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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고전 15:29~38 2010-12-19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오늘 말씀은 지지난 주에 상고했던 V12~19의 말씀과 연결된 감을 갖는다. 거기서 우리는 다섯 번씩이나 [만일 부활이 없다면…] 이라는 가정을 생각했고 심지어 마지막 19절에서는 부활이 없이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는 비극적인 예상을 하는 바울 사도의 참담한 안타까움을 함께 생각했다. 그러나 결코 그럴 염려는 없기 때문에 바울은 이런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편리나 이권을 거부하고 신앙으로만 살겠다고 세상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믿음 생활은 사람들 보기에는 분명 어리석은 것이고 신앙 속에서도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편리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탁할 수 있는 것 역시 부활이라는 엄청난 미래의 영광을 약속 받았고 기대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바울 사도의 직접적인 경험까지 인용하여 목숨을 내걸고 주님을 섬긴 것들이나 때로 죽음을 무릅쓰면서도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영원과 만나는 부활의 약속이 있기에 가능했다는 고백을 들려주고 있다.

부활의 신비를 소개할 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이나 하겠느냐?’고 빈정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다. 썩어 없어진 몸이 영원을 입는 것이나, 무게를 갖지 않고 공중으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이나, 닫힌 문으로 들어와서도 먹을 것을 잡수신 주님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꿈 같은 얘기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은 실제적으로 있었던 일이고 우리가 이 역사의 마지막에 이 세상이 뜨거운 불에 풀어 질 때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 볼 약속도(벧후3:13) 여기에 근거해서 확신을 갖는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바울과 같은 믿음과 소망을 가졌다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정신병자들이거나 아니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사는 사람들이 분명하다. 오늘 이 말씀과 함께 하는 우리는 과연 어떤 믿음의 소유자들인가!

오늘 우리는 미치광이들이거나 공상에 빠진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라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음으로 확신하고 451: 4“예수 부활하셔서 승리하신 것 보고, 나도 승리할 줄을 믿고 싸우리” 라는 고백으로 부활을 향해 나아가는 …



Ⅰ. 부활이 없다면 귀중한 신앙의 행위나 희생은 가치를 잃는다.(29~31)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죄인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나는 최종적인 신앙행위가 바로 세례[순종과 고백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가정하기 어렵다.]이지만 이것은 부활을 위한 죽음의 모형이다. 분명 29절은 시원하게 이해하기 힘든 난해 구절이지만 그럼에도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과연 부활이 없다면 신앙적 행위가 어떤 가치가 있겠는가 하는 격려이다.

일세기 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고 하는 것은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 신앙하는 것과는 달랐다. 수시로 죽음에 직면해야 했던 사실들은 성경에서나 역사 속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들이다.

“…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11:35b~38)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31) 바울의 이 고백은 주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이자 도전이셨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날마다도 힘들지만 로마서에서는 이런 두려움이 종일토록 지속됨도 고백하고 있다.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8:36; 시44:22) 부활의 확신을 가진 자들만이 가능한 고백이다. 부활의 소망이 런 것들을 견디게 한다.



Ⅱ. 부활에 합당한 삶을 살아라!(32~34)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신앙하는 사람들은 수많은 유혹에 이끌릴 수 있었고 이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32f) 이것은 당시의 상황에서 두 가지 정도의 이해가 가능한 내용이다.

당시의 로마는 정치적인 불만요소를 잠재우기 위해 곳곳에 큰 원형경기장을 건설하고 검투사들의 싸움을 구경하게 하거나 사람과 맹수와 더불어 싸우게 하는 등등의 방법으로 군중들의 불만을 해소하려고 했는데 에베소에는 지금도 원형 경기장의 유적이 남아 있고 바울이 신앙의 지도자라는 이유로 짐승 앞에 내몰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이 바울의 고백은 마치 맹수같이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고 앞뒤를 가리지 않고 욕설을 퍼 붇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겪었다는 우회적인 표현일 수도 있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부활의 신앙을 전하는 바울이 아니었다면 전자든 후자든 만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32b)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당시에 에피큐리안 철학자들이나 오늘 우리시대의 세상 사람들처럼 탐닉하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인생이 가장 현명한 삶일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육욕적이고 세상적인 욕망이 부활을 바라고 소망하는 자들에게는 합당치 않음을 증거하고 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33) 세상과의 사귐은 결국 믿음의 사람들이 입고 있는 그리스도라는 거룩한 옷을 더럽힐 수 있다는 경고이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34) 우리는 세상의 방법과 죄악에 어두워질 때마다 이런 각성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영원한 부활의 영광을 입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롬13:11)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34b) 왜 믿음을 가진 교우들을 향하여 이런 말을 할까! 어쩌면 신앙의 사람에게는 대단히 자존심 상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바울이 사람의 자존심을 건드리기 위해서 한 말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런 충격적인 방법으로라도 신앙을 각성시켜 영광의 부활에 제외되는 비극으로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사랑의 충고이다. 우리는 분명 이 세상에서 끝낼 사람들이 아니다. 최소한 영원을 사모하며 사는 사람들이고 거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야만 하는 부활의 사람들이라면 거기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3:14)는 베드로의 당부에 순종하는…



Ⅲ. 부활의 형체는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다.(35~38)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부활의 형체를 생각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판단이나 생각으로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몸이었다. 분명히 보이는 몸이면서 공간을 초월하는 신비의 몸이다.

우리가 상고하는 마지막 부분은 과연 부활의 몸이 어떤 모습일까? 하는 다음에 연결되는 말씀의 첫 부분이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35) 이것은 사실 오늘 우리가 갖는 궁금증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가지는 사람들을 향하여 바울은 책망한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36) 먼저는 죽어야 산다는 단순한 원리를 제시한다. 이러한 바울의 책망은 죽지 않고 부활하고지 하는 욕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마음에 두시고 하신 말씀을 들어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우리는 이미 앞에서도 죽어야 사는 원리, 죽어야 부활하는 희생의 상급에 대한 말씀을 나눈 바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직접 보았던 사도들 조차도 자신들의 눈과 귀를 의심할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비하고 놀라운 것이었고, 이런 사도들의 부활의 증거를 전해 듣지만 고린도 교회를 비롯해서 많은 주님의 성도들이 부활이 과연 어떤 것일까 신비하게 생각하고 궁금해 할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 사람들은 하나님의 어떤 것들도 사람에게 꿔 맞춰서 이해하려고 하는 경향이 더러 있다. 영원을 순간에 가져와 이해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 불안한 비교이고 영적인 것을 제한 하는 잘 못을 낳을 수 있기 때문에 바울 사도께서는 경계를 주시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제 가장 단순한 식물의 원리를 통해서 사람으로 상상할 수 없는 부활을 제한하지 않으면서 어느 정도 이해 시키기 위해서 곡식의 뿌리고 나고 자람의 원리를 빌어 부활을 설명하려 하지만 여전히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뿐이로되”(37)

우리는 사람의 부활을 현재 우리가 가진 몸으로만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죽을 몸이고 썩어질 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기만 한다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과 같은 영화로운 몸으로 바꿔 입을 것이고 거기에 대한 정보를 가지신 분은 하나님아버지뿐 이시다.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38) 각 사람의 바라는 대로 형체를 주신다면 아마 무가치 할 것이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입혀 주시는 형체는 우리가 기대하던 이상의 것이 될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이 예배가 무슨 의미가 있으며 왜 헌신하고 수고하려고 하겠는가! 우리는 부활에 합당한 삶을 이 현실 속에서부터 살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 육신의 초라함으로 부활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주님의 부활의 모습이 우리 모두의 영광이 될 것이다. 여러분 모두가 주님께서 입혀 주시는 부활의 영광을 입을 수 있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