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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고후 4:7~10 2024-02-09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때로 믿음의 사람들은 마치 가상의 인물인 육 백만 불의 사나이나 원더우먼처럼 초능력을 가지고 사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능력의 사도라고 하는 바울조차도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2~13) 라는 고백을 듣는 데서 우리 자신에게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 사용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 교회당 건물이 한꺼번에 십만watts 이상의 전기를 송전 받아 사용할 수 있지만 0.5sqm의 가는 전선을 전가지고서는 전기히터 하나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믿음의 삶의 또 다른 비결은 ‘얼마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허락하신 능력을 잘 가져와서 쓰느냐!’ 하는 것이 전기를 당겨쓸 수 있는 것과 같은 믿음의 굵기이다.

실제로 罪性을 가진 사람에게 하나님은 능력을 주시지 않으셨고 그래서 하나님과 먼 관계의 사람일수록 창조주로부터 능력을 받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이고 어둠의 세력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악용하고 있는 것으로 속이기도 하는 것 같다. 마치 어둠의 세력의 능력을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성경 속의 교회에도 있었던 것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11:14~15)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살후2:9~10)

이래서 능력을 사용하는 것에도 분별이 필요함을 경계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물론 전혀 혼란을 겪을 필요가 없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 주신 기준과 하나님의 기뻐하는 것을 행하는가!’ 아니면 ‘어두움의 세력이 좋아하는 죄를 짓는 것을 쉽게 여기는가!’와 열매들을 통해서 구별이 가능할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능력이 아닐 경우는 대부분 자신이 능력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는 일들이 흔하다. 오늘 나누는 말씀을 통해서 이런 부분에서도 자유 할 수 있었으면 한다.



Ⅰ. 삶의 능력의 출처를 바로 알라는 당부이다.(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사실 이것을 바로 알지 못해서 사람들은 교만해지고 넘어지는 것을 본다. 바울 사도는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롬14:4)고 하여 주님의 일꾼들의 넘어짐이나 세움이 자신이 아니라고 증거하고 스스로 섰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경계하고 있다.

심히 큰 능력이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고 섬기고 살아간다면 겸손할 수 있고 더욱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후3:4~5)

왜 하나님께서 하찮은 인간, 바람에 불려 다니는 쭉정이 같은 인생들에게 “심히 큰 능력”으로 은혜와 생명을 주시는가! 그 원인도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라는 이유 때문이다. 여기는 보배와 질그릇이 대비되고 있다.

잘못 잡아서 노치기라도 하면 박살 날 수 밖에 없는 것이 이 어줍잖은 인생들이다. 차라리 다른 금속이라면 녹여서 다시 지어부으면 되지만 질그릇은 절대로 불가능하고 깨진 질그릇은 조심스럽게 철사 줄로 동여매고 깨어진 사이사이에 접착제를 발라도 보지만 흠집 난 질그릇의 상처는 절대로 원상태로 회복될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임을 알 필요가 있다.

그래서 상처받기 쉽고 한번 상처받은 질그릇은 그 흔적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에게도 서로에게도 이러한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이 가치 없는 질그릇들 속에 보배를 가지게 하셨다. 그래서 황송하고 감사하고 감격하는 것이다. 깨어지면 다시 회복조차 할 수 없는 이 구차한 질그릇에 보배를 담아주신 분은 다름아닌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시는 그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배를 담아주셨다는 사실이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큰 능력을 가지신 주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힘을 주신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40:29~31)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10)

이 보배가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복음이다. 우리 안에 담겨진 보배는 세상의 형편에 따라 시세가 변하는 금도 아니요 다이아몬드도 아니다. 영원 속에서도 영광스럽고 찬란하게 빛나는 세상의 경제와 상관없는 보배이다. 이래서 우리들이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가 되었다. 할렐루야!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릇의 이름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가치 없는 우리가 보배를 가졌으므로 보배 합이 되었다.

이 사실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다음에 앉으셔서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13:17) 말씀하셨다.

우리는 수시로 이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마치 이방인으로서 복음에 가입된 우리에게 주는 바울의 경계와 같다.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롬11:18]

오늘 내가 아직도 하나님의 자녀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 때문임을 기억하고 더욱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는 …



Ⅱ. 보배를 가졌기 때문에 주시는 승리…(8~9)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질그릇 같이 연약한 존재 그것이 처음 하나님께서 지으신 존재는 아니었다. 처음 사람의 창조시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 하였고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사람을 지으신 후에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고 감격하시는 것을 봐서도 처음부터 질그릇 같은 존재로 지음을 받은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결국 말씀을 거역하고 범죄함으로 영이 죽은 상태의 육으로 변한 사람이 비로소 질그릇이 되고 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여파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히9:27) 라는 안타까운 모습이 되고 말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회복되었어도 영광의 몸을 입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는 질그릇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생명의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사방으로 “우겨쌈[헬, thlibo, (월수들이 대적들이) 모여들다, 괴롭히다, 에워싸다]”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 엄청난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이 세상에는 어둠의 세력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우겨 싸려고 도단성에 엘리사를 에워싼 아람군대처럼 포위를 하지만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하늘을 열어 놓으셨다. 할렐루야!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헬, aporeo, 빠져나갈 길이 없다, 어리둥절하여지다, 의심 속에 있다, 어찌할 바를 모르다]” 마음을 떨구지 안하고 더욱 주님을 견고히 붙들 수 있다. 언제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를 짓이겨놓으신 사탄의 졸개들과 싸우기 때문이다.

언제나 능력의 주님 안에 우리가 거함으로 어떤 막다른 골목 같은 상황에서도 끝나지 않는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연약한 우리를 보시고 격려하신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4~5)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7) 이 약속 역시 아무에게나 주시는 약속이 아니다. 보배를 가진 질그릇 같은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다.

비록 믿음으로 박해를 받는 한이 있어도 주님께서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에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격려하시는 음성을 듣는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5:11~12)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헬, kataballo, 아래로 던지다, 내려가다, 떨어지다] 망하지 않는다 했는데 이 의미는 ‘완전히 파괴하다, 잃다, 손상시키다, 멸망하다’ 의미이다. 우리가 보배를 가진 이상 마귀 사탄이 우리를 지옥으로 던질지라도 주님은 거기서 건져 올려 주실 것이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불 지옥에 던져졌어도 주님께서 그곳에서 그들을 지키시고 마침내 건져 올려 주셨음을 본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것들은 이론이 아니라 사실로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권이다.



Ⅲ. 죽으심을 짊어지면 예수의 생명은 풍성할 것이다.(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러한 약속은 일찍이 주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계실 때 주셨던 교훈이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5) 바울이 디모데에게도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딤후2:11) 라고 격려한 바 있다.

원리는 간단하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 함은 주님의 십자가를 나도 진다는 것이고 그것도 중요한 것은 “항상” 짊어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매 주님의 날 마다 우리의 삶에 회복하는 주님의 희생은 세상 속에서 항상 그 십자가를 지기 위함이다. 그럴 때 아버지로부터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즉, 영생이 우리의 삶 속에 풍성히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치욕과 십자가를 지지 못하고 부활 후의 영광만 욕심 낸다면 주님의 확실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영생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그의 사역 속에서 쉼 없이 경험했던 바울은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9~10)고 고백하고 있다.

능력의 출처를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우리가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하나가 되어 그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 자들이 되었다고 해도 우리가 영광을 입기 전까지는 우리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쓰고도 남을 심히 큰 능력은 우리 자신에게서 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질그릇임을 매 순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연약한 질그릇임에도 어떤 극한의 비극에서도 절망하거나 낙심하거나 버린바 되거나 망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배를 가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오히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10) 라고 고백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 속에 사는 동안 항상 예수의 십자가를 짊어짐으로 예수의 생명이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가는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심히 큰 능력을 끊임없이 받아서 강할 수 있는 질그릇들이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