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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28:11~22 2009-10-11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매인 바 되었노라!  
바울은 에베소 전도를 하면서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19:21)는 바램과 이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는 로마로 가는 뱃전의 풍랑가운데서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행27:24)는 응답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지루하고 긴 풍랑 속의 칠흑 같은 어두움을 견뎌 나왔고, 이제는 그 긴 여정이 끝을 보이면서 바울은 세계의 중심인 로마로 들어서게 되는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된다.

어떤 경우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왜 그렇게 더디도록 외면하시는 것처럼 오해하도록 버려두시는가 안타까울 때가 많고 “이 일만 좀 잘 넘기게 해 주시면 다 잘될 것 같은 데 …”라고 힘들어 하면서 생각대로 안 되는 일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우리의 바램이나 기도의 응답은 우리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때와 시간 속에 이루어 지는 것이고, 일의 되어 감 조차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보다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계획대로 될 때 오히려 최종적으로는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고 우리에게도 진정한 기쁨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헤아린다면 이런 일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언제나 하나님의 시간이 사람들의 기준에서 보기에는 더디 갈 뿐임으로 기도하고 바라는 것 조차도 신앙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기다리는 자세가 바른 믿음임을 알아야 한다.

이제 바울은 어쨌거나 설레는 마음으로 로마로 들어서고 언제나처럼 그의 로마에서도 첫 번째 관심의 대상은 자신의 유대인들이었고 그들을 청하여 자신의 입장과 복음을 전하지만 그의 모든 전도여행에서처럼 역시 그들은 그다지 기대할 수 있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오늘 우리가 주님께 쓰임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위대한 신앙의 사람 바울을 보면서 우리의 상황을 믿음으로 바로 이해하고 인간적인 다급함이나 주님의 뜻이나 말씀을 넘어서는 지나침이 없어야 할 것이다.



Ⅰ. 로마로 가는 마지막 행로.(11~15)

멜리데 섬에서 추장의 아버지를 비롯한 섬사람들을 기적적으로 치료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낸 바울 일행의 나머지 행적은 기록되고 있지 않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바울의 이러한 행동들은 이후에 있게 될 로마에서의 남은 행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풍랑으로 떠밀려서 이 멜리데 섬에 온 바울 일행이 타고 와서 깨어져 버린 배와는 다르게 이곳에서 겨울을 난 배가 있었음을 누가는 기록하고 있다. 역시 바울 일행이 멜리데에 들어온 후에도 같은 알렉산드리아에서 화물을 싣고 로마로 가는 배도 지중해의 풍랑이 자주 이는 기간인 겨울 동안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석 달 동안을 풍랑의 시기를 지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누가는 특이하게 이 배의 이름이자 형태를 언급하고 있는데 폭풍 가운데서도 안전하게 지켜주는 항해의 수호신으로 여겨져서 이 배의 이물 양쪽에 ‘디오스구로’ 라는 쌍둥이 모양이 새겨져 있거나 그려져 있었고 배 이름으로도 씌어져서 당시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사람이 만든 신에게 자신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쓴 것 같다.

결국 시실리 섬의 동남쪽 항구인 수라구사를 거쳐서 이탈리아 반도의 남쪽 끝인 레기온에 남풍을 의지하여 로마를 220Km 앞둔 보디올에 이르고 믿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일주일을 지내며 신앙의 교훈을 나눈 것 같고 그런 후에 다시 로마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앞비오 광장에 이르자 여기서부터 그리스도인들의 환영을 받게 되는데 이 앞비오 광장이야말로 로마의 가장 유서 깊은 로마의 출입구이고 예전에 다른 나라들을 토벌하고 많은 전공을 세운 장군들이 로마로 개선하게 되면 이 앞비오 광장에서 수많은 군중들이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펼치는 곳이었다고 한다.

이것도 사실 바울에게 깊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을 것이다. 바울은 세상의 나라들을 쳐부수고 큰 전과를 올린 장군은 아니지만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이 세계의 중심에 당당히 입성하는 영혼의 장군이기 때문에… 비록 환호성 치는 큰 군중의 환영은 없었지만 아직 얼굴도 모르는 믿음의 형제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기에 합당한 하늘의 장성이었고, 미래에 하늘의 영광스러운 주님과 천사들의 환영을 바울은 믿음의 눈으로 보면서 주님의 큰 격려를 받았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우리말로 삼관[三館≒왜관(倭館)]으로 번역되고 있는 [헬, 트리온 타베르논(trion tabernon),  3개의 목조건물, 여인숙] 마을이 로마로부터 50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인데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아피오 광장과 이 “3개의 숙소”라는 이름을 가진 곳까지 바울을 환영하기 위해 환영 나왔던 것으로 이 역시 하나님의 섭리요 사랑이었기 때문에 영적인 눈을 가진 바울이었으므로 “…바울이 저희를 보고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15)는 누가의 기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원하고 약속하신 것을 결국 전혀 불가능할 것 같은 어려움을 겪고서야 이루시면서 세상으로서는 기대할 수 없는 격려와 위로를 주신다. 이것은 세상에 믿음 생활하는 우리들에게도 같은 믿음을 가졌다면 역시 같을 것이다.

우리는 때로는 세상이나 사람들로부터 위로를 얻지 못하고 낙심하고 절망할 정도까지의 비참한 어려움을 경험할지라도 바울과 같은 믿음만 가졌다면 하나님은 생각지 못할 격려와 위로를 주실 것이고, 이 세상에서 그것을 받지 못한다면 그만큼 하늘에 입성할 때 더욱더 영광스러움을 입을 것이다.

이러 이유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8)고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믿으시기를 …



Ⅱ. 로마에서의 바울.(16~19)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갔지만 감옥에 갇힌 것 같지 않은 어느 정도의 자유를 누리게 되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바울을 로마로 불러들인 우리 주님의 권능과 뜻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16)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한 군사에게 지킴을 받는 것은 감옥에 갇히는 것보다 훨씬 가벼운 형벌이고 이렇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앞에서 일어난 일들이 작용했을 것이다.

베스도 총독의 좋은 평판으로 꾸며진 조서는 물론이고 난파하여 모든 죄수들을 죽이거나 놓질 뻔 한 상황에서 기여한 바울의 난파선위에서의 역할과 멜리데 섬에서의 역할을 이제껏 지켜봤던 율리오 라는 백부장의 증언 등등도 분명히 바울을 로마의 시위대 안에 인계하면서 긍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바울을 가둬놓기 위해서 로마로 오게 한 것이 아니라 철옹성 같이 정신무장이 되어 있는 로마의 시위대안에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 그 파란만장한 과정을 거쳐서 바울을 로마로 불러들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이루시기 위한 도구로 부르신 것이 분명한 이상 바울을 주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실 것이다.

이런 사실을 바울은 나중에 빌립보 교회에 편지에 직접 기록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빌1:12~13) 이런 이유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때로 부정적인 일을 겪는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신뢰하는 이상 당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믿습니까?

바울은 3일 후부터 그 일을 시작하는데 먼저는 자기 동족인 유대인들을 불러들여 행여 있었을 오해를 먼저 풀고 저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를 원해서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인 후에 이르되…”(17) 라고 말을 시작한다.

먼저는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규모를 배척한 일이 없는데”(17m) 라는 율법 준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오해할 수 있을 것에 대한 변호를 시작하고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 준 바 되었으니”(17b) 라는 말은, 사실에 있어서는 동족이 죽이려고 하는 것을 로마의 천부장이 구원해 낸 사실을 저들의 마음을 상하지 않기 위해서 돌려 말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놓으려 하였으나”(18) 이것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에 비교되는 입장이었음을 말하지만 사실 가이사랴에서 있었던 재판을 회상하는 것처럼 들린다.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호소 함이요…”(19) 자신의 아픈 경험을 호소하면서도 되도록이면 복음을 받아들여야 할 저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표현들을 찾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 표현이다.

“…내 민족을 송사하려는 것이 아니로라”(19b) 이것은 적어도 바울이 언제나 말하는 대로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고백이요 탄식이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13:46)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먼저 성경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그들을 청했고 혹 있었을 오해를 풀고 복음을 전하고자 최선을 다한다. 이제 이들에 대한 자신의 변호와 이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은 다음 내용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Ⅲ. 로마의 유대인들에게 자기 변호.(20~22)

바울은 먼저 유대인들을 청한 이유를 시작한다. “이러하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20) 바울 사도는 어떤 사람이든지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장애를 일으키는 요소들을 제하려고 애썼고 누구를 만나든지 육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는데 언제나 인간적인 오해나 걸림이 되는 것들을 최대한 제하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 이것 또한 분명히 자기 변명이 아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육신적인 구속이 이스라엘 사람이면 누구나 그러하듯이 하나님의 약속을 위해서임을 증거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20b) 이것은 동일하게 영적인 이스라엘의 소망 즉 모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는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고백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이미 앞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같은 고백들을 한 바 있다.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23:6)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24:15)

여러분들은 복음을 위해서 원치 않는 것을 하거나 매일 수 있는가? 즉, 자유도 손해도 감당할 수 있는가? 바울과 같은 믿음을 가졌다면 우리 고백도 역시 같아야 하고 그래야 같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의 우려하는 바와는 의외로 로마의 유대인들은 “저희가 가로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고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21)고 일러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족들을 향한 이 복음의 호소는 여기서도 역시 큰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부정적인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는 것을 다음 주 말씀에서 보게 된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24~25)

그러나 그 중에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노니 이 파[헬, 하이레시스(hairesis), 잘못된 견해, 어떤 의견을 고집하는 자들, 분파, 이단(영어의 음역이 그대로 쓰인다.-heresy)]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22)는 어디서나 거절되는 이단 취급을 받는 이유를 알고 싶다는 자세였다. 사실 이런 자세로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거절하는 사람이 많음을 역시 뒤에서 보게 된다.

마침내 바울의 비전과 소망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 이 시대에 쉽게 말하는 비전과는 다른 것이었다. 참으로 주님께서 보여 주신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어떤 난관도 뚫고 그 주님께서 보여주신 것을 잡기 위해서 생명도 바칠 수 있을 때 그 보여주신 비전은 보고 듣고 확인할 수 있는 현실이 될 수 있다.

이런 난관과 손해와 죽을 고통까지도 감수한 바울에게는 로마에 들어서면서부터 영혼의 장군으로서 앞비오 광장을 들어서고 위로와 격려를 얻으면서 주님의 배려로 비교적 자유롭게 또 다른 동족을 향한 복음증거를 시작할 수 있었고 세계의 중심 사역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바울은 자신의 동족 앞에서도 자신의 무죄를 부르짖는 자기변호를 하지 않는다. 최대한으로 복음을 뿌릴 밭으로서의 저들의 마음을 상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하려고 최선을 다 한다. 그러면서도 결과에 대해서 연연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께 맡긴다. 그것은 성령을 의지하여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바울의 이러한 자세는 영원한 언약의 소망을 위한 것이었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희생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역사와 거기에 철저하게 순복 하는 성령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세계의 중심 속에 그 성령과 함께 들어갈 수 있었다.

오늘도 결과는 우리의 능력에 있지 않다. 성령과 함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만을 최선의 순종으로 감당한다면 바울에게 주신 승리와 영광과 같이 자기를 위해서 수고한 것을 갚아주시기 위해서, 상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주님께서 이 세상의 영광과 존귀에 비교될 수 없는 것으로 갚으실 것이다. 믿으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