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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눅 22:31~34 2013-10-20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오늘도 주님께서 직접 주시는 교훈을 생각하고자 한다. 아마 대부분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제목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고 사실 이 말씀은 그다지 듣기에 행복한 말씀은 아님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 극단적이고 부정적인 말씀 역시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까지 기록으로 남기셨음을 확신할 수 있다.

이 말씀을 마태나 마가는 스가랴13:7의 예언의 성취로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기록되고 있고 요한복음에서는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주님을 따르겠다는 베드로의 고백에 대한 주님의 답변이시다.

사실 이 말씀이 어디에서 출발했는가를 살펴보면 주님을 거절하거나 부인하게 되는 근원이 어느 정도 나타난다.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24) 여기에 대해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25~26)고 교훈 하신 후에 주신 말씀이라는 데도 분명한 의미가 있다.

주님을 따르고 섬김에 있어서 교만은 언제나 문제가 됨을 예수께서도 수없이 지적하심을 가르침 속에서 자주 보게 된다. 영광의 보좌를 기꺼이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인간을 입으시고 모든 인류를 위한 대속 제물로 오신 주님의 희생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주어졌고 그러한 세상과는 다른 공동체인만큼 역시 ‘누가 크냐!’는 다툼은 결과적으로 주님을 부인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기 때문에 주님과 같은 희생으로 받들고 섬긴다면 당연히 주님을 부인하는 불경건까지 이르지 않아도 됨을 이 말씀의 결론으로 먼저 생각하게 된다.



Ⅰ. 넘어질까 조심하라!(31~32)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바울 사도의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는 당부는 바울 사도 자신의 경험이자 모든 신앙의 사람들에게서 일반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일들에 대한 경계이다. 베드로도 복음서에 나타나는 모습들을 볼 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고 사실 주님 없는 사람이었다면 실패하기 안성맞춤의 인물이었다.

①사탄에게 체질 당한다. “까부르듯[헬, siniazo, (체)에서 유래, 체질하다, 체로 치다, 걸러내다]” 이것은 대개의 경우 성령의 의지를 따르지 않는 데서 육신의 사람들에게 발생할 수 있는 가장 흔한 일이다. 마치 욥에게 나타났던 사탄이 욥을 참소하듯이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다.”고 주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신다.

물론 베드로는 당시 아직 성령의 지도를 받지 못한 때였기 때문에 안타깝지만 주님께서 멀찍이 계시고 종들 틈에서 불에 자신의 몸을 녹이는 별로 심각하지도 않은 상황임에도 ‘그를 모른다. 나는 아니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거나 저주하고 맹세(마26:74; 막14:71)하면서 까지 하며 주님과 같은 편이 아니라고 항변을 하고 있는 모습이 공관복음뿐만 아니라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고 있다.

오늘 우리도 세상의 어느 장소든지 체질 당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밤낮 참소하는(계12:10) 마귀 사탄의 간교한 참소에 이용되지 않기 위해서 늘 조심할 필요가 있다.

②주님의 기도 때문에 보존된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32f) 우리는 구원에 관한 한 어떤 것도 한 것이 없다. 주님께서 우리의 저주를 십자가에서 친히 감당해 주시고 그것을 나의 죄와 저주를 위한 것이라고 믿고 일러주신 방법대로 순종하여 거듭났을 뿐이지 자신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거기다가 신앙을 지켜가고 보존하는 것조차 사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지켜가는 것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자긍하지 말아야 될 이유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롬11:18)

주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하셨듯이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영양소를 공급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에 살고 지켜갈 수 있는 것뿐이다.

③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망을 제시 하신다.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32b) 언제나 처럼 주님은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보는 어떤 것에서도 소망을 말씀하신다. 비록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기는 하겠지만 돌이키겠고 그런 후에는 형제들을 굳게 할 것이라는 시간을 넘은 선언을 해주고 계신다.

과연 베드로는 그러했고 예루살렘 교회 속에서 많은 유익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최초의 이방인의 구원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베드로가 해냈다. 물론 주님을 부인하고 돌이키는 베드로의 모습을 모두가 흉내 낼 수 없고 낼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 각자의 과거 베드로와 같은 실수가 있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매여있을 수는 없다. 과거의 실수를 잘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래를 어떻게 다시 거역하지 않을 것인가 기도하고 이제는 보다 주님의 십자가에 유익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도 성령 없는 베드로처럼 큰소리 치고 자만 하기보다는 주님을 부인하고 거역한 것은 과거로 족하고 주님의 은혜 때문에 지금도 계속적으로 나의 믿음이 지켜지고 있음을 확신하고 보다 소망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도구로 역할 하는…



Ⅱ. 죽을 각오를 해도 부인할 수 있다.(33)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신앙에서는 늘 自己過信이 문제이다.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고백하는 자세는 필요하지만 자신에 대한 신뢰나 믿음은 위험하다. 각각 다른 형편에서 믿음의 자세는 때로 유리할 수도 불리할 수도 있다. 그런 이유에서 솔로몬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하였고 바울은 온 갓 은사와 하늘의 선물을 가졌다고 氣高萬丈 하는 고린도교우들을 향하여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8:2) 라고 경고한 바 있다.

라오디게아 교우들 스스로의 평가는 “…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계3:17f) 하지만 주님께서 보실 때는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3: 17b~18) 하셨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주님 앞에서는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33) 할 수 있지만 세상은 그렇게 녹녹하지가 않다. 나중에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게 되는 상황을 보면 우리도 조심해야 함을 알게 된다.

나중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게 된 상황을 보면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이나 제사장들 때문에 부인 하는 것이 아니라 마태, 마가복음에서는 앞의 두 사람은 여종으로 그리고 마지막 사람을 ‘곁에 섰던 사람들’로 나타나지만 귀한 신분의 사람들이 아니라 종들이었던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수제자 라는 베드로가 그럴 수 있었을까!’ 흥분하지만 우리 역시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다. 별로 심각하지 않은 것에서도 그리스도인임을 부정하는 경우나 하찮은 이유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파는 것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사실 우리의 마음과 입술의 고백과 삶이라는 3D의 신앙이라야 비로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이 될 것이다. 지난 시간에도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나 주님을 시인하는 믿음의 삶이 되어야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세상의 어떤 세력이나 영광도 부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드린 바 있다.

그러나 성령을 의지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들의 입술의 고백은 충분히 위험할 수 있음을 이 말씀은 우리에게 경계를 주고 있다. 베드로 사도가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라고 당시에 말한 것은 결코 주님을 속이거나 단순히 주님께 듣기 좋게만 하려고 한 고백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고백이 주님의 우려 섞인 예언의 답변을 들었던 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모두 베드로처럼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라는 고백을 드릴 수 있기를 바라고 주님께는 “그래 너는 충분히 그럴 것이다!” 라는 응답을 들을 수 있는 …



Ⅲ. 오늘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경계를 헤아리자.(34)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사람들은 베드로가 여느 때처럼 주님 가까이에 있었어도 과연 주님을 부인했을까! 라는 추측을 해보기도 한다. 아니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가 멀찍이 주님을 따른 것이 부인하게 된 원인이라고까지 한다. 물론 그것도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의미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태나 마가가 증거하는 것처럼 주님의 예언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면 아직 영적으로 준비되지 못한 베드로에게도 분명히 문제는 있었겠고 또 모든 제자들이 다 도망 한 것으로 볼 때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주님의 구원의 과정에 OT에 예언된 말씀이 한 가지인들 성취되지 않은 것이 있는가 볼 때 메시아가 철저하게 배신 당하시는 예언의 성취가 먼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도 주님을 부인하는 것이 예언의 성취일 것인가! 할 때는 경우가 다르다. 이미 예언은 완성되었고 구속의 십자가의 희생은 한번으로 영원한 제사를 완성하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남는 것은 경계의 의미뿐임을 부정할 수 없다.

오늘 우리에게 닭 울기 전에 세 번의 부인은 꼭 같을 필요도 없고 맞출 필요는 더더군다나 없다. 또 여기 ‘오늘 닭 울기 전’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은 아니다. 베드로가 주님께서 잡히시고 모진 고문을 받고 계시던 그 밤이 새기 전에 세 번을 부인한 사실이 이 역사 속에 기록되어 남아 있는 것은 이 모든 역사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교훈이다.

‘닭 울기 전’은 우리에게 어쩌면 이 어둠의 역사가 막바지를 치달을 때 즉,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시간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베드로처럼 과거에 세 번 아니 그보다 많이 주님을 거절했던 사람도 오늘은 회개하고 주님을 시인한다면 주님의 예언대로 주님과 앉아서 이스라엘 12지파를 심판하는 자리에 있을 수 있을 것이다.(30) 그럼에도 이러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듣고 알고서는 같은 죄를 반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바울 사도는 2번씩이나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고전10:6) v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는 경계를 주고 있다.

베드로처럼 앞선 사람은 더 위험하기도 하다. 베드로가 주님을 멀찍이서 3번이나 부인 했다면 오늘 연약한 우리야 얼마나 조심하고 매 순간 성령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