로마의 군인들은 중한 죄수를 놓지게 되면 그 죄수가 당할 형벌을 자신이 당해야 하기 때문에 죄수를 놓지는 것보다는 죽이기로 생각한 것은 어쩌면 저들의 가장 현명한 판단이었을 것이다.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쇼생크 탈출” 같은 죄수들이 간수들을 제압하고 탈옥하는 이야기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이야기들이었고, 사실 당시 억울한 이유로 재판을 받고 죽는 일이 많았던 로마 시대에는 더러 죄수들의 폭동은 우려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될 경우에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할 바울도 죽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대로 두실 수가 없으셨다.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저희의 뜻을 막고…”(43f) 사실 아시아를 두루 다니는 배를 탔을 때도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에게 대단히 친절한 사람이었음을 3절에서도 본바 있다.

이번에도 많은 죄수들보다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저희의 뜻을 막…”았다. 이것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백부장의 마음을 움직이신 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은 바울에게 가이사 앞에 서야 한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에 여기서 죽을 경우는 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질 수 없을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러실 리 없다.

하나님은 많은 죄수들 때문에 바울을 죽게 하실 수 없으셨고 오히려 바울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죄수들과 배의 사람들을 모두 살리셨다.(24) 그렇기 때문에 바울로 인해 다른 죄수들도 죽음을 면했다고 볼 수 있다. 백부장이 바울을 살리려 한 것은, 바울이 믿고 있는 신앙의 능력에 대해 큰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43b~44) 최고의 아량이 베풀어졌다. 이것은 사실 군인들의 아량은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군인들을 그렇게 움직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역사였다. 앞에서 예를 들었던 대로 죄수들이 이렇게 됐을 경우 죄수들이 영원히 재판 없이 자유 하기 위하여 난을 부릴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수들을 다 죽이려 하는 군인들의 마음도 감동하셨고 또 죄수들의 마음도 감동하셔서 당시의 상황에서 바울로 통해서 하신 말씀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

바울의 예언 후에도 얼마 동안 그의 말한 것이 이루어지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한번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일을 착착 진행시키시고 계셨다. 하나님께서 예언 하신 일은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전혀 상황은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았지만 바울은 자신이 말한 것을 확인시키면서 음식을 먹게 하고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고 과거부터 말씀해 왔던 하나님의 표현을 빌어 안심시켰다.

그 마지막 밤이 끝나면서 허무맹랑할 것 같던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어져서 육지에 닿게 되고 상륙에서 모든 죄수들을 죽이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를 확실히 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군인들을 감동시켜서 죽이지 못하게 하시고 또 죄수들을 감동하셔서 폭동도 잃어나지 않게 하심으로 마침내 모든 사람 배에 있던 276명 모두가 구원을 얻으리라 던 말씀을 확증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를 모두에게 이루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는 이 역사의 마지막에도 우리가 바울과 같은 믿음을 가졌다면 역시 같은 역사를 우리의 시대와 상황에 이루실 것이다. 믿으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