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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4:15~24 2009-11-01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넘치는 사랑을 받았고 그래서 주님을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노라고 고백한다. 그런 고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을 사랑하는데 대단히 서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것도 다 서툴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라는 바른 정의가 서지 않고서는 사랑할 수 없고 특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임을 말씀하신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조차도 모르고 각자 나름대로 자신의 생각으로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런 것일 것이다!” 라는 추측만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노라고 매일, 예배 때마다 고백하면서도 정작 사랑다운 사랑을 해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 그 사랑한다고 하는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가장 초보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신앙과 삶의 과제를 오늘 나누어보고자 한다.



Ⅰ.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께로서만 온다.

대부분의 참된 사랑은 언제나 내리 사랑이다. 동물들에게서 보는 부모의 희생은 어찌 보면 눈물겨울 정도이다. 만물을 다스린다고 하는 우리 사람들이 부끄러울 정도여서 인륜이 무너지고 있는 현 시대에서 사람들이 배워야 할 그런 모습이다.

그 자연의 일부인 동물들이 어디서 배워서 그런 사랑을 할까! 그것은 창조주께서 그것들을 만드실 때부터 그들의 생체에 입력해 놓으신 천성을 그것들은 행하고 있는 것이다. 동물 세계에서의 자연적인 사랑은 세상이 변했어도 별로 변한 것 같지 않다. 즉, 사람의 관계인 인간이라는 울타리 속의 변화와는 사뭇 다름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도 유독 피조세계의 으뜸이라는 사람만이 사랑한다고 군중 앞에서 큰소리 쳐놓고 왜 얼마 되지 못해서 시들어지고 헤어지고 부모 자식의 관계로 났으면서도 근본을 잃어버리는 부끄러운 모습들을 보이는 걸까?

결국 성경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면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요일5:19) 결국 세상은 미움으로 지배되고 있기 때문에 가진 것의 한계, 노력의 한계는 너무나 큰 한계를 드러내고 만다.

이렇기 때문에 죄로 인하여 미움에 익숙하고 사랑에 서투른 이 죄악 된 세상에 주님께서 먼저 사랑을 가지고 오셨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내가 먼저 사랑했다고 큰 소리 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기대어 사랑하고 용서하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그 사랑 받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그 같은 사랑을 가지고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먼저는 하나님 아버지를, 그리고 그의 자녀 된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를 저주와 절망에서 건져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그 구원의 역사를 위하여 친히 자신을 십자가에 제물로 내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조차 어색하기만 하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Ⅱ. 과연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오늘 본문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15) 하였고 (21)에 역시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에 (23)“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24)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여기에서 보는 대로 계명이 곧 말씀이고 말씀이 곧 계명임을 확인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사랑하면[헬, 아가파오(agapao), 요 21:15- agapas me  →pilo se]”은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바로 그 사랑이다.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과 같은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2) 우리가 생각하게 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러한 사랑을 요구하실 권리가 있으시고, 또 인간 자신으로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신령한 사랑을 받고 사랑하려고 각오하고 헌신하는 사람에게는 인간 자의적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능하게 하여 주심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계신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6~17) 하셨고 다시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21)는 것이 열쇠이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려 하는 자들에게 성령께서 오셔서 그 사랑을 가능케 하신 다는 약속이다.

이것이 옛 구약시대에는 불가능했던 계명으로 새계명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신다.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아8:6)

요일2: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사울이 하나님과 사무엘을 사랑했다면 어떤 조건에서도 사무엘의 오기를 기다렸을 것이다.[삼상10:8-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리니 내가 네게 가서 너의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칠 일을 기다리라]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고 한 것이 다윗과의 큰 차이였다. [삼상13:8~9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리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다윗은 자신의 위신이나 처지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더 우선에 두었기 때문에 회개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이권이나 권위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지 못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가르쳤기 때문에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친다고 주님으로부터 책망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주님을 사랑하면 그의 계명을 지키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라는 사실은 요한 사도의 그의 복음뿐만 아니라 그의 서신들 속에서도 계속 강조하고 있다.“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2: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5:3)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요이1:6)

물론 그 계명이란 주님께서 당부하신 모든 것들이다. 사람의 입장이나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과는 상관 없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를 단순히 지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유일한 방법이라 말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다른 방법을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Ⅲ. 사랑과 계명의 상관 관계.

◇사랑하는 대상에게는 귀 기울인다.

역시 우리는 오늘의 주제를 확인하기 위하여 본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15)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21)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23)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24)



○사랑하면 희생이 따라야 한다.

미워하는 쪽의 (원수가 되어 있는)대상을 사랑하면 더욱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이 힘들었고 그를 따르는 믿음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을 극명하게 묘사 한 것이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앞에서도 인용한바 있지만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는 기록을 본다.



◈사랑하는 대상의 바램과 의지를 따르기를 좋아한다.

이 계명이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하나님의 영이 오셔서 거할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6~20)



◎우리의 최종적인 판단은 그의 말씀을 지킨 것에 의해서 판단될 것이다.

능력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이 역사의 마지막의 광경을 보여주시면서 유일하게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은 교회는 무엇으로 칭찬을 받고 있는 필라델피아 교회도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다.

[계3:8]“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10)“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