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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16:29~34 2012-12-02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사도행전의 성령의 역사와 함께 구원의 실제적인 모델이 자주 등장하는데 오늘 본문은 바울과 실라가 힘겨운 사건을 치르고 이루어지는 역사라서 더 귀하고 이 31절은 요한복음 3:16과 함께 만고의 역사 속에서 복음 선포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메시지이다.

결과만 읽었지만 여기까지 오게 되는 바울 일행의 움직임은 믿음의 사람들이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이지만 이렇게 간수의 집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과정은 너무나 눈물겨울 정도이다.

또 이렇게 목숨을 걸어놓고 전도한 가정이었기 때문에 나중 로마의 감옥에서 바울이 일생을 마칠 때까지도 빌리보교회는 물질과 사람으로 헌신을 다하는 것도 성경 속에서 우리가 읽고 배우는 모습이다.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묻지마 식의 가죽채찍을 맞고 칠흑같이 어두운 토굴에 갇혀진 바울과 실라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역사에 감사하면서 다음 이루실 일을 인하여 감사하고 찬양하였고 이러한 주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는 상황의 반전을 가져오는 모습을 바로 앞 절까지에 기록되고 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25~28)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이 아담 이후의 죄인들을 구원하는 놀라운 능력이 되었다면 먼저 구원받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서 이 십자가의 복음을 땅끝을 향하여 전파되게 되고 그제야 끝이 오리라는[마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주님 생전의 가르침도 그냥 되는 것은 아님을 생각하게 한다.

오늘 이 역사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라는 질문을 적어도 주님 다시 오시기 전까지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묻고 있다.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자연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두려움을 만날 때마다 어떻게 하여야 갑작스런 변화 앞에서도 태연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의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이런 물음이 없어 진지 오래인 것 같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문화와 과학이 이런 많은 위험과 변화의 요소를 없애주고 있다는 잘못된 믿음이거나, 아니면 오늘 믿음 생활하는 우리들조차 세상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망의 이유를 찾을 수 없어서 일 수도 있다.

우리가 비록 바울과 실라처럼 믿음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불신의 사람들이 빌립보의 간수처럼 물어올 수 있는 복음에 쓰임 받는 …



Ⅰ. 구원을 필요로 하는 죄인의 모습 그대로를 본다.(29~30)

(29)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30)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지금까지 이 간수는 많은 사람을 착고에 채워 토굴에 가두어 봤을 것이고 당연히 그들의 반응을 수없이 보아 왔을 것이다. 그래서 가둔 후에는 차라리 잠을 청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두 사람은 그 많은 사람들과는 너무도 달랐고, 마치 수없이 사형집행을 해봤지만 억울하게 죽으면서도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말씀하시고 운명하신 후에는 무덤이 터지고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놀라운 광경을 보고 “그는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를 외쳤던 백부장처럼 이 간수도 기도와 찬양하는 것을 듣긴 했는데 참에서 깨어보니 나타난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의 장본인이라고 믿어지는 이 2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어쩌면 이럴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1.어두움에서 빛이 필요한 사람이었다.(29f)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이것은 어쩌면 또 하나의 상징적인 행동일 수 있다. 어두움의 역사 속에 위기를 당하는 인생들은 빛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주님은 그의 일꾼들에게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눅12:35) 당부하셨고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눅15:8)

2.상황에 따라 자세가 바뀌는 모습이다.(29b) 매질하고 고문하던 대상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상황과 처지에 따라 처신하는 죄의 공포에 사는 지극히 일반적인 죄인일 뿐임을 본다. 두려움은 불신에서 오는 것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그러나 이 사람이 구원 받은 후에는 상황과 처지에 따라 바뀌는 자세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였을 것이다.

3.구원의 방법을 묻고 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에덴 이후의 모든 인류가 공통적으로 가지는 질문이다. 독특한 것은 여기 “선생들이여![헬, kyrioi (kyrios), ⓐ주님, 영광과 존경하는 칭호 ⓑ최고의 통치자 ⓒ소유주, 주인, ⓓ하나님의 사자로서의 천사]” 한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본 이 간수는 그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들인 바울과 실라를 주님을 대하듯 하였고 이런 일은 고넬료의 가정에 복음을 가지고 갔던 베드로에게도 고넬료가 그렇게 했음을 본다.

당시의 로마의 사법부의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간수는 여전히 자기가 수없이 가두었던 죄인들과 자신이 다르지 않은 역시 죄인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인류에 어떤 사람이건 막다른 상황에서는 모두가 마찬가지일 뿐이다.



Ⅱ. 복음 선포.(31~32)

(31)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32)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사도행전의 특징은 여기서도 볼 수 있다. 구구한 다른 이론이 아니라 에디오피아 간다게의 내시에게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8:35) 하였던 것처럼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소개하는 것뿐이다.

1.영원을 사모하는 인류에게 증거할 수 있는 효력이 있는 이름은 주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주님께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하신 것과도 연결되는 말씀이다.

바울과 실라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가 전할 소식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어떤 이론이나 사설보다도 우리 죄인의 몸을 입고 오셔서 죽으실 뿐 아니라 부활하시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사람들이 이 세상의 모든 죄인들이다.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죄의 전염이 무서운 것보다도 더 좋은 확산은 복음이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롬5:15)

2.모두에게 공평한 복음이다.(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고넬료의 경건이 그의 집안 모두에게 복음을 듣게 하였다면 오늘 이 간수의 집도 마찬가지이고 오늘 우리의 가정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역사의 마지막까지 죄와 저주를 향해 가는 사람들에게 전할 것은 질병의 치료도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이다.



Ⅲ. 구원의 응답과 기쁨.(33~34)

(33)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34)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이 가정은 낮도 아닌 밤 중에, 채찍에 맞아 성한 몸도 아닌 바울을 통해서 말씀을 듣게 되는데 응답에도 은혜가 보인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전해주기 전에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가 아니다. 그 안타까운 모습으로 말씀을 듣고 난 다음이다.

1.복음의 응답은 시간과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25)였으니 간수가 말씀을 들은 후인 “그 밤 그 시각”은 새벽 1~2시경이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세속말로 ‘달밤에 체조한다.’고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야말로 밤 중에 이상한 일을 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듣고 그 복음에 응답하는 것은 빠를수록 좋을 것이다. 사람은 다음 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행여라도 아직도 복음의 순종에 머뭇거리고 있다면 지체하지 마십시오. 주님께는 자신을 드리고 맡겨도 절대로 후회하게 하실 분이 아니시다.

2.역시 복음의 응답은 여기서도 다르지 않다. 바울은 예수를 전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한 것에 대한 반응이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라고 한 것으로 봐서 역시 복음을 자신의 것으로 누림에 주저하지 않았음을 본다.

3.주님을 영접한 이 집에 애찬과 기쁨이 충만 했다.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34) 여기까지의 신앙의 행위들이 그 간수의 집이 아니라는 것이 더 신기하다. 밤중인데 가족이 모두 모여 말씀을 듣고 세례를 받는 것이 가능한 곳에서 모든 은혜로운 역사를 이루었고 비로소 애찬은 자신의 집에서 대접하는 것을 본다.

비록 밤중이었지만 짜증이 아니라 그 집에 기쁨이 충만했음을 읽을 수 있다. 마치 빌립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왔던 에디오피아 내시처럼… 사실 거듭난 인생보다 행복이 있을까 싶다.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그리고 이렇게 찾은 기쁨은 영원히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접한 이 역사가 우리 자신의 역사가 되고 또 우리들을 통한 역사가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