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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고전 13:8~13 2010-10-24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지난 시간에는 사랑이 아닌 것이 무엇이며 사랑이 어떤 것임을 통해서 사랑의 특성과 필요성을 생각했었다. 오늘은 사랑의 영원성과 위대한 능력을 생각하고자 한다.

사랑의 사도라고 하는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두 번씩이나 하나님께서 사랑 자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친바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7~8) 하였는데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라야 하나님께로 서 난 자이고 또 하나님을 안다는 아주 단순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뒤집으면 아무리 자신이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라고 할지라도 미움에 의해 지배되는 사람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두려운 이야기가 된다.

같은 장에서 다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16~18) 했는데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고 사랑 안에 온전히 이룬 자는 두려움이 없는데 심지어는 이 세상의 마지막인 심판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역시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이 진정으로 사랑의 위대한 힘이다.

오늘 우리 역시 이러한 기준 속에서 자신을 생각하고 믿음을 생각해서 사랑의 하나님의 자녀로 굳게 설 수 있는…



Ⅰ. 영원 속에서도 가치를 잃지 않는 사랑.(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은사들의 한계를 말하면서 사랑의 영원성을 강조하고 있다. 사랑은 영원한 세계에서도 여전히 지속되고 효과를 발할 것이지만 진리의 증거와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은사들은 필요를 충족시킨 후에는 소멸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친다. 즉, 순간과 영원 속에서의 가치를 은사 속에서 가리고 있는 것이다.

1.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물론 사랑이 영원에만 필요하다는 가르침으로 한정해서는 안될 것은 주님께서 이 어두움의 세상에 사랑을 가지고 오셔서 그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4:9)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라는 귀중한 교훈은 오늘 이 어두움의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사랑의 놀라운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고 세상은 어두움에 속하여 미워한다 할지라도 사랑의 하나님께 속한 백성들은 뜨겁게 사랑함으로 서 서로를 붙들어 줄 것을 베드로 사도 역시 가르치고 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이러한 사랑은 영원까지 연결된 다리가 되어 영광과 위엄의 주님 앞에까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인도해주는 것으로 여기에는 수고가 따른다고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선언한바 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살전1:3)

이 보이는 역사와 영원 속에 가장 위대하고 영원한 능력은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우리의 허물과 죄로 인하여 지불하시고 그 사랑 받은 자들은 그 십자가의 사랑을 힘입어 영원까지 이르는 위대한 힘이요 권능으로 영원에서도 존재하게 될 것이다.

2.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헬, 파우오(pauo), 멈추다, 정지하다, 떠나다, 그만두다, 마치다] 지식도 폐하리라.[헬, 카타르게오(katargeo), 완전히 쓸모 없게 하다, 폐지하다, 쉬다, 파괴하다, 소용없게 되다, 소멸하다, 헛되다]

당시 영적으로 자랑할 수 있었던 예언이나 방언은 물론 당시 헬라인들이 갖기를 원했고 자랑했던 지식뿐만 아니라 영적인 지식 조차도 소용없게 될 것이라 증거한다. 그 한계를 뒤에서 ‘온전한 것이 올 때’라고 증거하고 있다.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의 몸은 이 지상에 있지만 그의 마음과 영혼은 벌써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는 영원 속에 가서 주님과의 영원한 사랑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 모두 영원에서도 가치가 변하지 않는 사랑의 사람으로 사시는 여러분 모두가 …



Ⅱ. 우리의 이해의 한계.(9~11)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고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2:20) 거나 다시 27에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 라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영적인 지식은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은 사랑으로 이해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차이일 수도 있다.

1. 우리가 아는 지식은 부분적일 뿐이다.(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왜 이 세상에서는 장차 나타날 주님의 영광의 세계가 부분적으로만 이해될까?

이 말씀은 하나님의 계시와 은사를 넘치도록 받아 우리에게 구원의 진리를 전하고 있는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데서 더욱 실감할 수가 있다. “우리는…”

성경의 많은 계시의 기록들 자체가 단편적이다. ①죄의 욕망을 가진 육신에 거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베드로에게 지시하여 기적으로 고기를 많이 잡도록 했을 때 베드로는 말하기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였다(눅5:8). 불완전하고 죄 많은 인생은 완전한 지식을 감당하지 못한다.

우리 모두는 구원받았다고 확신하고 하나님의 완전한 자녀라고 큰소리 치고 있지만 육신을 입은 한계 속에서 하나님의 신령한 것은 깊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②세상의 이해할 수 있는 구조는 하나님의 영광을 완전히 나타낼 수 없다. 상대적인 세상에서 절대적이라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마치 시골 오지의 사람에게 도심의 화려함을 설명하려는 것과 같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딤전6:16)

③그럼에도 우리의 육신의 삶은 영원을 위한 준비와 훈련의 기간으로 주어졌다. 우리는 모두 구원 받았다고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의 위엄과 존귀의 감격보다는 이 세상의 한계에 탄식하고 힘겨워 할 때가 많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8:24)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 불완전 속에 있으면서 완전을 기대하고 바라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여 기다리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 역시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1:7)고 확인해 주고 있다.

2. 부분적으로 알던 것들은 온전한 것이 올 때 폐하게 된다.(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어찌 보면 구약시대는 더 부분적이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1:1~2f)

그러나 우리는 아직 하나님 아버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형태를 갖지 않으셨으면서 존재하신다는 사실 자체가 이해가 안 된다. 아직도 이 땅에서의 주님에 대한 이해는 단편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 역사의 마지막에 주님 앞에 설 때는 주께서 우리를 아시는 것 같이 하나님 아버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3. 어린아이와 같은 유치함(11f)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이제 이 어린아이와 장성한 자의 비유는 위의 부분과 온전을 이해시키기 위한 또 하나의 교훈이다. 여기서 어린아이의 비유는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는 내용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다.

어린아이는 ①감각적이다.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달래지 못하고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즉흥적이다. ②자기 중심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이기 때문에 사랑하기보다는 사랑을 필요로 하는 존재다. ③미래를 위해 준비할 줄 모른다. 그 현재의 고통을 느껴 울 뿐이고 장래의 고통을 면할 줄은 모른다. 그들은 미래를 내다 보지 못한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두려워할 줄 모른다.

어른들도 이 세상에선 유치한 상태의 신앙이 사실 이와 같다.

4. 장성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11b)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그러나 이 같은 상태에 계속 머물러서는 안되고 자라야만 한다. 계속 자라면서 자신의 유치한 것들을 벗어 던질 수 있어야 한다. 나비가 유충에서 탈피하지 못하면 기어 다니는 벌레에 불과할 것이다.



Ⅲ. 온전한 것에 대한 소망.(12~13)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모두가 사실 온전함을 기대하는 소망은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온전함이 사랑과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1. 세상 속에서의 한계.(12ff, bm)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도 잊어버린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약1:23~24) 세상에 더 깊이 관계하고 있어서 귀한 말씀을 듣지만 곧 잊어버리는 것 때문에 천국은 희미하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광활한 세계를 두고도 어느 한 곳에 갇혀 있어서 그곳에서 볼 수 있는 한 곳만을 보고 세상 전부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한다. 천국이 확실하지도 못하고 전체적으로도 이해하지 못하면 귀중함도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무가치 한 것은 아니지만 완전한 것이 올 때는 사라질 것들이다.

2.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12)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거울로 보는 희미함이 아니라 직접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게 되는데 우리의 부분적인 지식도 주님께서 우리를 아시는 것처럼 알게 될 것이라는 소망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떨리는 감격과 기쁨일 것이다.

3. 제일은 사랑이라(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우리의 신앙은 세계의 기둥을 가지게 되는데 바로 믿음, 소망, 사랑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살전1:3) 라고 칭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세 기둥은 우리를 영원한 세계에까지 이끌어 가게 되는데 온전한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게 될 때 믿음과 소망은 사랑이라는 기둥에 완전히 흡수되어 영원히 있게 될 것이라는 신비한 약속이다.

우리는 성경대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11:6)는 말씀 속에서 믿음과 소망을 다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사랑이 동반되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이기적이고 독선적이 되고 말 것이다. 사랑은 사랑 밖에는 다른 반응이 불가능하다. 이런 입장에서 사랑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느낄 수 있는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

마지막으로 우리의 가질 수 있는 오해를 푸는 것으로 마무리 하자. ‘사랑이 최고이니까 믿음이 부족하고 소망이 모자라도 사랑이면 다 아닌가!’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사랑은 공의를 충족시키는 사랑이다. 즉, 세상을 사랑하셔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사랑은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처참히 죽게 하신 그 공의와 사랑의 동전의 양면 같은 사랑을 이해 한다면 이런 오해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