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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4:23~24 2009-11-15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구약 시대에 선택된 백성들로 하여금 수많은 피의 제사를 드리도록 하였다면, 이것은 완성된 복음의 시대에는 보다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고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게 하고 그러한 예배는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으로 죄악의 세상에서 들어나도록 나타날 것을 원하신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구약의 아벨의 제사로부터 삶의 거처를 옮길 때마다 단을 쌓았던 아브라함 이삭으로 이어지는 제사와 출애굽 때 애굽에서 행해졌던 유월절의 희생양과 후의 광야 속에서의 제사, 그리고 가나안에 정착하여 실로에서와 예루살렘에서 솔로몬 성전의 건축과 함께 드려진 그 수많은 제사들은 대부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지 못하는 제사들이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10:10, 14)

그 수많은 제사는 결국 한번으로 완전히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온 인류를 위한 희생제사의 모형이었고, 이런 입장에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과의 대화에서 말씀하신 하나님 예배는 때와 장소보다 중요한 오늘 우리 시대의 예배가 더 귀중하고 완전한 예배임을 가르치신 귀중한 교훈이다.

그러나 신령과 진정의 예배라고 하는 것은 지식이 많거나 대단히 높은 지위의 사람, 그리고 도덕적인 삶을 사는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 사람들로 알게 하려고 “예배”라는 귀중한 과제를 사도들과 종교지도자들과 더불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속에서도 버림받고 천대받았던 이 사마리아 여인과 더불어 말씀하시고 있다는 자체도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닌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들이 만족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영화롭게 못한다면 실패한 예배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바른 확신과 감사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것이 신앙의 기본이다.

이 여인을 향해서도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말씀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누구도 주님을 예배함에 있어서 태생이나 신분이나 삶이 예배에 제한 될 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예배의 이유를 알지 못하고 다만 자신들의 삶 속에서의 불행을 겪지 않게 해달라는 단순한 공포심으로 알지 못하는 막연한 신이라고 하는 가능성만을 가지고 예배하는 어리석음을 지정하시는 동시에,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22-세상의 거짓된 예배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의 본연의 왜곡된 모습이다.) 하셨는데 먼저 예배의 대상을 잘 알고 창조주요 구세주이신 그분의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경계를 오늘 이 말씀에서 우리에게 동일하게 일깨워 주시고 계신다.

오늘 우리 각자의 신앙의 삶에 있어서 예배를 점검하고 참으로 주님께서 원하시고 요구하시는 대로의 예배를 회복하여 주님께는 영광이 되고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는 큰 확신과 깨달음이 풍성한 이 말씀을 듣는 …



Ⅰ. 예배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신앙의 첫 번째 행위이자 감격이다.(23f)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 이 선언 속에는 여태껏 있었던 예배는 참 예배가 아니었음을 전제로 한다. “곧 이 때라”

과거의 이스라엘 속에 수많은 예배의 행위 즉, 제사의 행위가 있었지만 그것은 참 예배가 아니었으면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드려지는 예배만이 참 예배이고 그림자가 아닌 실체의 예배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배는 모든 신앙 행위의 출발이며 아무나 드릴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먼저는 하나님의 자녀 됨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감격을 회복해야만 할 것이다. 예배의 감격을 맛보지 못한다면 사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힘겨울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릴 수 없다면 아무것도 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구약에서도 레위인이 아니 사람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성막에 접근할 수 없었고 이것은 적어도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의 예배의 자격에 대한 그림자였었다.

하나님을 예배 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그리고, 함께 예배하는 자들과 영적인 교통이 이루어지고 신령한 세계를 맛보는 세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감동이다. 세상 사람들의 제사 조차도 절대로 아무나 참여시키지 않는다.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감격이야말로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들과 어떻게 비교될 수 있을까!

그럼으로 예배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감동을 맛볼 수 있는 사람들만이 이 죄악의 세상을 이기는 힘을 얻고, 주님께서 십자가의 희생으로 찾아주신 성별 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의 우리 됨이 주님의 희생으로 얻어진 것이라고 할 때 우리 누구도 감사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 이 세상에서의 예배는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영원한 예배의 모형이다. 하늘에서의 영광스러운 예배의 감격을 요한 사도는 흥분된 감격으로 전하고 있는 내용이 요한 계시록의 예배 장면이다.

예배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님 앞에 격식을 갖추어 드리는 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규칙적인 예배와(행20:7)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산 제사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그리고 이 두 예배는 서로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희생과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한 사람만이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고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는 주님의 당부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었던 자격 없는 우리들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특권을 누리게 하셨다면 그 은혜에 합당한 삶과 예배를 드리는 …



Ⅱ. 하나님은 참으로 예배하는 자를 지금도 찾으신다.(23b)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라는 말은 ‘참으로 예배 하는 자’ 즉,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하는 자를 말씀하시는 것이고, 이 말씀은 많은 거짓된 예배자들을 제외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신령과 진정” 자체가 인간의 감정이나 만들어진 어던 것을 거부하는 의미이다.[헬,프뉴마( pneuma), 영적인 것으로 인간의 감성과 다른 하나님의 감정;헬, 알레데이아(aletheia), 만들거나 꾸미지 않은 계시의 사실 그대로를 의미한다.]

[신령과 진정]이라고 할 때, 어떤 것도 함부로 거짓으로 할 수 없다. 적어도 예배 속에 위선은 하나님께서 용납치 않으실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렇다. 연보 조차도 그럴 것이다.(십의 일)

구약성경에서 인위적인 예배에 대한 많은 부정적인 기록들을 읽을 수 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삼상15:22~23f ←사1:11~13)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7:9~11) 이것은 분명히 착각이었다. 하나님은 인정하실 수가 없는데 자신들의 판단대로 스스로 위안을 삼는 안타까운 모습이다.

주님께서 왜 이런 한탄을 하실까?

(1)예배자의 마음을 드리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전5:1b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2)하나님께서는 짐승의 피나 기름보다 인간의 전적인 순종을 원하신다(24).

(3)하나님의 말씀만이 모든 신앙 생활의 예배와 삶의 규범이다(딤후3:16~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이런 의미에서, 사실 구약 시대의 모든 희생 제사들도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리고 그 고기를 제단 위에서 불태우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제사 속에 담긴 바른 뜻을 이해하여 하나님께 헌신하고 순종하는 일이 더욱 중요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사’는 그림자요, ‘순종’은 실체라고 까지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구약의 동물 제사 자체도. 단지 짐승의 피와 고기만을 드리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순종으로 인간 자신의 뜻을 바치는 것이므로 순종이야말로 이성적이고 영적인 제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므로 앞의 사무엘을 통한 이 말은 ‘제사’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제사를 드리고 있는 사람의 순종의 자세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제사로 순종을 더욱 완전히 표현할 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가 된다는 의미다.

이방인들의 수많은 제사 형식이 있었고, 이스라엘의 수많은 제사들이 있었지만 예수님 당시에도 거짓된 예배자들 뿐이었고 주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셨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헬,마텐( maten), 시험적, 조작, (실패한)추구, 아무 목적 없이,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마15:9)

그래서 하나님은 스데반을 통해서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행7:42; 암5:25~) 하심으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제사 다운 제사를 드린 적이 없다고 까지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가 아닌 자신들의 편리와 좋아하는 것들만을 하려 하는 곳에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실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10:1~2; 민26:61)

왜 지금은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예배를 들여도 그대로 두시는가! 그것은 은혜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올바르지 못한 예배를 드린 사람들이 깨닫고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면 살겠지만 주님 오실 때까지 같은 모습으로 계속 한다면 주님 오셨을 때는 그 보응은 구약의 형벌보다 더 무서울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 날에도 구약의 이런 모습들이 재현되고 있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신령을 따라 사람들에게 계시하신 방법으로만 경배하는 참 예배자를 찾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는 다른 말은 우상숭배하는 사람들이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이러한 하나님의 참 예배자들을 찾으심은 주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 될 것이다.



Ⅲ.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어야 한다.(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으로 드려져야만 한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려고 하는 아브라함에게 수풀에 걸린 양을 지시하셨다.

[예배, 헬, 프로스퀴네오(proskuneo), ‘주인의 손을 핥는 개처럼’에서 유래하여 키스하다, 굽실 굽실거리다, 경의의 표시로 부복하다, 공경하다, 경배하다. worship]

많은 예배가 사람의 감정에 충실 하려고 하고, 사람들의 편리를 하나님의 명령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서 그런 의도대로 예배를 행하고 있는 것은 대단히 두려워해야 할 위험한 일이다.

문제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서도 예레미야서에서의 표현대로 스스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사람의 판단이지 하나님의 판단은 아니다.

우리의 감정에 좀 내키지 않고 사람의 입장에서 어려울지라도 신앙의 기본인 예배가 주님의 명령대로 들여져야 나중에 주님의 인정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인데, 안타깝게도 그런 중요한 부분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해 버린다는 사실이다.

분명 사람들은 [구원]이라는 말을 하면 대단히 민감해 진다. 안디옥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가르침을 통해서 말씀을 순종하고 신앙 생활을 잘 하던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행15:1)는 한마디로 혼란에 빠진다.

구원에 관한 한은 분명 하나님의 권한이기 때문에 사람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받는 방법과 기준을 분명히 말씀하셨고, 예배하는 방법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혼란할 이유가 없다.

오늘날 말씀 중심으로 예배한다면서 말씀에 분명히 나타난 것을 행하지 않고 가르침대로 예배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는 행위들이다. 구약의 제사에서부터 완성된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완벽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시대에 살면서 귀중한 가르침을 가볍게 여긴다면 나중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면치 못할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대로 예수께서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마15:9) 라는 책망은 오늘 하나님께서 분명히 보여주신 교훈대로 예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책망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구원 얻을 교훈으로 분명한 말씀을 주셨고, 우리는 그 교훈들이 사람의 판단으로 구원에 관계 있건 없건 순종해야 하나님 앞에 떳떳할 수 있다.[예배에 한 두 가지 빠졌다고 설마 …]

시대적으로 감성적인 시대가 되면서 예배는 점점 인간 감정에 충실해 가려고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것들을 더 많이 동원하고 있지만, 그런 예배를 마치고 세상에 나서면 그 감동은 쉽게 사라지고 마는 것은 말씀에 순종치 못하기 때문이고, 그런 삶의 연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이 지배할 수 없기 때문에 산 제사로 세상에 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이솝 우화에서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를 읽는다. 둘 다 자신의 입장에서 음식을 차렸다. 그것은 역시 예배라는 신앙의 가장 기본 적인 것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우리가 부모님께 밥상을 차려드리는 것에서도 마찬가지다.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반찬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반찬으로만 잔뜩 차린다면 자신은 행복하게 식사를 하겠지만 부모님은 만족하실 수 없는 것과도 일반이다.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할 때 우리의 감정과 이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바라시고 기뻐하실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신앙의 출발이요 구원받은 하늘의 사람들의 기본인 예배가 순종하려는 자세와 말씀하신 방법대로가 아니라면 여전히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실 것이다.

우리 사람의 좋아하고 즐기는 예배보다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 받으실 예배를 위하여 신령과 진정에 우리의 온 마음과 정성과 가치를 하나님께 돌리는 예배의 삶이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