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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민 13:25~33 2009-11-22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오늘 우리가 읽은 내용은 이스라엘이 바란 광야,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러서 그들에게 약속한 복된 땅 가나안을 정탐하게 한 후 돌아와 자신들의 경험한 바를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 앞에 보고하는 내용이다.

이 보고의 결과로 이스라엘은 또 한번의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을 이어지는 14장에서 보게 되는데 광야 40년의 형벌도 이 일 때문에 주어지게 된다. 무리 가운데서 뽑은 대표자나 지도자라는 사람들의 영향은 이렇게 큰 것이다.

이 가나안 정탐으로 나타난 결과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리고 이 역사가 계속되는 한 신앙하는 모든 사람들의 모형이 될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요, 결과이고 반복되는 신앙과 불신의 역사의 반복이다.

바로 앞에 보면 각지파마다 선택된 정탐꾼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 사람들은 그래도 각 지파의 두령 급으로 선택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빼고 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신앙적으로나 외형적인 조건을 두루 갖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로 구성된 특공대원들이었다.

문제는 이들이 선택된 기준이 어디에 있던 간에 나중에 이들의 보고의 내용을 들어보면 절대적인 신앙의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찌 보면 각 지파를 배려하는 인간적인 입장에서 각 지파의 대표자들을 뽑았다고 보는 것이 보다 사실적인 이야기일 것이다. 만약에 12명의 많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으로 뭉친 두 사람이었다면 차라리 낳을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렇게 되지 않은 것 같다.

또 만약에 모두가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인물들이었다면 이 사건은 반전되었을 것이다. 결국 영적이지 못한 지파간의 안배라는 인간적이고 신앙적인 사람들로 선택되지 못한 데서부터 문제는 불거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 시대에도 가장 일반적인 부정적인 사례로 전철을 밟게 된다.

신앙적인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약속과 진리에 확신을 갖는 사람들의 협력보다는 주변과 형편과 사람들의 관계가 우선되는 일은 반드시 삐꺽 거리기 마련이다.

이 세상은 우리의 생각하기에 따라 애굽일수도 있고, 정복해야 할 가나안일수도 있고, 정복한 축복의 땅 가나안일수도 있다. 이런 입장에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가져온다면, 오늘 우리는 2010년을 탐지하고 보고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고, 오늘 우리는 필리핀과 인도를 탐지하고 돌아온 사람들이며, 오늘 우리는 우리 각자의 남은 생애를 탐지하고 보고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영적인 원리에서 우리는 이들의 불신앙적인 전철을 다시 밟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라는 도전을 받게 된다.



Ⅰ. 이들의 나고 자란 환경은 다르지 않았다.

먼저는 이 열두 사람들이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탄생과 교육과 훈련이 거의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쉽게 할 수 있다. 이들의 태생은 애굽이었다. 즉 세상에서 나서 자랐고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오늘도 우리 자녀들의 교육의 대부분을 신앙적이지 못한 세상의 교육과 환경에서 키우고 있는 것은 이런 입장에서도 우려가 없지 않은 부분이다. 사람들은 환경적 교육적 영향을 대단히 많이 받고 결국 그런 것들로 인생을 사는데 필요한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형성되게 되기 때문에 안타까운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세상에서도 그가 어떤 교육을 받았는가를 따지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먹은 대로 내어 놓는다’는 말을 곧잘 하는 것이다. 비록 이들이 애굽 사람들의 직접적인 교육을 모세처럼 받았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모세가 자기백성을 돌아보려고 자신의 역할을 깨달으면서 행한 일들을 보면서 역시 교육의 중요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유아 때 어머니-애굽교육)

모세가 히브리 사람을 괴롭히는 애굽사람을 죽여서 모래에 묻은 것은 사실 그의 애굽의 교육과정에서 배운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애굽의 그럴싸한 방법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는 적절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미디안에 애굽에서 공부한 시간만큼이나 시간을 소모하게 하고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을 본다.

그런데 문제는 이 열둘이 다 같은 교육을 받았을 것인데 이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는가 하는 의문점이다. 여기에 대한 궁금 점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고침을 받은 열명의 나병환자 중에서 주님께 감사하기 위하여 돌아온 이방출신의 환자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눅17:11~19)

심지어 주님께서는 안타까우셔서 “…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17:17)고 탄식하신다.

열 사람이 꼭 같이 평생에 낳을 가능성이 희박한 문둥병을 치료받고 제사장에게 자신의 정결을 선언 받아서 사회적인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서 갔는데, 주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고 돌아온 사람이 십 분의 일에 불과했다는 얘기이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여기는 믿음이 그만큼 적은 것을 보게 되는데, ‘왜 아홉은 이 감사하러 돌아온 한 사람과 같지 않았는가?’ 묻기보다는 ‘왜 이 이방인인 한 사람은 그 아홉 사람과 같이 자신들의 사회적인 지위의 회복보다 주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리는 일을 하는 유별난 사람인가?’ 하는 것이 이 세상적으로는 더 일반적인 의문이다.

12사람의 이스라엘의 대표자들 즉, 약속의 가나안을 정탐시킨 이 사람들 모두는 같은 태생과 같은 환경과 같은 교육을 받으며 자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필요가 있고 그런 입장에서 사실 여호수아와 갈렙이 더 신기하게 여겨지는 사람들이다.

오늘 우리 신앙하는 사람들도 같은 혼란에 빠지기 쉽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고 유별나지 않은 인생을 사는데 왜 우리만 요란을 떨고 유별나야 하는가 하는 일반적인 원칙을 따라 가려는 경향이 많다.

오늘 우리도 이 세상에 나서 세상 사람들과 같은 환경과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람들과 같이 움직이고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편하고 옳지 않은가! 그런데 왜 유별나게 이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종교생활을 하자고 하는가! 고 신앙을 더 주문하는 부모나 교회가 더 이상히 여겨질 수도 있다.

오늘 우리 각자는 과연 어떤 것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살고 있는가! 이 말씀을 들으면서 정리할 수 있는…



Ⅱ. 이들이 보고 돌아본 땅도 다르지 않았다.

이 12사람 중에 열 사람은 다른 곳을 보고 왔거나 두 사람이 다른 곳을 보고 온 것이 아니었다. 결국 이들은 꼭 같은 곳을 함께 둘러보고 왔음에도 이들의 보고는 전혀 다른 곳을 보고 온 것 같은 전혀 다른 보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저들은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전과 꿀이 흐르는 땅임을 증거했다. “…그 땅 실과를 보이고,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26b~27) 즉 이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들여보내시는 가나안이 사실적으로 복된 땅임을 함께 확인하는 보고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저들의 보고는 뒤로 가면서 뒤 틀려지고 있음을 읽게 된다.

또 자세히 이 열 지파 대표자들의 주장을 읽어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을 발견한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32~33)

거민을 삼키는 땅이었다면 그들은 이스라엘이 능히 쳐서 이길 수 있는 땅이고, 국민들이 건강하지 못할 터인데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고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라는 앞뒤가 안 맞는 보고를 듣게 된다.

결국 이것은 저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경외감 보다는 그들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그들과 맞닥뜨리지 않기 위한 회피의 수단임을 보게 된다.

그런데도 소수의 두 사람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꼭 같은 땅과 사람들을 보고 왔음에도 저들과 다른 보고를 하고 있는 것을 본다.

“…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30)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민14:6~8)

우리가 그들 가운데 있었다면 과연 어떤 모습일까!를 생각하게 한다. 이 광경은 신앙한다고 하면서도 마치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세상 앞에 낙담하고 절망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

주님께서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고 격려하고 계신다.

이것은 “이 세상은 내가 이미 십자가에 피를 흘리므로 다 이겨놓은 싸움이다. 마귀들은 이미 날개를 상하였고 힘이 꺾였다. 너희들이 취하도록 하여라”시는 말씀과도 같다.

그러나 우리는 거대한 용처럼 우리 앞에 드러누워 있는 세상을 보며 ‘우리는 이 세상을 이길 수 없어!’ 라고 뒷걸음질 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의 열 지파의 두령들과 여호수아와 갈렙은 다른 땅을 보고 돌아온 것이 아니라 꼭 같은 가나안을 보고 왔음에도 이렇게 엄청난 다른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을 교훈으로 배우는 것이다. 세상을 보는 우리의 모습도 이와 같은 수있다.



Ⅲ. 그렇다면 이들의 차이는 무엇인가?

태생도, 환경도 교육도 같이 받았고 꼭 같은 곳을 보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열 사람은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31~33)고 보고하고

두 사람은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30) 거나

“…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민14:7~9)는 전혀 상반된 보고를 하게 되는 것일까?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의 보고에는 하나님의 약속이나 역사가 빠져있다. .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 그들은 보이는 것, 나타난 현상들만을 수집하고 종합해서 보고하는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보고가 실지로 사람들에게는 더 큰 호소력을 가졌던 것을 뒤이어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 속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보고를 하는 두 사람의 보고는 자신들의 육신의 눈으로 본 것보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내용을 보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이 세상의 어느 나라보다도, 자신들이 나온 애굽보다도 더 귀한 땅임을 확인한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14:7b, 8b)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무조건적으로 올라가면 차지할 것이라는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확신을 주고 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14:8~9)

이 약속들에서 중요한 것은 오늘 이 말씀의 제목으로 삼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이라는 단서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히브리서11:6에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는 말씀을 읽는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은 반대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뢰한다면”이라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겠지만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도록 믿고 신뢰한다면 우리의 보기에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지키실 것이다.”라는 고백이다.

이러한 신앙적 고백은 신앙의 역사 속에 믿음으로 찬란히 빛나는 믿음의 선진들의 한결 같은 고백이다. 나중에 갈렙은 가나안에 들어 간지 45년이 지난 후에도 같은 고백을 드리고 있다.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수14:12b)

모든 상황적으로 비관적인 세상을 보이는 것에 의존하지 않고 극복할 수 있었던 신앙의 선진들의 모습을 보면 한결 같음을 보게 된다. (창21:22 아브라함, 26:28 이삭, 28:20 야곱; 출3:12 모세; 수1:5, 9 여호수아) 이것은 복음의 시대에도 동일하게 약속되었다.(마1:23, 마28:20)

오늘 믿음 생활하는 우리들에게도 전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이 거대한 세상을 이길 수도 없고 아직 보지도 못한 하나님의 영광의 새 예루살렘을 차지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순종의 삶을 살기만 한다면 상황은 얼마든지 반전시킬 수 있는 것이 신앙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신앙보다는 다수가 호응을 받고 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비록 소수의 바른 판단과 보고는 사람들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음을 본다. 대부분의 역사는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옳은 것을 가지고 가르친다고 사람들이 환영하거나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 선다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것이라는 환상은 애당초 버려야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가 되면 하나님의 약속은 모두 그런 사람의 것임을 잊지 말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도록 최선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