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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고후4:16~18 2018-02-25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니,  
우리 모두는 유한한 육신 속에 살면서 영원을 소망하는 모순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 모순이 아닌 것은 사람이 본래적으로는 영원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음을 지혜의 전도자인 솔로몬이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전3:11f) 그러므로 영원을 사모하는 것은 잘 못된 것이 아니라 창조된 본성을 사모하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의 몸을 깨어지면 회복이 불가능한 질그릇에 비유하면서(v7)도 그 질그릇 속에 보물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 보물이 변하지 않고 보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비록 질그릇이 깨어지는 한이 있어도 낙심할 필요가 없다고 증거한다.

무엇보다도 우리 속에 가진 보배가 육신의 눈에 보기에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님을 말하면서 계속 영적인 신비를 말하는 중에 이 4장을 마무리하면서 우리의 가치관을 바로 가질 필요가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또 보배인 복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 영원의 가치에 모든 것을 투자해야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단 석 절로 구성된 한 마당(paragraph) 속에서 분명한 4가지를 비교하고 있는데 그것은 ‘겉 사람-속사람, 가벼운 것과 무거운 귀중한 가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순간과 영원’을 대조하는 데 이것을 바로 선택하는 것이 어쩌면 신앙을 바로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말씀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영원의 가치를 세우는데 대단히 귀중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라면 영적인 것의 가치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서 애쓸 것이지만 스스로는 아무리 영적인 사람이라 생각하고 말하면서도 보이는 이 세상의 가치가 우선이 되고 더 소중하게 여긴다면 분명히 영적인 사람이라 할 수 없다. 우리의 삶의 모습이 우리 자신을 가장 분명히 잘 나타내는 것이다.

오늘 이 영(靈)과 육(肉)의 가치를 우리 삶 속에서 생각하면서 다시 오실 주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이 말씀을 듣는 …



Ⅰ. 우리가 낙심치 않을 이유(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낙심하고 절망하는가! 대개의 경우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들이 잘 되지 않을 때 낙심하기 쉽다. 그러면서도 ‘나의 하고자 하는 것,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우리의 사실 된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오늘 말씀의 첫 번째의 비교는 겉사람과 속사람을 대조하면서 겉사람은 당연히 낡아지는 것으로 말하면서 그와는 반대로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지만 신앙의 사람인 바울은 이러한 비교를 알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나이 든 노인들에게나 주는 교훈과 위로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모든 사람의 보이는 육체의 생체리듬은 사실 이 진리대로 가고 있고 사람들은 이것을 거절하고 싶어하지만 불가능한 한계를 또한 가지고 있다.

그렇다! “겉사람은 낡아지나”는 당연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이치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어린아이나 청소년기가 아니면 사람들은 나이를 먹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낡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낡아짐에도 또 다른 단서가 따르고 있다.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물론 이러한 확신은 모든 사람들이 꼭 같이 가지는 확신이 아니다. 바울 사도를 비롯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보이지 않는 영원의 세계를 확보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기대라는 사실이다.

여기에 대한 같은 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겉사람은 낡아지나”를 행복하게 소화할 수 있는 자세가 될 수 있다. 또 사실적으로도 “겉사람은 낡아지나”를 절망하지 않고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는 확신이 점점 커져가야만 한다.

문제는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과 반대로 가는 인생의 상황이다. 불신의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믿음의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안타까운 모습이다. 겉사람은 어떻게 해서라도 좀더 새롭게 낡아지지 않게 하려고 애쓰면서 속사람이 낡아지는 그래서 하늘에 대한 확신이나 소망이 점점 희미해지는 안타까운 비극들이 오늘 우리 시대 즉, 주님께서 다시 오실 시기가 가까운 이 때에 더욱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바울은 오히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8:24~25)는 신비한 확신을 거듭난 사람들에게 주고 있다. 본문에서는 겉사람으로 표현했지만 보이는 소망은 소망도 아니며 보이는 것이라면 바라지도 않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이러한 비교는 당연히 양쪽에 있어서 상대적인 결과를 나타내게 될 것이다. 겉사람을 새롭게 하려고 거기에 집중하는 사람은 속사람은 낡아지고 거기에는 낙심만이 주어질 것임은 산수 공식이 아니라도 당연한 결과가 될 것이다.

분명히 이 논리에서 믿음의 사람들은 내가 가진 보이는 세상의 것들의 낡아짐에도 낙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여기에 정 반대되는 모습을 더 많이 보게 되는데 속사람의 점점 낡아짐에 무감각해 감에도 안타까움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 마지막 시대가 되면서 이런 모습들이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



Ⅱ. 가장 귀한 것을 이루는 환난(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여기서는 환난과 영광을 대조하면서 함께 순간과 영원을 역시 비교하고 있는데 나타난 이런 단순한 비교보다 깊은 의미들을 일깨워주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비교가 아니라 상호작용을 하는데; 보이는 이 세상 속에서의 환난이 오히려 영원 속에 영광을 만들어 간다는 의미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는 육신의 삶 속에서 겪게 되는 “환난”에 대한 평가를 이르기를 두 가지로 수식하고 있는데 “잠시” “가벼운” 것이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당하는, 그것도 믿음 때문에 당하는 불이익이나 고통은 너무나 크게 느껴지는데 성령의 사람 바울은 이것을 아주 작은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바울이 이런 일을 겪지 않고 이런 말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 말이 거짓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복음 때문에 시련을 많이 겪어 보고 살 소망까지도 끊어진 지경의 경험까지 한 바 있는 바울의 고백이기 때문에 호소력이 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고후1:8)

우리 육신으로 견디는 어려움이 우리 자신에게는 시간이 흐르지 않고 멈춰버린 것 같지만 그것이 사실에 있어서는 ‘잠시, 순간’이라고 한다. 거꾸로 말하면 견디기 힘든 환난조차도 순간으로 가볍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확실히 하늘의 사람이라는 의미도 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겪은 고난이나 영광을 확대하는 것이 육의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육신 속에서 겪는 ‘환난’은 가벼운 것이란다. 실제적으로 여기에 쓰여진 “환난[θλίψις, 억압, 상처 받은, 고뇌, 짐 진, 핍박, 고통]”의 어원적인 의미는 사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엄청난 것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도 환난을 경험한 바울은 이를 ‘경한 것’ 즉, 가벼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사실 우리를 위하여 육신이 되시고 십자가에 고난 당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비교한다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죄인 된 사람으로서의 십자가의 고난과 수치와 창조주로서 죄인들로부터 당하는 수치와 고난은 사실 비교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육신으로 당하는 환난이 다만 ‘잠시’요 ‘가벼운’ 것이 되는 이유는 이 상대적인 세상에서의 것들이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갖게 되는 영원 속에서의 영광이 비교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환난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산 사람들에게 주어질 미래의 약속은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여기서도 ‘영광’이라는 약속도 귀한데 여기에도 수식되는 표현들이 ‘환난’과 비교되면서 같이 나타나고 있다.

먼저는 “지극히 크고[ὑπερβολή, 심히, 탁월하게, 측정할 수 없는]” 한 것처럼 이 세상의 언제 어디, 어떤 것에도 비교가 불가능한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영원한[αἰώνιος, 요10:28 ‘영생’]” 시간이 적용되지 않는 의미로 사람에게 불가능 한 하나님의 속성에 어울리는 낱말이다. 그런데도 순간 속에 ‘환난’을 감당한 사람들이 받을 상급이다. 이런 사람들을 미래를 예언하는 계시록에서 하나님을 함께 찬송하는 자들로 기록되고 있다. “…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7:14b)

“중한 것[βάρος, 무거운, 즉, 가치를 의미]”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을 지불하고 사 주신 영생 즉, 생명의 가치는 사람의 단위로 측량할 수 없는 귀중한 가치로 이 세상의 어떤 황금이나 보석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중한 것이다.

이 구절의 마지막 부분이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한 것도 깊이 이해해야 할 가치가 있다. “이루게 함이니[κατεργάζομαι, 완수하다, 만들다, 일으키다, 수행하다, 성취하다, ‘is working for us’[NKJV] ‘is producing for us’[NASB]]” 라는 단어의 의미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앞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한다는 관계를 헤아려야만 한다.

물론 첫째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감당한 치욕과 고난과 수치가 죄인이었던 우리의 영원한 형벌과 저주를 제하고 하늘의 영광을 이루어 주신 것이라면, 이제 그를 본받는 주님의 제자 됨으로 세상 속에서 겪는 환난이 우리 머리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영광을 자신의 것으로 이루게 된다는 의미이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 속에서 겪는 짧고 작고 가벼운 환난들이 오히려 미래의 영원 속에서 비교될 수 없는 영광을 이루게 한다면 충분히 견딜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환난을 겪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희생의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모습이요 그러한 사람들의 미래의 약속은 이 세상의 가치로는 살 수 없는 영광이 약속되고 있다.

노파심으로 갖는 경계는 주님 때문에 겪을 수 있는 작은 손해나 수고를 거절한다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거절하는 것이 될 수도 있음을 명시하여 오늘 내가 드리는 작은 충성이 오늘 내가 겪는 환난이 우리의 영원한 영광을 이룰 수 있음에 감사하는 …



Ⅲ.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가치(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마지막 이 말씀에서는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어떤 가치로 살아야 하는 가를 교훈해주고 있다. 바로 뒤에서 바울은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5:7)고 선언한다. 과연 우리 각자가 이 세상에서 믿음의 백성으로 주목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찌 보면 육신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것이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약속하신 것이 보이는 좋은 것이라면 머뭇거릴 필요가 없을 탠데 우리의 바라고 소망하며 기대하고 기다리는 약속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 이 말씀과 더불어 우리의 삶을 생각할 때 이 세상의 아무리 좋은 것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사라질 잠시 동안만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관심과 생각은 늘 보이는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이 아닌가!

믿음을 설명하는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라고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진정으로 좋은 것들은 감춰진 나타날 것이라고 증거하고, 이 나타난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의 실상은 보여진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증언한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

자신의 아들의 피로 우리를 사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의 자녀가 된 백성들에게 묻고 계시다. “너희가 주목하는 것은 무엇이냐?” ‘오늘 너희 각자가 눈을 주목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고 계시다.

연이어 주님을 대신하여 이 질문을 던지는 성령의 사람 바울은 믿음의 사람들이 관심을 둬야 할 것이 “보이는 것이 아니요”라고 경계한다. 영원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마치 다른 동물들이 사냥하여 배불리 먹고 버려둔 광야에 흩어져있는 썩은 공기덩어리를 찾는 그런 하이에나 같은 가치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경계하는 것이다.

대신에 참으로 관심과 목표를 집중해야 할 대상을 소개하고 있다. “… 보이지 않는 것이니 …”

역시 믿음의 귀중성을 강조하는 히브리서 기자는 이집트에서 하나님의 지시로 자기 백성을 이끌고 나온 모세를 평가하여 이르는 말에서 같은 말을 사용하고 있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히11:27)

보이는 것은 낡아질 수밖에 없는 물질이다. 하늘의 영원한 가치를 허락 받고 사는 믿음의 백성이라면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상황의 변화에 따라 가치가 사라질 그런 것들에 눈을 두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런 하늘의 가치를 베드로 사도는 잘 제시하고 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4) 이것은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귀한 것인데 거듭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직접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여러분 모두는 이 일반 사람으로서는 볼 수 없는 영생을 보았는가?

그럼 왜 이토록 보이지 않는 것에 귀중성을 강조하는가를 오늘 다루고 있는 말씀의 마지막 부분에서 읽게 된다. “…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18b)

그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영원 속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시고 그 우편에 우리를 위해 친히 십자가를 지신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는 격려하고 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Turn your eyes upon Jesus]“네 마음에 근심 있느냐, 어둔 길을 헤매느냐, 우리 구주 얼굴 뵈올 때, 풍성한 삶 누리리라, 오 주여, 눈을 주님께 돌려, 그 찬란한 얼굴 보라, 주의 은혜 영광의 빛 앞에, 세상 근심은 사라지네”(Helen H. Lemnal)

그렇다! 언제 어디서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리의 눈을 주님께 돌릴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세상의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것들은 홀연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주님이야말로 온화하신 모습으로 세상의 죄와 싸우며 환난과 상한 심령으로 의지하는 그의 백성들에게 변함없는 위로와 평강을 부어 주실 것이다.

어린이들에게나 학생들에게 그리고 젊은 사람들에게는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는 이해나 호소력이 부족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 믿음의 백성들에게 호소하는 사실이다.

적어도 사라지지 않은 주님의 약속 위에 우리 눈을 주목한다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워 보이고 좋아 보이는 것들은 어느 순간에 홀연히 사라질 것이고 그 다음에는 또 다른 것이 나와서 우리의 마음을 유혹하겠지만 다 부질 없는 것들이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열심을 내야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이나 환난을 당하더라도 낙심치 않을 이유는 우리의 육신이 가진 모든 것은 반드시 낡아질지라도 우리의 영혼은 매일 새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음 속에 겪는 환난이나 고통을 믿음으로 주님께 맡기고 잘 견딘다면 오히려 하늘의 영원한 영광을 이룰 뿐이다.(롬8:28)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귀중한 가치를 늘 변하고 사라질 이 세상에 두지 말고 영원한 주님의 약속에 둬야 하는 이유는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지만 우리에게 약속된 영광은 영원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