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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눅 12:2~5 2013-10-13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 하라!  
사람들은 자신의 수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를 원치 않고 오직 영광스러운 것들을 넓게 알리기를 원하는 것이 죄에 익숙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런 이유에서 사람들은 어떤 대상이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알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어떤 것도 하나님께 감춰질 수 없다는 사실이고 그럼에도 죄의 속성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알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큰소리 치고 과장하고 떠드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두려움은 진정한 사랑 안에는 없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 결국 두려움은 형벌과 연결되어 있고 형벌은 재난과 죽음과 절망이 따른다.

그러나 두려움은 모두가 형벌에만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할 때 성경은 이것을 경외(敬畏)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공경함으로 두려워하는 것이다. 신앙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형벌하시는 분이라서가 아니라 존귀한 분으로 엎드려 경배하는 대상으로 두려워하는 것을 말한다.

이래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아닌 것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계신 것이다.

겁 없는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확인하고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마14:28) 하고 주님께서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29)다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바람을 보게 되자 “무서워 빠져 가는” 모습을 30절에서 보게 된다.

사실 사람이 무엇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두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래서 오늘 우리 각자의 삶의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오늘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과연 누구를 또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바로 진단되어야만 한다.

그런 이유에서 오늘 주님께서는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을 바로 선택하도록 우리에게 도전하고 계신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두려워하면서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그 인생의 영원에 엄청난 차이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Ⅰ.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가장 자주 기록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하나님 아닌 것들을 두려워하는 모습들도 더러 기록하고 있다. 바로와 같은 권력을 두려워하거나 자연 재해를 두려워하거나 보복을 두려워하거나 전쟁을 두려워하는 것은 물론이고 모세오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손에 붙여 주시는 사람들을 두고 겁내는 백성들에게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시는 말씀을 가장 자주 하셨다.

오늘날도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들은 다르지 않다. 죽을 질병에 걸릴까 두려워하고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권력을 두려워하고 살아갈 것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친구나 가족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직장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태풍이 올까 두려워하고 온 갓 주변의 모든 것이 사실 두려움 뿐이다.

이러한 인간의 나약함을 아시는 하나님은 주님의 명령을 가지고 가나안을 향해 진군해가는 여호수아에게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1:9)

그렇다 두려움으로 보면 세상은 겁나는 일과 두려움과 공포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격려와 위로를 가지면 우리는 비로소 강하고 담대할 수 있다. 결국 홀로 가는 인생은 두려움과 공포뿐이다. 왜냐하면 죄의 형벌을 두려워하는 것에 익숙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OT에서 신명기20:3에는 이런 공포의 요소들을 다 표현하고 있는데 그 의미들을 살펴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들을 읽어볼 수 있다. “말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가 오늘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말미암아 놀라지 말라”

①겁내지 말며[히, rakak 부드럽게 되다, 약하게 되다, 연하게 되다] ②두려워하지 말며[히, yare, 경외, 압도되어 엎드리다] ③떨지 말며[히, chaphaz, 일순간의 공포, 뛰다, 급히 도망하다] ④놀라지 말라[히, arats, 떨다, 마음이 꺾이다, 몹시 흔들리다]

오늘 본문 4~5절의 ‘두려워하지 말라’거나 ‘두려워하라’[헬, phobeo, ← phobos, 테러를 당하다, 경악하다, 놀라다, 경외하다, 두려워하다, 무서워하다] 등등의 의미를 가진다.

결국 신앙한다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의미를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막4:40)라는 말씀에 나타난다.

바울 사도는 이를 좀더 신앙과 관련시키는데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3:18) 하였고 디모데후서1:7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라 했는데 여기에 분명한 대조가 나타난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신1:17) 즉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보이는 세계나 어둠에 속한 세계를 겁내지 말라는 당부를 주신다.

죄와 어두움이 지배하는 이 세상은 우리 사면에 깔려 있는 것이 두려움뿐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은총으로 죄 사함 받아 수치를 벗어 버리고 능력의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죽음의 공포를 벗어버린 주님의 백성들에게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우리를 우리 되게 하신 하나님 외에는 있어서는 안된다.



Ⅱ. 어떤 것도 영원히 감춰지지 않는다.(2~3)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본문 첫 부분의 두려움에 대한 바탕이 죄의 수치가 드러나는 것에 대한 공포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범죄한 아담처럼 자신의 수치를 감추려고 하지만 사람들 앞에는 숨길 수 있고 덮어둘 수도 있지만 결국 하나님 앞에는 감출 수 없음을 강조하고 계시다.

마10:26~28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면서 그럼에도 붙여지는 내용은(29~33) 두려워 하지 말라는 당부를 주님께서 주시는데 이유인즉 주님을 생명의 주님으로 언제 어디서나 시인하는 자들은 영원한 천사들 앞에서까지 보호를 약속하고 계신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어느 곳에서 누구든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뿐이라는 고백과 시인으로 산다면 두려워할 대상은 없다는 말씀이다. 오늘 우리도 같은 믿음의 사람이라면 그래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이 순간의 삶이 아니라 영원 속에서의 수치가 드러나는 것에 대해 더욱 두려워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계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의 수치를 대신 십자가에서 감당해 주셨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하잘것없는 이 세상의 명예나 권력이나 재산의 가치를 지키려고 하나님 아닌 것들을 두려워한다면 결정적으로 주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셨을 때 감당할 수 없는 수치의 두려움을 감당해야만 할 것을 말씀하신다. 오늘 나(우리)는 어떤가!



Ⅲ. 죄를 들여다 보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 해야 한다.(4~5)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여기서는 주님께서 더욱 친밀하게 당부를 주신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4f) 하셨는데 요한복음15:15에서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는 말씀에서 주님의 보다 깊은 사랑과 배려를 이해하게 된다.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4b) 세상의 모든 두려움의 대상이 할 수 있는 한계는 아무리 심해도 육신의 생명을 빼앗는 것 이상은 더 할 수 없음을 가르치신다. 이 말씀은 육신의 생명 잃을 각오로 임한다면 두려울 것이 없다는 말씀이고 이 역사 속에서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기꺼이 그렇게 하였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히11:35) 라는 기록이 성경 속의 사람들에게서 이를 증거하고 있고 믿음의 천로역정의 길을 걸었던 역사 속의 수많은 순교자들이 또한 그런 각오와 용기 때문에 믿음을 버리지 않았음을 본다.

믿음에 있어서 늘 중요한 것은 이 순간 즉 보이는 것은 잠깐인 이 세상보다는 영원의 가치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믿음의 삶이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5f) 주님께서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할 자를 소개하고 계신다. 보이는 세계뿐 아니라 영적인 세계에서도 절대적인 권세를 가지신 분을 말씀하심을 읽는다.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5b) 죽은 후에도 영원한 형벌 속에 정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두려워하라는 말씀이다. 물론 이러한 형벌의 장소는 사람을 멸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곳은 아님이 분명하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25:41)

우리는 영적인 사람들 즉,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하면서도 짐짓 하나님 보다는 세상을 의식하는 경우가 더 쉽고 많다. 그러나 두려움의 이유인 죄를 해결 받은 은혜의 사람들이라면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바로를 두려워하거나 가나안을 정탐하고 그 백성들을 무서워하거나 베드로처럼 풍랑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신앙하는 사람들은 함께 신앙하는 사람들(전도자, 집사 등등)을 두려워하거나 구별된 성도로 세상에 살면서 권력이나 돈이나 질병 어떤 것도 믿음으로 정복해야 할 대상일 뿐이지 두려움의 대상은 아니다.

우리를 죄에서 자신의 피로 사시고 우리가 당할 수치를 십자가에서 대신 담당하신 우리의 감추어진 것들과 마음과 생각을 꿰뚫어 보실 수 있는 하나님만 두려워한다면 이 세상에서는 그 어떤 거들도 두려움의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7~39)는 바울 사도의 고백은 단순히 우리의 기분만을 좋게 하려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 실제적인 약속임을 확신하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의 영과 혼을 아울러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만 두려워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