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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눅 17:11~19 2013-12-15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주님께서 늘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오가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셨고 이런 여행 중에도 귀중한 역사들이 많이 일어났음을 보게 되는데 주로 사람들을 만나고 새 삶을 부여하시는 은혜의 역사로 대표적인 예는 요한복음 4장의 수가성의 여인과의 대화 같은 내용들이다.

이번에도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중에 사람들 특히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없어서 굴이나 움막 같은 데서 짐승과 다름이 없는 삶을 잘고 있었던 나병환자 열 사람이 어느 마을에 들어 가시자 주님의 가시는 앞에 엎드려 긍휼을 구하게 된다.

이들이 마을에 나타나는 것 조차도 쉽지 않았을 것이고 산간벽지에서 주님을 만나게 된다면 오히려 제자들을 비롯해서 더 두려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에베소서2:4에 보는 대로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하였는데 우리 주님은 긍휼에 풍성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러한 경우에도 거절하지 못하시고 사람의 삶을 잃어버린 가련한 이 사람들에게 치료를 선포하셨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4)

예수 그리스도의 특징 중 하나는 주님 앞에 요청하는 자가 간교한 마음이나 시험하지 않는 이상 누가 요청해도 거절치 않으셨다는 사실을 복음서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이 말은 우리도 진실과 감사로 확신하며 구하는 것을 역시 거절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다루게 되는 이유는 모두가 다 은혜를 받았음에도 그 은혜에 감사로 응답하는 사람은 10%에 불과 했다는 사실이다. 은혜를 입었음에도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은 우리 말로 배은망덕이라고 한다.

오늘 날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사실 背恩忘德(남에게 입은 은덕을 저버리고 배신하는 태도)을 행하고 있다. 사사기에서 읽는 것처럼 절망 가운데 부르짖으면 거기서 구원해주고 나면 다시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을 섬기고 구원해 주신 주님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런 모습은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은 은혜의 주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또한 질투하시는 하나님이기도 하다. 그럼으로 은혜 받은 것에 대한 감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이시라는 사실도 오늘 본문에서조차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 모두에게 은혜 주시기를 기뻐하시고(요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그 받은 은혜로 인하여 감격하는 모습은 더욱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오늘도 우리가 바울로부터 “…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4:7)는 경계를 들을 수 있고,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6:1)는 책망을 들을 수도 있다.

오늘 나는 이 열명의 나병환자와 다름이 없는데 과연 한 사람에 속하는지 아니면 아홉 사람에 속하는지 헤아릴 필요가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감사로 응답하는 사람이 아주 적은데 나는 과연 어느 편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 되게 하는 것은 받은 은혜에 감사로 응답하는 것이다.



Ⅰ. 은혜를 사모하는 자가 되라!(11~14)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은혜는 특정한 사람들만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로부터 버려진 사람들까지 은혜를 바랄 수 있다면 과연 하나님 아버지께 은혜를 구하지 못할 사람이 있겠는가!

사회로부터 버려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도 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이야 말로 잘못된 바리새인들의 엄청난 착각이었다. “…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b)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롬4:18)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받았기 때문에 선물 즉, 은혜라고 하는 것이고 과거로부터 믿음의 사람들은 한마디로 이야기 하면 ‘은혜 받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라합]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이 말씀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오기를 바라신다는 하나님 아버지의 소원을 표현하는 것이다.

①다만 주님의 긍휼을 구하였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13) 어떤 사람들은 신랑감도 구체적으로 구하라고 한다. 나병환자들이 바라는 것은 당연히 자신들이 불치의 병에서 고침을 받는 것이지만 그러나 자신들보다 더 그들의 처지를 더 잘 아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에 다만 그 긍휼이 필요한 문제를 주님의 손에 올려 드리는 데 까지만 구했다.

그럼에도 이들의 자세는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12→13) 자신들의 처지로 주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었지만 열 사람이 함께 소리를 높여 형편을 하소연하는 기도의 모습은 오늘 성한 우리가 본받아야 할 기도의 열정이다.

②벌써 치료를 선포하신다.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4) 주님께서는 그들의 일그러진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소리만이 아니라 그들의 애절함을 보셨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이것은 문둥병이 나았을 때 사회적인 지위를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조치였다.(레13~14장) 이 주님의 말씀을 들은 나병환자들은 자신들의 상태도 확인하지 않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상태보다 주님의 명령과 약속이 중요하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여기에 모범을 보이셨는데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요12:50f)고 말씀하셨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보이는 현실보다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약속, 거짓일 수 없는 언약이시다.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14b) 분명히 주님께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을 때는 이미 낳았기 때문일 것인데 이들은 들뜬 나머지 제사장으로부터 “너는 이제 정결해 졌다!” 라는 선언을 듣는 것에 들떴던지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야 깨끗해졌음을 알게 된다. 어떤 일들은 한참을 지내고서야 주님께서 그 일을 해결해 주신 것을 비로소 깨달을 때도 더러 있다.

어쨌거나 은혜를 사모하는 자라야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을 수 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Ⅱ.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믿음이 되어야 …(15~16)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열 사람 모두가 어쩌면 소망도 없이 사회로부터 버려지고 사람취급도 받지 못할 처지의 운명에서 온전히 은혜와 긍휼 때문에 삶을 회복 받았는데 거기에 대한 자세가 감사보다는 자신의 되찾은 이권을 즐기기에 바쁜 모습을 단적으로 보는 것이다.[90%가] 어쩌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너무나 자주 은혜를 누리기 때문에 은혜에 중독되어서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사실 우리 모두가 천국으로부터는 버려진 치료될 수 없는 죄의 문둥병에 걸린 자들이었고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치료를 받고 우리의 영원한 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 깨끗함을 선언 받기 위해서 보내졌지만 감사를 모르고 각자 나름대로 흩어지고 감사하여 예배하러 온 사람은 이 역사 속에서 겨우 10%에 불과한 이스라엘도 아닌 이방인들이다.

그래서 은혜 받은 사람들 중에 깨달은 “그 중의 한 사람”이 그 때나 지금도 중요하다. “그 중의 한 사람”은 바로 ‘자기가 나은 것을 본 사람’이다.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의 중요한 것은 죄의 저주에서 치료된 것을 보는 사람이다. 남이 아니라 ‘자기가’

깨달은 즉시 이 사람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15b) 13절에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소리를 높여 부르짖던 것 만큼 이제는 영광을 돌림에도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다 듣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으실 수 있도록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왔다.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도 당연히 있어야겠지만 이 주어진 은혜를 은혜로 여기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고전15:10f)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16) 이것이야 말로 예배이다. 구원의 감격을 하나님께 감격으로 엎드리는 겸손한 자세로 드리는 은혜 받은 자의 경배야말로 참예배이다.

그리고 붙여지는 말씀은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16b) 이스라엘의 아홉 명은 받은 은혜를 가지고 자신의 존귀를 회복하는데 돌아 갔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상종도 하지 않고 마치 개처럼 취급 받는 이 사마리아 사람은 은혜에 합당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고 있다.

이것은 또한 은혜에서 제외될 사람도 없지만 예배에 제외될 은혜 받은 자도 없음을 일깨워 주고 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께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4:20) 하였지만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바로 예수 앞에서 예수로 말미암아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 그렇다. 예배는 죄인이었든지 어떤 처지에 있던 사람이든지 거듭난 사람으로 회복 받고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우리 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당연히 중심이 되는 것이다.



Ⅲ. 주님도 감사할 줄 아는 믿음을 기뻐하신다.(17~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해서는 은혜를 은혜로 여기고 감사하는 사람들에게 넘치는 것이다.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후4: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17) 어쩌면 주님께서 영광을 돌리러 온 이 사마리아 이방인 한 사람에게 서운함을 그대로 드러내시는 것을 듣는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예배를 드리러 오지 못했을 주님께서는 “○○는 어디 있느냐?” 물으실 것이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22장의 왕의 혼인잔치에 어디서나 사람을 불러 참여시키고 나서 둘러보고 예복 입지 않은 사람을 바깥 어두움으로 쫓아낸 다음에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 하셨는데 은혜가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깨끗함을 받은 감격으로 하나님을 예배드릴 수 있어야 함을 깨닫는다.

그렇지 못하면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서 오늘도 동일하게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18) 탄식하실 것이다.

그러나 만사를 제쳐두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이 사마리아 인에게 주님은 “…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

앞에서 열명의 나병환자들이 긍휼을 호소할 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를 향한 걸음을 약속하신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주님 앞에 엎드리는 자가 영광에 들어 갈 것이다.

꼭 같이 은혜를 받았지만 9對1의 차이로 자신을 정결케 해 주신 주님께 영광을 돌릴 줄 아는 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아홉 사람, 오늘 나는 어느 편인가!

바울은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살전3:9) 했는데 이것은 적어도 ‘여러 가지 많은 감사가 있었고 그 중에서 어떠한 감사로 영광을 돌리며 보답할까!’ 라는 고백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각자도 지나온 세월의 흔적들이 주님의 은혜일 수 밖에 없다. 사실 오늘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 있음이 가장 큰 은혜라고 믿는다. 지나간 많은 은혜의 순간들 가운데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헤아릴 수 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