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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9:1~9 2012-10-07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 이야기는 잘 아는 대로 그리스도교 역사에 가장 귀하게 쓰임을 받은 바울의 주님과의 만남의 경험이자 우리 각자의 주님과의 만남의 경험일 수 있고 과거의 사울처럼 자기 주관으로 열심을 갖고 주님을 섬긴다고 설치고 있다면 그러한 사람이 반드시 경험해야 할 모습니다.

이 사건은 바울의 생애에 엄청난 변화와 결과를 가져왔고 그래서 바울은 나중에 이런 사실을 계속 되새겨 말하고 있는 것을 여러 군데서 읽을 수 있다.

지금까지 나름대로 하나님의 일꾼으로 준비해 왔던 모든 것들은 쓸 데 없는 것이 되었고 육신적인 사람에서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이 될 뿐 아니라 과거에 힘쓰고 애쓰던 것들이 오히려 주님을 진노케 할 뿐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만큼 영적인 진리를 알고 행하는 것과 모르고 행하는 것들은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본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의 선지자를 통하여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 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주님의 일을 해보겠다고 하는 것은 바울의 경우처럼 “…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26:14b) 하신 것이다.

주님을 알고 그 말씀과 뜻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어설퍼 보일지라도 바른 섬김이고 인간적으로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주님의 일을 함에는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을 바울의 이 경험 속에서 배우게 된다.

우리 모두가 이 말씀과 함께 주님께서 내가 주님을 위하고 섬긴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는 책망을 듣지 않도록 먼저 주님을 가까이 만나 우리의 섬김을 점검하는…



Ⅰ. 주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열심을 가질 수 있음을 본다.(1~2)

(1)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도 열심을 가진 종교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것은 자신이 섬긴다고 하는 주님으로부터 책망 받을 수 밖에 없는 안타까운 모습이었다.(롬10:2~3) 여기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주님을 만난 후와 다른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①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모습이 특징이었다. 진정한 하늘의 사람은 주님의 온유한 성품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사실 성령이 오시지 못했을 때 그런 모습이었던 베드로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주님에 대하여 이런 회상을 하고 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2:23) ≠[이에는 이]

바울은 과거에는 주로 사람을 죽이는데 증인역할을 하고 죽이는 일에 찬성투표를 던졌음을 볼 수 있다.“…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행7:57~58)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행26:10)

②주로 상위 그룹의 사람들과만 상대를 했다. 종교적 명예와 위엄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고 이것은 그의 고백을 따르면 어려서부터 그렇게 자라왔다.(빌3:5~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③사죄를 위한 일보다는 정죄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우리 주님은 인류의 사죄를 위하여 대신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지만 사울은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2b) 세상의 비극은, 모두가 다르지 않은 죄인이며 죽게 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정죄하는데 빠르고 피 흘리는 데 빠르다. 바울은 이러한 죄인들의 군상들을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3:13~18)고 OT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계시록 12:10에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는 주주님으로부터 정죄 받을 수 밖에 없는 어두움의 일꾼들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죄의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끌어 죄를 용서받게 하려는 열심인가 정죄하고 참소하는 데 열심인가에 따라서 우리의 모습이 어디에 속했는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고 사울과 바울의 차이로 나타날 수 있다.



Ⅱ. 주님의 일꾼이 되려면 반드시 경험해야 할 모습이다.(3~6)

(3)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든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 조차도 이러한 경험은 반드시 겪어야 할 일생일대의 귀중한 경험이다. 쉽게 말하면 주님을 가까이 구체적으로 만나는 경험이다. 이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의 집에서의 경험이 될 수도 있고 주님의 일을 해보겠다고 열심 내는 과정에서의 경험 일 수도 있고 예배를 드리는 과정에서 일 수도 있는 모두가 장소나 시간이나 위치는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각자 주님을 만나는 경험은 같을 수 없다. 또 모두가 이와 같은 구체적이거나 생생함이 아닐지라도 나에게도 다메섹의 경험은 있어져야 한다.

①주님의 공의를 실현하려는 가운데 있었던 경험이다.(3) 사울의 입장에서는 잘못된 사람들을 징벌하려고 가는 도중이었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자신이 문제가 많았고 그러므로 공의의 집행자였던 자신이 법정 구속되는 것과 같이 의기양양하게 다메섹에 들어오던 사울은 이제 사람에게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②비록 자신을 핍박하는 일꾼이지만 주님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셨다.(4) 그것은 주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 속에 사용될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15)

③자신이 섬긴다고 확신했던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5) 나름대로는 주님의 훌륭한 일꾼이 되려고 준비해 왔지만 그러한 모든 것들은 순화되고 변화되기 전에는 하나도 제대로 쓰이지 못할 것임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④구원과 회복을 위해 그의 종에게 가도록 명령하신다.(6) 주님께서 직접 구원하지 않으시고 그가 잡으러 왔던 대상에게로 보내신다. 그는 주님을 직접 만나고 음성도 들었지만 아직은 구원받지 못했다.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행22:16) 반드시 사람을 통해서 역사 하시는 주님 이심도 감사해야 하고 다른 사람의 구원에 작게 라도 사용함을 받았다면 감사해야 할 이유이다.

주님을 섬기고 따르기 위해 세상의 어떤 과정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주님과 자신의 인생의 벌거벗은 부분을 내어놓고 의논하는 이런 바울과 같은 경험은 주님의 일꾼들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꼭 이렇게 바울에게처럼 신비스럽거나 어떤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Ⅲ. 주변의 사람들과 자신의 차이를 본다.(7~9))

(7)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신앙적이고 영적인 경험은 절대로 다른 사람이 꼭 같이 경험하지 못한다. 이런 입장에서도 하나님과 각 사람은 따로 따로이다. 바울의 이 엄청난 경험이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전달되지 못함을 보게 된다. 때문에 사울과 주변의 사람들은 전혀 다른 상황이었음을 보게 되는데 이것도 신앙 속에서 반드시 생각해 봐야 할 귀중한 과제이고 이런 것들을 이해 함으로서 서로를 배려하게 되기 때문에 중요하다. 나와 같은 경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을 무시해서는 안되고, 남의 경험만을 부러워 할 필요도 없다.

①주변의 사람들은 단지 간접적인 것만 경험할 뿐이었다. 이것은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이 주님의 약속대로 성령을 받을 때도 그러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까지 오해하기도 했다.

②과거의 보던 것들에 대해서 눈이 감겨버렸다. 원수 시 하던 사람들도 영광스러웠던 것들도 모두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③식음을 전패하고 만다. 지금까지의 종교적, 인간적인 취미를 다 멀리하게 되었다.(빌3:7~8 무엇이든지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 모두 해로 여길 뿐만 아니라,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귀하고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뿐이다.). 436:2 “주안에 감추인 새 생명 얻으니,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하늘의 은혜와 평화를 맛보니, 찬송과 기도로 주 함께 살리라”

우리 각자에게 있어서 현재는 사울에서 바울인가 아니면 바울에서 다시 사울이 되어가는가를 우리는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모습이다. 나는 나름대로 주님을 섬기고 위한답시고 열심을 가지고 있는데 갑자기 주님께서 나를 향하여 “~ ~야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물으신다면 어쩌겠는가!

그리고 나를 부르시는 다만 두려움으로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고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물을 수 밖에 없다면 어떻게 하겠는가를 신중히 생각하고 고민해야만 할 과제이다. 바울은 구원을 말하면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신뢰관계 속에 있지 않은) 어찌 부르리요…”(롬10:13~14) 라고 경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