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눅 17:17~21 2013-12-22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  
주님께서 주신 비유 중에 가장 귀중한 교훈의 말씀이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과 회복의 비유를 이보다 더 절묘하게 표현한 곳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끝없는 사랑과 긍휼과 잃은 자를 기다리시는 심정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비유의 말씀이다.

그러나 오늘 나누려는 내용은 조금 다른 면에서 요점을 잡고자 한다. 이렇게 무궁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바탕이 되겠지만 그 사랑을 맛본 사람이 절망 속에서 그 은혜화 사랑을 추억하고 돌이키는 편에서도 이 비유는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부모를 거역하는 안타까운 상황에서 그러기 전의 경험과 누린 은혜가 다시 주님의 은혜로 돌아올 수 있게 한다는 중요한 교훈도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문화와 상당이 닮은 이스라엘의 자녀의 많음이 복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오늘의 시대처럼 달랑 두 아들만을 둔 이 아버지의 비유는 오늘 우리의 시대와 비교하기에 적절한 말씀이기도 하다.

두 자녀를 둔 이 아버지의 서로 상반된 두 아들의 모습은 또 오늘 우리 시대의 양극단의 절묘한 모습이기도 하다. 아버지 곁에 머물러 잘 순종하고 있지만 자신과 같지 못한 동생을 수용할 수 없는 자기 의에 빠져있는 큰 아들도 문제는 적지 않음을 보게 된다.

중요한 것은 부모의 믿음과 사랑 속에 어린 때를 보낸 사람이라면 비록 지금은 세상에 빠져있다고 할지라도 세상의 몰인정과 비극과 절망을 경험하게 될 때 그렇지 않은 신앙의 가정의 풍성함을 추억하며 다시 돌이키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보게 되고, 비록 부모와 머물러 있다고 할지라도 기쁨과 만족을 모르는 진정한 믿음의 맛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범죄하고 돌이키는 동료를 수용할 수 없는 비극적인 모습일 수도 있음을 이 말씀이 교훈해 주고 있다.

사실에 있어서 두 아들 모두가 다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극단적인 상황에서 조차도 모두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회복하는 그림을 여기서 보고 배운다.

또 다른 경계는 진정한 신앙으로 사랑하고 키우지 못한다면 이러한 극단을 통해서 돌이킬 수 있는 가능성조차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Ⅰ. 절망적인 상황에서 만족을 추억할 수 있어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주님을 떠나면 반드시 결정적인 상황에서는 주님 품을 그리워할 때가 있게 된다. 이런 소망조차도 없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삶을 포기하는 모습들도 더러 보지만 그것은 사실에 있어서 義의 道를 경험하지 못한 가련한 영혼들이다.

사람들에게는 어떤 계기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게 되는데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경험해 보고라야 아버지 집의 사랑과 은혜의 풍족과 세상의 비극을 대배해 보게 되고 어떤 것이 더 사람다움과 행복인가를 판단하게 된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헬, eis heauton de eldon,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정신을 제대로 차리다, 제정신이 들다]” 신앙의 사람들은 사실 세상에 정신을 빼앗기고 자신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세상에 빠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자신보다도 자신의 집에 일을 해주고 밥 벌어 먹는 사람들까지도 풍족히 누림을 되돌아 보고 있다. 가족이나 심지어 자식이 아닐지라도 풍족함을 누릴 수 있다면 나를 그 품꾼의 하나로 라도 집에 있고 싶어질 정도라면 얼마나 절박한 상황인가를 짐작하게 된다.

특히 그 풍족한 곳은 “내 아버지”이다. 아직도 자신을 아버지의 자녀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헬, apollymi, 멸망하다]” 결국 주려 죽을 수 밖에 없는 곳은 ‘여기’ 라고 표현한 아버지의 품을 떠난 세상이다.

아무리 귀한 것도 하나님 보다 귀하게 여겨서는 안되는 [아브라함에게 이삭] 이 부분이 사실 세상사람들에게는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하는 자세는 자녀들까지도 인식할 수 있을 정도가 되야 이런 반전을 기대할 수 있다.



Ⅱ. 자신의 위치를 바로 인식하고 있다.(18~19)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생의 현주소가 어떤 것임을 바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16) 신앙하던 사람들이 세상을 나갈 때는 ‘뭐 이런 것이 있었는가!’ 할 정도로 해보지 못했던 것들이 많다.

그러나 제대로 훈련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풍족하고 여유로운 주님의 품을 또 사랑과 용서가 풍성한 가정을 그리워하게 된다. 오늘의 세상이 풍요롭고 편리한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자신의 것이 없으면 모질고 거칠 뿐만 아니라 매몰차기까지 하다. 이것이 어쩌면 자본주의가 기본이 되어 있는 민주주의 체제하의 자유를 부르짖는 세상일 뿐이다.

다행히도 이 아들은 그래도 자신의 입장을 빨리 깨달았다는 데서 볼 때 아버지 밑에 있을 때 신앙훈련을 바로 받은 사람인 것으로 보인다. 또 이 정도만 현실을 바로 볼 수 있다면 그나마도 복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세상에 빠져서 자신의 사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18) 현재의 잘못된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지경이 되었는데도 일어나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리는 경우가 많다. 또 가야겠다는 결심은 말처럼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이 아들처럼 자신을 비워버리면 의외로 돌아가는 것이 쉬울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현실보다는 과거의 허상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결정을 미루거나 바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이래 봬도 … ’ 그러나 이 아들처럼 이 현실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어렵고 자존심 상하는 과제이다.

그런 입장에서 훌훌 털며 일어나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19) 라는 자존심을 버린 소탈함이 모두를 살게 하는 것이다.

이런 고백이 바로 시편84:10의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라는 말과 같은 모습이다. 사실 이렇게 마음먹는 것이 힘들지 이렇게 결심만 서면 이제 무섭거나 어려울 대상은 없다. 이래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주님을 모실 수 있는 첫째가는 비결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막8:34; 눅9:23)

우리 모두의 현주소는 과연 어디인가를 바로 판단하는 것은 신앙의 사람에게는 언제나 중요하다. ‘나의 자리인가, 있어야 할 자리인가!’ 냉정하게 자신에게서 찾는 것은 은혜 받을 수 있는 출발이다.

그러나 돌아갈 안식의 거처가 분명히 있어야 할 것이기에 우리 믿음의 가정들은 기쁨과 평안의 안식처로서의 가정이 되어야 한다. 모범은 되지 못하고 잔소리만 난무하는 부모나 격려는 없이 바가지만 긁어대는 아내는 자식과 남편을 세상에서 방황하게 만들 수도 있다.



Ⅲ. 신앙의 삶은 사실이어야만 한다.(20~21)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그러나 이러한 결심과 각오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이렇게 해보자, 저렇게 해 봤으면 …!’ 하는 결심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용감한 사람은 거기서 끝내지 않는다.

자주 말하는 내용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의 결심을 가지고 상주시는 분이 아니라 주님께서도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7) 말씀하셨고 바울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롬2:6~7)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10)고 확인해 주고 있다.

이 아들이 생각으로만 결심을 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아버지의 사랑은 확인할 수 없었을 것이고 여전히 비참한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에덴 후 사실 모든 사람은 이 아버지 집을 떠난 사람과 같이 자격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를 아들의 자리로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피를 흘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자신을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길을 마련하신 것이다. 할렐루야!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버지 앞에 돌아갈 자격이 없기 때문에 여전히 짐승의 먹이를 먹으면서 비참한 죄의 종의 자리에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탕진한 아버지의 아들의 자리는 확실히 회복되었기 때문에 생각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돌이키기만 하면 자녀의 권세는 회복될 수 있다는 확신을 이 비유 또한 주고 있다.

여기서도 아들은 자신의 결심을 그대로 고백하는 것을 본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21) 이것이야 말로 효과 있는 회개다.

이렇게 마음과 행동으로 돌이키는 회개야말로 거부하지 못할 은혜를 누리게 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22~24)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모습이지만 믿음으로 사는 부모들의 같은 심정이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는 잃어버린 것을 생각지 않으시고 얻은 것으로 기뻐하시는 분임을 배운다. 그럼에도 같은 은혜를 누리는 우리 사람들은 항상 얻은 것보다 잃은 것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직도 세상에 익숙해있는 모습이다.

부모의 입장에서뿐 아니라 모든 신앙하는 사람은 이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부성을 기억해야만 한다. 즉 언제나 잃은 것 보다는 얻은 것으로 감격하고 기뻐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도 많은 것을 잃고 이 자리에 온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얻은 것도 분명히 있을 것이므로 그 얻은 것의 감격으로 잃은 것을 덮어버릴 수 있을 때 비로소 항상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은 오늘 우리 교회는 물론이고 신앙하는 부모의 자녀에 대한 자세이자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표상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죄 됨으로 자격을 잃었다는 확실한 겸손으로 인한 회개 또한 돌아가는 자에게 있어야 할 자세 임도 배운다.

오늘도 여전히 방황하는 탕자들은 있고 이 문명이 최첨단의 시대인 만큼 신앙적인 가르침은 예전보다 분명히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돌아갈 집의 추억을 자녀들의 삶에 분명히 남기는 믿음의 교훈을 줄 수만 있다면 시대와 역사의 변화에도 이 회복의 은혜는 여전히 유효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