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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7:1~5 2013-11-03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이 말씀은 누가복음과 이 마태복음서에 기록되고 있고 물론 비슷한 내용들은 복음서에서 더러 읽어볼 수 있는 말씀이다. 비판적이고 정죄하는 일은 결코 성숙한 신앙인에게서는 볼 수 없는 육신의 사람들의 모습이기 때문에 신령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는 감사와 긍정과 격려가 더 자유스러울 것이다.

비판하고 정죄하는 일은 결코 복되지 못하다. 주님께서 이런 권고를 하시는 대상은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사람들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일 것이다. 이들은 어떤 경우도 바르게 행하시는 주님을 칭찬한 적이 없이 언제나 주님과 제자들에게 비판할 것만을 찾는 데만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어디에 속했는가에 따라서 소속된 곳의 모습이 나타나고 이런 이유에서 병행되는 누가복음 6장에서는 이 말씀에 연이어 열매로 나무를 알고 각 사람은 그 쌓은 것을 밖으로 나타낸다는 교훈을 주고 계신다.(43~45) 이러한 삶의 형태가 빛과 어두움의 모습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자신이 신앙 속에서 칭찬과 격려의 사람인가 비판과 정죄의 사람인가를 살필 필요가 있다. 주로 나타나는 자연적인 모습이 나 자신의 사실적인 모습이다. 주님의 십자가로 얻어진 귀한 생명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도 귀하고 귀하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진리를 따르려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위로하셨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12:32)

그러나 밤낮 참소하는 마귀의 성품을 버리지 못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는 무서울 정도의 책망과 정죄를 하셨다. 사실 자신이 밝으면 대부분 밝게 보게 되고 자신이 어두우면 어두운 면이 더 잘 보인다.(눅11: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심지어는 자신이 죄성을 가지고 있으면 꼭 같은 입장으로 상대를 보고 대하기 쉽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자신을 살피라는 것이다.

사실 멸망 받아 마땅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다면[가능성]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절대적인 사랑 때문이며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 때문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의 백성 된 우리가 또한 아버지의 성품을 따라 섬긴다면 모든 것이 바울처럼 감사와 기쁨뿐일 것이다.

정죄와 어두움의 세력에서 빛의 자녀가 된 우리 또한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시는 바울 사도의 권면을 들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말로 정죄하고 비판하는 부정적인 모습보다는 빛 된 삶으로 우리의 삶의 빛으로 인하여 옆의 다른 사람들의 어둠이 들어나고 회개를 가져올 수 있는 빛의 자녀로 살아야 할 것이다.

이 말씀과 더불어 격려의 사람인가, 정죄할 것만을 찾는 바리새인인지를 살펴서 사람들에게나 주님으로부터 지속적으로 격려하고 칭찬을 주고 받는 빛의 자녀들로 …



Ⅰ. 비판이나 헤아림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다.(1~2)

(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사람들은 누구나 없이 사람은 물론이고 하나님으로부터도 칭찬과 좋은 평가를 듣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네가 비판을 받고 싶지 않다면 비판을 삼가 해야 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내가 한 비판이 결국 내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리석게 비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각자가 비판을 많이 했는가 칭찬과 격려를 많이 했는지 헤아려보면 미래의 내가 받을 것을 알게 될 것이다.

①비판이라는 단어 자체가 우리 사람에게 어울리는 용어가 아니다. [비판, 헬, krino, 결정하다, 언도하다, 벌하다, 복수하다, 결말짓다, 정죄하다, 비난하다, 판결하다, 간주하다, 고소하다, 정하다, 심문하다, 선고하다, 심의하다] 판단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부정적으로 하면 마귀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2:1)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약4:12)

②내가 잰 척도로 계산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의 하나님으로 죄의 저주에 있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독생자를 내어주셨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역시 긍휼의 척도로 모든 사람들을 대할 것이고 이것 또한 하나님의 자녀 된 모습이다. 바리새인들이 책망 받은 이유는 자신들은 하나님을 들먹이면서도 하나님의 긍휼이 그들에게 전혀 없었고 그들의 척도는 자신들이 잘 안다고 하는 율법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속을 들여다 보신 주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마23:2~4) 라고 증거하셨다.

그들은 세리와 창기를 비판하고 정죄했지만 그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으로부터는 무서운 책망을 들었다.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2b) [헤아리다, 헬, metreo, 측량하다, 계량하다, 측정하다] 그들은 자신에게 대는 잣대는 아주 관대하고 남들에게 대는 잣대는 엄격을 넘어섰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2:13)

첫 번째의 경계는 남에게 냉혹하게 대한 것이 나중 주님께 냉혹한 판단을 받게 될 것이라는 무서운 교훈이다.



Ⅱ. 눈에 들보로 막혀있는 사람이 남의 눈의 티를 빼주겠다고 한다.(3~4)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바른 진리에 있지 못한 사람을 바로 세워야 하는 것은 성경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는 교훈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아닌 경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세속적이기 때문에 상대를 자신과 같이 기준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티나 들보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아니지만 지나칠 정도의 비유로(들보가 눈에 들어 갈 수 있는가!) 영적으로 이해할 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경계의 교훈으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의 관점에서 사람의 언어로 표현하는 내용이라서 그렇다. 주님의 교훈을 거역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과거를 회개하고 주님을 따르는 세리와 창기들을 정죄하는 형태가 이와 같은 경우가 될 것이다.

사실 자신의 눈 속에 들보가 막혀 있는데 상대의 눈에 티가 보인다는 것 자체가 문제이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고 명령하는 것 자체가 자연적인 모습이 못 된다. 때문에 사실이나 진리를 기준하지 않은 스스로의 짐작이나 자신과 같은 기준으로 상대를 경멸하는 모습으로 신앙에 있어서는 안될 모습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모두 그런 사람들이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죄 투성이의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런 우리를 감당해 주셨다. 아니 십자가 위에서 조차도 자신을 죽이는 자들에게조차 정죄하지 않으셨다.

주님의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눅6:39)는 것처럼 스스로 보지 못하면서 남을 바르게 인도하겠다는 이치에 맞지 않는 모습이다. 사람의 앞길을 본다고 하는 것은 눈이 밝아야 하고 이것은 단순한 세상의 앞날을 바라보는 데 대한 것이 아니라 영원에 관한 교훈이라 생각할 때 참으로 심각한 상태를 이름이다.

이것이야 말로 신앙의 연극을 하는 모습이고 주님께서 육신으로 오셨을 때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그랬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5)

신앙은 절대로 외식하는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 [외식하다, 헬, hypokrites, 가면아래 감추다, 말과 행동을 감추다, 배우, 무대연기자, 인체하다, 이중적인 모습을 가지다. 등등] 주님께 책망을 받았던 사람들이 그런 유의 사람들이었다. 거룩한척하면서도 속에는 탐욕으로 가득 찬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이 그런 이유에서 주님의 지적을 많이 받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신25:13~15) 당부하신 이유도 사는 것과 파는 것이 같아야 한다는 이중적이지 말 것에 대한 경계였다.

이런 사람인 까닭에 남의 눈에 티를 빼라고 큰소리 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이런 상태라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모습이다. 하나님을 의식하고서는 절대로 그러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다른 사람의 티(허물이)가 보이기 시작했다면 자신의 눈에 들보를 먼저 생각하는 주님을 경외하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그럴 때 늘 영적으로 밝은 눈을 가지고 주님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을 것이다.



Ⅲ. 자신의 말로 의롭다 함과 정죄를 받게 된다.(12:35~37)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병행구절인 누가복음에서 이 말씀의 말미에 붙어있는 말씀(눅6:45)이 이 마태복음에는 따로 기록되고 있다. 결국 이런 것은 한 순간에 그치지 않고 쌓여가게 되고 나중 자신을 심판하는 정죄의 이유가 된다고 말씀하신다.

그럼에도 비극적이지 않은 것은 선을 쌓아갈 수도 있다고 함께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은혜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거듭남으로 선을 쌓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할렐루야! 그리고 각자가 쌓아가는 것에 의해서 오늘의 행동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12:35)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이생에서 그치지 않는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12:36) 이세상에서 어리석게 사람의 관계 속에 유익이 되지 못하는 말을 한 것에 대한 심문(헬, logos)을 심판 날에 받게 된다는 말씀이다. 주님께서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헬, logos)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요12:48) 하신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함부로 말한 모든 것은 마지막 날에 말을 들을 것이라는 경계이다.

상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12:37) 우리의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한 모든 것이 마지막 날에 바로 나 자신을 정죄함으로 결과된다는 무서운 교훈이다. 이러한 말씀을 이해하고도 과연 남을 판단하려고 할 수 있을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말은 이만큼 중요하다. 그럼으로 죄인 된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에서 함부로 정죄하지 말고 주님을 의식함으로 말하고 격려한다면 오늘의 현실 속에서도 은혜로울 뿐만 아니라 영원 속에서도 정죄 받을 일이 없는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봄으로 일관된 복된 삶이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