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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28:23~31 2009-10-18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바울의 로마에서 사람들과 나눈 것은 이 사도행전의 주제요 성령으로 권능을 받은 자들이 해야 할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23)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31)

비록 성과가 있건 없건 하나님 나라의 증거는 세례 요한과 주님께서 직접 외치셨던 첫 선포의 주제였었다.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마3:1~2);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마4:17)

이것은 변화무쌍한 이 세상과 반대되는 영원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귀중한 과제이다. 아무리 공의의 통치를 바래도 실현 불가능하고 계속되는 인간의 한계를 인하여 탄식하고 절망하는 이 세상의 비극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이 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천국이다. 주님께서 산상보훈에서 이러한 것을 기다리며 탄식하는 “애통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 말씀하셨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일은 하나이다. 마지막 추수 때에 비교되는 알곡을 추수하여 곡간에 들이는 일이 천국의 일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이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데서 같은 목적임을 배우게 된다.

그럼에도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초청이요 은혜의 역사를 모든 사람이 다 받아들이지 않는 것 역시 역사를 지속하면서 계속되는 사람들의 반응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이미 받고도 그 율법을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인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해 버리는 일이야 말로 비극 중에 비극이다.

차라리 몰랐다면 낳을 뻔 한 사람들로 예수께서 표현 하신 대로 가룟 유다를 향하여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26:24; 막14:21) 는 탄식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귀한 복인데 그 굴러온 복을 차버리는 사람들은 오히려 알지 못함이 낳을 것이라는 입장에서도 오늘 날에도 다르지 않다. 차라리 몰랐더라면…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겠지만… 알고도 잃어버리는 안타까움이 우리 모두에게는 없기를…



Ⅰ. 로마에서의 복음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23~25)

앞에서 봤던 대로 적어도 유대에서는 바울에 대한 비판적인 전갈이 없어서 사람들이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부정적인 선입견 없이 듣게 된 것이 로마의 유대인들에게는 사실 대단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어떤 선입견은 은혜를 가로막게 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바울에 대한 부정적인 말들이 로마에 까지 전해졌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는가!

그래서 저들은 날짜를 정하고 바울의 거처하는 집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올 수 있었고, 바울은 이들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 즉, 영생의 약속을 증거하고 강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이미 저들이 잘 알고 있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을 가지고 예수의 일을 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직접 말씀하셨지만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즉, 성경은 메시야의 오심과 그를 통한 예언의 성취였지만 그 약속의 결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고 이해할 수 없어서 거부했던 것이 사실이다.

사실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나라이고 그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났고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확증되었고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라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증거와 가르침의 핵심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기대해 왔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약속 그대로가 아니라 자신들 나름대로 민족주의적이고 정치적으로 바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통해 보여지고 증거된 영생에 관한 것과는 이미 상당히 달랐고 때문에 저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었다.

이미 저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야 관이 다른 것이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바울은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헬, 페이도(peitho), (참이나 거짓을) 설득시키다.]” 는 낱말에서도 이해할 수가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울은 저들에게 익숙한 율법과 선지자들의 말을 통해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했지만 그 결과는 여전히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24)라고 했지만 이어지는 내용이나 바울이 인용하는 말씀을 볼 때 분명이 비판적인 사람들이 더 많았던 것 같고 이런 일은 이 사도행전 속에서 처음이 아니었다.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14:4)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17:5)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 하거늘…”(19:9) 언제나 택함 받았다고 하는 저들은 복음에는 반대편에 서는 자들이 더 많았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안타까운 일조차도 자신의 판단보다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해답을 찾고 소화함으로 그리스도의 일꾼다운 모습을 잃지 않는다.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25)

이런 부정적인 말씀으로 위로를 삼으면서 바울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생각해 본다. 죄수의 모습으로 로마에까지 와서 구원의 진리를 전하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드리지 못하고 팽개치는 저들의 좁은 소견과 영혼을 탄식하는 것이다.



Ⅱ. 선지자를 통한 예언의 부정적인 응답.(26~29)

바울이 안타까움으로 예언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신다고 해도 백성들은 이미 거절할 것이기 대문에 절망할 필요가 없음을 말씀하신 내용이다.

본래의 내용을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6:9~10)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이미 다른 소리에 귀를 쓰고 있으면 어떤 말을 할지라도 들려지지 않는다. 그런 경우에는 많이 들어도 소용이 없고 간절한 호소도 쓸데 없다. 혹시 오늘 우리가 세상의 좋은 것들에 귀가 팔려서 하나님의 생명의 교훈을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면 탄식함으로 회개해야 할 것이다.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미 세상의 것이 영혼의 것을 백내장처럼 가리고 있다면 봐야 하는 것도 보이지 않는다. 눈이 가지만 건성으로 봐 넘기기 때문에 지혜를 주시는 말씀을 읽어봐도 깨달음은 없는 것이다.

특히 27절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라는 표현의 이사야 본문의 단어는 [헬, 샤만(shaman), 살찌다, 기름지다, 뚱뚱하다]라는 의미를 가지면서 영적인 것에 둔감해 지는 것에 대한 표현이다.

이러한 표현을 주님께서는 주님의 재림의 경계를 주시면서 사용하신 바 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21:34)고 경계를 주신 바 있다. 참으로 우리의 영혼이 세상의 것들로 비대해져서 영적인 판단이 둔하여진다면 탄식해야 할 것이다.

저들의 더욱 비극적인 상태는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27b)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하였다. 하물며 택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얼마나 바라시겠는가?

그러므로 이러한 표현은 요즘 얘기처럼 ‘행여 예수 귀신 씌일까’ 염려하는 것처럼 돌이켜 하나님께 붙잡힐까 봐 오히려 염려하는 저들의 완악함을 반대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내용이다. 분명 예전의 시인처럼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시73:28) 해야 할 것임에도 하나님께 바로 잡힐까 염려하는 완악함은 저들이 참으로 저주받기 위해 준비된 안타까움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비극적인 사실을 여기서 끝내지 않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 번져가게 되었다는 은혜로운 고백으로 이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28)

이러한 논리는 역시 로마서 11장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증거하고 있음을 듣는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역시 하나님의 구원진리에 둔감해지거나 은혜를 은혜로 소화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회개하고 약속한 생명을 넘치도록 누릴 수 있는 모두가 되시기를 …

그 다음에는 우리 성경에 난외 주로 처리된 부분이다. “And when he had said these words, the Jews departed, and had great reasoning among themselves.[KJV] 그가 이 말을 마쳤을 때에, 유대인들은 저희끼리 서로 많은 논쟁을 하면서 떠나갔다”(29) 세계 모든 사람들로 화평을 이루는 말씀을 듣고도 분쟁으로 나아감이 비극이었다.



Ⅲ. 하나님께서 로마에 마련하신 바울의 역할.(30~31)

(30)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이 사도행전을 쓰고 있는 누가는 결국 세계 중심인 로마에 가 있는 바울을 통하여 복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됨을 기록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유대인들의 증거가 불충분한 바울의 고발은 결국 자신들의 패소가 분명할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상관치 않았던 것 같고, 그러는 동안 바울은 온 이년 동안이나 감옥이 아닌 세로 얻은 집에서 복음에 관심을 갖고 바울을 찾는 무슨 일로든 로마에 머물거나 거쳐가는 사람들을 인종이나 계급에 관여지 않고 복음을 나눠주는 일을 계속 할 수 있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30) ‘바울이 어디에서 돈이 나서 셋집을 얻고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을까?’ 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을 수 있겠지만 빌립보 교회 같이 기꺼이 사람과 물질을 로마에 있는 바울 사도에게 보내는 교회들의 후원으로 가능했을 것이라는 것이 설득력을 갖는다. 또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요를 받은 것이 탈취한 것이라”(고후11:8)는 기록도 이를 뒷 바침하고 있다.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30b) 복음은 절대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구원을 사모하는 누구든지 하나님은 거절치 않으신다. 다만 경우에 따라서 사람들이 구별하고 나눌 뿐이지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에게도 제한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은 그것을 의지하는 누구에게든지 능력과 효력을 나타낸다.

그런 이유에서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31) 드디어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바울에게 하나님은 “나에게 큰 문이 활짝 열려서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고전16:9f) 라는 감격을 고백하는 것처럼 이제 로마에서의 복음 증거에는 그 동안 수없이 그를 방해하던 유대인들도 그리고 이방인들도 에베소의 은감색들도 더 이상 방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로마에서의 복음 증거는 세계를 향한 것이고, 그것은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열매며 가치이기 때문이었다. 복음과는 완전히 다른 로마의 법도, 율법을 안다고 그 동안 수없이 바울을 정죄하며 방해하던 같은 동족 유대인들도, 당시의 최고의 추앙의 대상이던 헬라의 철학자들도 방해하지 못한 것은 복음의 후원자가 사람이 아니라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며, 그것만은 오늘 날에도 다르지 않고 오늘 우리도 같은 권세로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권능과 효력은 주님 오실 때까지 정지되지 않을 것이고 약화되지 않을 것이다.

오늘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는 성령의 지원을 받기 때문에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약속대로 저주를 받겠지만, 세상이 대적할 수 없는 권능으로 전하게 되는 것이다. 전하는 그 사람이 누가 되었던지 그 약속은 다르지 않을 것이고, 이 복음의 행전 즉 생명을 구원하는 복음 증거는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지속적으로 역사하실 것이다.

오늘도 우리가 전할 복음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시대와 역사를 초월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듣는 사람들은 긍정적인 것 보다 부정적인 반응이 더 많고 그런 가운데서도 오늘 우리가 복음에 긍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

저들의 복음에 대한 거절은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그것 또한 예언서에 기록된 말씀을 이루는 모습이라는 데서 비극적이고 부정적인 말씀의 응답이 아니라 구원을 이루는 무리 속에서 말씀을 이루는 우리 모두는 감사가 충만한…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보증하시는 복음의 증거에 반항할 어떤 세력도 이 우주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이런 능력과 권능으로 이 교회는 마지막을 향하여 구원의 진리를 증거하도록 우리가 사명을 받았고 이 사명을 행할 때 성령께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실 것이다. 오늘 우리의 신앙 속에 계속 성령의 전을 기록할 수 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