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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11:24~28 2018-04-01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선진들을 거론하는 중에 오늘 본문에서는 모세의 활동을 통해서 같은 믿음을 따라가는 우리 모든 신앙인들에게 도전을 주고 있다. 앞의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등 많은 믿음의 선진들을 거론하였지만 모세는 이스라엘을 나라로 세우는데 기여한 인물이기 때문에 중요하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살아야 할 법인 율법을 전달했다는 데서도 중요한 인물인데 그의 충성됨을 오늘 본문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가끔 하는 말이지만 세상적인 대부분의 종교는 이 세상에서의 재난과 불행을 면하고 행복과 건강을 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여기 나타나는 모세의 자세는 이러한 일반적인 종교와는 정 반대의 삶을 선택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어쩌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신앙하는 사람들은 사실에 있어서 이런 모세의 삶을 본받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물론 이 모세의 행동과 선택의 이유와 다르지 않다. 기복을 위한 종교생활이 육신의 삶에 집중되고 끝난다면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순종하고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육신의 평생의 보호와 평안 보다 더 멀고 큰 약속을 바라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오늘 제목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상주심을 기대하고 영원 속에서의 영광을 바라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영원을 바라보며 신앙해야 할 사람들이 세상과 익숙해지면 세상의 일반종교의 수준으로 내려오게 되어 다른 종교에서 구하고 바라는 좁은 안목에 머무르고 마는데 그것은 물론 몇 가지의 이유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단 한번으로 완벽하지만[히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9:12] 그것을 매년 반복하는 것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부처나 다른 세상의 영웅들 같은 사람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되는 데서도 환원의 교회들은 이러한 행사들을 하지 않는 것이다.

복음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좋은 것들을 더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영생의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일 것이고 그것은 더 가까이 말하면 하나님의 존재나 약속을 믿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베드로 사도는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벧후1:9)고 경계하고 있다.

많은 신앙의 선진들은 세상에서 상 받기를 거절하고 영원하신 하나님께 상 받기를 기대하면 이 세상에서의 불이익을 기쁘게 감당했는데 오늘도 모세를 통해서 그러한 사실은 우리 삶 속에 비춰보며 각자의 믿음의 모습을 바로 세울 수 있었으면 한다. 오늘 나는 하나님의 상 주심을 바라는가?



Ⅰ. 세상에서의 보장을 거절하였다.(24~25)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와 역사로 어쨌거나 당시의 상황에서는 죽어야 마땅했던 물에서 건짐을 받은 모세는 그의 이름처럼 죽음에서 건짐 즉,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애굽에서 그의 삶은 그야말로 탄탄대로(坦坦大路)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족보를 받은 왕자로 그야말로 장래가 보장된 지위를 얻게 되었다.(오늘 이 시대에 내가 이 모세 같은 횡재를 얻었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할까?)

모세는 바로의 궁에 왕자로 자라면서 성령의 지혜로 스데반이 말하는 것처럼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행7:22) 애굽의 학문적 논리와 모든 기술에 통달한 사람이 되었다.

그럼에도 오늘 본문은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24)라하여 다 자라서 자신에게 상상할 수 없는 그야말로 기적으로 주어진 보장된 지위를 차버렸다고 증거하고 있다. 오늘 이렇게 취직이 어렵고 살아남기 힘든 이 시대에 우리의 자녀 중에 이런 자식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과연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까! 각자가 한번 판단해 볼 필요가 있다.

마땅히 나일강의 악어 밥이 되어야 마땅했던 모세가 살았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왕자의 신분이 된 것은 그야말로 기적중의 기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요 사랑이라고 확신하고 절대로 포기 하지 않으려 하였을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모세의 인생에 기적을 베푸신 것은 모세 홀로 세상인 이집트에서 왕자로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며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님을 모세는 그의 어머니 요게벳의 젖꼭지를 물 때마다 들었든 것 같다. 오늘도 같은 믿음의 위기 속에 기적 같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맛보고 있다면 같은 의식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이해하게 된다.

마치 하나님의 기적으로 온 세상의 통치자의 왕비가 되어 있는 에스더에게 그를 키운 모르드게는 자신들의 민족의 운명이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한 상황에서도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수 없다고 답변하는 그녀에게 힘겨운 도전을 한다.

“…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에4:13~14)

오늘 우리가 기적과 같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누리고 있다면 그것은 모세와 같이 자신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같은 믿음의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구원고자 하는 의식을 해야만 할 때이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24) 결국 모세가 ‘장성하여’ 그런 결심을 한 것은 믿음이 자랐기 때문에 가능한 모습이었다.

모세의 신앙적 결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25) 고난을 행복을 누리는 것보다 좋아하는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이 세상의 정상적인 사람이 아닌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런 비정상적인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고난을 받아도 가치 있는 고난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즉,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하늘의 사람이다. 신앙하는 것 때문에 보장된 것을 거절하고 고난을 자초하는 것 거기는 영원에서의 보장이 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1~12f)

바울 당시의 총독 벨릭스도 바울을 통한 말을 잘 듣다가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행24:25)고 바울의 변론을 중단시키고 만다.

여기 우리가 하늘의 영원한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할 가치를 한가지 더 말하고 있다.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25b) 세상의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없는 쾌락은 절대로 오래가지 못한다. 다만 ‘잠시 죄악의 낙’일 뿐이다.

그러나 역시 믿음이 잘못되면 영원한 영광을 버리고 잠시의 쾌락을 더 사랑할 수도 있다. 신앙의 사람들에게도 이런 사람들이 성경에조차 나타나고 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딤후4:10f)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순간의 쾌락이냐 영원 속의 영광이냐,’ 신앙을 바로 하는 사람들의 선택은 매 순간 후자를 선택하는 사람들이다.

오늘도 여전히 우리 앞에 모세와 같은 선택의 입장에 놓이게 된다. 어떤 경우는 그것이 하나님의 기적과 같은 일을 통해서 일 때도 ‘자신 개인의 세상의 영광과 쾌락’과 비록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이지만 영원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영광’ 두 가지에서 늘 믿음으로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



Ⅱ. 영원한 상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여기서도 앞의 신앙적 모습이 확인되고 있는 모습을 본다. 앞에서도 약간 언급을 하였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벌써 믿음이 바른 사람이고 하나님께서도 그런 사람들에게 반드시 썩지 않을 상급을 준비하심을 성경의 여러 곳에서 확인하게 된다.

이에 대한 많은 말씀이 있지만 두 곳만 인용하면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5) 이 약속은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지고 있는 약속이다. 복음을 인하여 많은 고난을 당했던 베드로 사도 역시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4:14)는 약속을 확인해 주고 있다.

독특한 사실은 모세 당시에는 ‘그리스도’ 즉, ‘메시야’는 거의 거론된 적이 없음에도 그의 받은 고난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복음 속에 와서야 이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데 광야에서 모세가 반석을 통하여 물을 낸 것 조차도 그리스도에게서 마신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1b~4)

때가 차서 이 역사 속에 여자의 몸을 통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창세전부터 계셨고(요1:1~2)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속에 어디서나 이미 동참하셨음을 확인할 수 있고 또 OT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도 예외 없이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구원 받음을 확인하고 있다.(히9:15)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 큰 재물로 여겼으니”라고 하였는데 주님을 위하여 받은 수모(ὀνειδισμός, 비난)는 사실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재물’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모세는 이것을 “큰 재물로 여겼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비난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역시 세상에 없다. 그러나 옳은 일을 한다고 모두가 칭찬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의 이치에서는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자신의 이권에 손해가 되기만 해도 곧 잘 비난하고 데모를 하는 것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의 약속은 역시 단호하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5:10)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가 옳은 일을 할 때 칭찬은 못한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비난하는 쪽에 동조하거나 서서는 안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려고 할 때 칭찬보다는 비난 받을 확률이 훨씬 많다. 구부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사는 것 자체가 이 죄악 된 세상에 죄를 들어내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부끄러움을 들어 내는 것이 의도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그것을 좋아할 세상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26f) 이것이 가능한 이유를 뒷부분에 기록하고 있다. “…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자신이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바울의 표현처럼 ‘배설물’같이 여기고(빌3:8) 오히려 고난을 택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영광을 버리고 고난을 택한 것에 대한 “상[μισθαποδοσία, 보답, 보상]” 주심을 기대하기 때문이란다. 이것은 물론 다른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겠지만 보이지 않는 보상을 보이는 온 갓 좋은 것들을 포기하면서 기대하는 것 자체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바울이 여기에 대한 확신을 주고 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현 세상에서 믿음으로 겪는 고난이 죽음과 그 이상의 고통일지라도 그것이 가능한 것은 미래에 하나님께서 주실 보상이 그것에 비교될 수 없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러한 확신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가질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의 은혜를 믿고 말씀에 그대로 순종한 거듭난 사람들만이 볼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것임을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요3:3, 5)

중요한 것은 이 모세의 자세가 오늘 하나님을 향하여 같은 신앙하는 사람이라면 나도 같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Ⅲ. 생각이 아니라 실제적인 믿음이었다.(27~28)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앞의 믿음의 내용들이 실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부분이다. 야고보의 증언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약2:14~26)에 머리와 마음에 가진 믿음은 반드시 나타나고 표현 되어야만 살아있는 믿음 즉, 생명이 될 것이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27f) 비록 육신의 평생이긴 하지만 그 자신에게 안락과 행복이 보장된 이집트를 버리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고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왜곡된 복음은 오로지 세상에서의 기적적 영광과 부귀와 영화를 선전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아해 하기조차 한다.

“…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27m) 세상의 권력을 무서워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어떤 경우에 신앙의 사람들 조차 세상의 권력을 부러워하고 그 권력에 의지해 무사함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조차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모세와 같은 믿음의 사람은 당시 세상의 절대적인 바로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럴 수 있는 이유를 하 반절에서 적고 있다. “…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27b) 사람들은 쉽게 보이는 것에 좌우 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이 육신의 눈이 보는 것에 좌우되어서는 안된다. 어쩌면 이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가 더 오묘하고 놀라운 것은 얼마든지 있고 그 대표적인 대상이 하나님이시다.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28f) 이집트를 떠나게 만든 재앙이 10가지의 마지막인 바로 피 뿌림으로만 막을 수 있는 유월절 양을 잡아 문인방과 문설주에 피를 칠하는 의식이었다. 어쩌면 이 의식이야말로 우리의 이성적으로 가장 실행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사람들의 죽고 삶의 문제에 있어서 문인방과 문설주에 피를 칠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차이를 만들 수 있는가!’ 이것은 사람의 이성이나 감성으로는 해답을 얻을 수 없는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늘 이렇게 명령하신다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모세와 이스라엘의 결정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특히 “[정하였으니, ποιέω, 완수하다, 실행하다, 준수하다]” 라는 낱말의 의미를 볼 때 그렇다. 그럼에도 그들이 이것을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으로’ 가능했다는 표현을 볼 수 있다. 이 히브리서 11장의 모든 믿음의 선진들의 그렇게 살 수 있었던 동기에 대해서 시종일과 ‘믿음으로’를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는 우리 사람의 지정의(知情意) 즉, 인격을 넘어서는 약속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어떤 시간과 조건과 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인격 이전에 이 ‘믿음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어야만 한다.

그런 ‘믿음으로’를 맨 처음 강조한 합박국 선지자도 이를 증거하고 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3~4)

이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28f) 라는 이유를 마지막 부분에 기록하고있다.

“…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28b) 이 말씀 역시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에게 이 약속과 같은 언약이 있다면 그것은 역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역사의 마지막에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이다. 물론 이 약속도 믿음이 아니면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은 내용이다.

이 약속을 받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부귀와 영화보다는 그 다시 오실 주님 앞에 흠 없이 서는 것을 인생의 최고의 목표로 삶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3:14) 믿습니까?

믿음의 사람 모세는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보장을 거절하였다. 세상의 안락함 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일꾼으로 함께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하였다.

그것은 오로지 영원 속에서 상주실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봤기 때문이었다.

모세는 이런 믿음을 머리와 가슴으로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당시의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우리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모든 것들을 그대로 실행하여 이스라엘을 있게 하였고 그리스도를 이 땅에 오시게 하는데 기여하였고 오늘 같은 믿음을 우리에게 끼치고 격려하고 있다.

‘오늘 우리에게 모세와 같은 상황이 주어진다면 그와 같이 순종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같은 응답으로 사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