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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8:35~39 2012-11-18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꾸준히 종교생활을 하던 사람이 복음을 듣고 그 복음에 반응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의 은혜를 힘입어 거듭난 사람이 되어 행복한 인생이 되는 가장 사실적이고 현장감 있는 역사를 오늘 읽었다. 사실 성령의 역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가는 사도행전 속에는 이런 박진감 있는 사건은 더러 나타나고 있다.

유대인으로 개종한 에디오피아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재무장관이었던 이 내시는 자신의 업무인 국정의 일 못지 않게 예루살렘의 절기를 오가며 비록 흔들리는 마차 위에서이지만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찾기 위해 늘 애썼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을 만나 주님의 복음을 듣고 거듭나기 이전까지는 예루살렘의 행사에 참여할 때뿐 자신의 일상에 돌아가고 나면 다른 변화는 없었었던 것 같고 사실 이것이 대부분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안타까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산다고 하는 주님의 백성들조차 이런 삶을 반복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는 여러 가지 상황의 차이가 있을 것이지만 주님의 약속을 따라 거듭 나지 못했거나 거듭났다고 하면서도 약속으로 와 계시는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참으로 이 한 순간에 인생이 바뀌는 놀라운 은혜의 체험을 우리 모두가 할 수 있기를 바라고 그렇지 못하다면 어디에서 무엇이 잘 못되었는가를 점검하여 이 내시이지만 행복한 인생이 되는 …



Ⅰ. 복음 증거와 그에 대한 반응…(35~36)

(35)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36)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이 사람은 수없이 예루살렘을 왔다 가면서도 이전까지는 진정한 복음을 듣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는 빌립을 만날 당시처럼 다만 기록된 하나님의 언약의 글을 읽을 뿐이었고, 독경하며 마음을 가라 앉히려는 사람들처럼 고국으로 돌아가면서도 오실 메시야의 약속을 허탈하게 읽었을 뿐이었고 하나님에 대한 간절함과 순종하려는 이 가련한 인생을 주님은 빌립을 보내심으로 응답해 주신 것이다.

다행히도 그는 메시야의 구속을 위한 희생을 기록한 곳을 읽었다. 32절에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53:7~8)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35)라고만 기록하고 있고 빌립이 전한 복음의 내용은 기록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여기에 반응하는 이 사람의 응답에서 그 복음이 무엇인가를 우리로 하여금 이해하기 한다.

①이 글에서 시작하였다. 모든 길은 로마로 라는 일반적인 말처럼,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게 되어 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39) 다시 모세 오경을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46)

②예수를 가르쳤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인류 모든 죄인들에게 증거하고 가르쳐야 할 이름은 예수이다.

율법주의자였던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9:20) 사도행전에 계속 같은 내용이 전개되어 간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11:20) 가장 유효한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것이다.

육신의 건강과 평안을 전한다고 해도 그것은 다만 그리스도를 배우기 위한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범죄한 모든 인류에게 가르쳐야 할 이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선택하고 거절하고는 듣는 각자의 책임이고 인류가 그렇게도 기대하고 고대하는 생명의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만 나온다.

③복음을 전하였다. 그야말로 좋은 소식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과연 빌립이 전한 복음이 무엇이었을까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그 복음을 들은 사람의 반응에서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거기에 대한 반응이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36) 한 것이다.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는 물음은 빌립이 전한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에 응답하여 순종하는 자세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을 가르쳤을 것이라는 이해는 당연하다.

그럼으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으로 오심과 삶, 인류의 대속제물로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뿐 아니라 그 은혜에 응답으로서의 거듭남까지가 포함되었음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Ⅱ. 거듭남의 자격…(37~38)

(37)빌립이 이르되 네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가하니라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줄 믿노라 (38)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이 37절의 말씀이 우리 성경에서는 난외 주로 처리되고 있지만 대부분의 권위 있는 영어성경에는 본문으로 들어가 있다.[KJV, (RSV), (ASV), Webster, Living, 물론 N Version들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이 37절은 밥티스마를 받을 자세를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시가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라고 묻자 ‘그렇게 하자!’가 아니라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가하니라!”고 하였고 거기에 대한 응답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줄 믿노라!”는 확인을 받고 비로소 물로 내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 침례의 조건은 기간이나 교육여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합리적인 사람들의 생각은 어느 정도 신앙교육을 받은 다음에 세례를 받아야 지속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에 6개월 6개월 교육과 신앙의 행위를 확인한 후에 세례를 베푸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사실 직분을 주는 것을 이래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두움의 권세에서 호적을 바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먼저임을 성경은 가르치고 또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길을 가다가 거나, 밤중에라도 요청하면 행하도록 되어 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의 가정이 과연 진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그러나 성경의 기록은 역시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16:33)라고 기록되고 있다.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38) 사막의 여행자가 마실 물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라든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한 것은 분명 오아시스를 말하고 있다.

이것 역시 세례가 많은 물에 잠겨서 죽고 물에서 일으켜 부활에 일체가 됨을 의미하는 거룩한 예식으로 의미에나 보이는 면에서도 채워져야 함을 가르치는 중요한 예식임을 증거해 주고 있다.

구원의 이치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야 하늘의 이치와 세계를 깨닫게 되고 볼 수 있기 때문에(요3:3) 거듭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은 거듭난 이후임을 주님께서 증거해 주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이렇게 가르침이 지속되어야 하겠지만 지속적으로 신앙을 잘 하고 안하고는 분명 당사자의 책임이다.



Ⅲ. 거듭난 인생의 기쁨…(39)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어떤 변화 뒤에는 분명히 전혀 다른 결과가 주어지게 되는데 이 내시의 거듭난 삶이 그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빌립을 다른 곳으로 이끌어 가셨지만 내시는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행복과 기쁨으로 자신의 나라를 향해 계속 마차를 타고 갔고 그의 변화된 인생은 자신의 나라 속에서도 역시 빌립처럼 복음을 전했을 것이기 때문에 에디오피아 같은 나라는 일찍부터 복음이 전해졌음을 확인하게 된다.

“내시는 기쁘게[헬,(chairo) 유쾌하게 되다, (은은히)행복하다] 길을 가므로…” 비록 육신의 즐거움도 잘라버린 내시의 삶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은 다르지 않았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만난 사람들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기쁨으로 인생을 살게 됨을 이 사도행전에서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3:19한글)

같은 교훈은 역시 바로 앞장인 2:38에서의 구원을 요청하는 백성들에게 이미 선포한 바 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사람이 죄의 감옥에 갇혀있다가 거기에서 자유 하는 것보다 유쾌함이나 행복이 있을까를 생각하면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특히 기쁨의 시작이 “물에서 올라올새”였다. 죄를 물 속에 장사 지내고 이제 죄의 굴레에서 자유 한 가벼움으로 물에서 거듭난 생명으로 올라오는 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고 사심에 하나가 된 행복이다.

거듭난 생명은 이제 자신의 곁에 누가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다. 죄의 족쇄에서 풀려나 하늘을 나는 자유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꼭 같은 이런 감동이 아니어도 하나님의 약속은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