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행 26:14~18 2018-07-01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운명이 바뀐 특별한 역사는 잊지 못하고 또 누구에게나 고백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바울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아서 자신이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된 경험을 유대 동족을 위해 아카야와 마케도니아에서 연보를 거둬서 예루살렘에 왔다가 체포되어 자신의 동족들에게 같은 경험을 고백하는 내용을 사도행전22장에서 볼 수 있다.

이제 오늘의 이야기는 그 일의 진행으로 자신을 심문하는 아그립바 왕에게 같은 경험을 들려주며 복음을 전하고 있는 내용이다. 물론 22장과 중복된 내용이기도 하면서 다메섹에서 경험했던 상황 설명이다.

계속해서 바울이 자신의 경험을 술회하는 것은 그를 섬기고 위한다고 하는 것들이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주님을 괴롭히게 되는 경우도 있음을 일깨워 주고자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경고해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사울이 다메섹을 갔던 것은 자신의 명예도 명예이지만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도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갈1:13~14)

오늘도 이런 경우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위한다고 열심 내고 부지런히 설치는데 사실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안타깝게 하는 신앙의 모습도 있을 수 있다는 데서 우리는 같은 경계를 자져야만 한다. 또 오늘의 시대에는 바울처럼 “~야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음성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만 한다.

주님을 예배하고 섬기면서 늘 긴장할 필요가 있다. 은혜 받았다고 신나고 좋을 때에도 정말 주님과 더불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주님을 마음 아프고 힘겹게 해 드리는 것은 아닌지 영성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초대교회의 시대처럼 직접적인 음성이나 보여주시는 계시가 아닐지라도 주님의 뜻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기도와 말씀의 분명한 방법을 주셨기 때문에 점검하는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바울처럼 주님의 마음 아프게 해서 이것을 사람들에게 회고하며 안타까워 하는 일은 없는 …



Ⅰ. 열심이 주님을 거역하는 것일 수도 있다.(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 확신을 가지고 주님을 섬긴다고 하고 또 열심도 내는데 그것이 어떤 경우 하나님을 오히려 거역하고 대항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는 바울처럼 생각조차 해보지 않는다. 내가 행복하고 좋으면 의기양양하게 그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영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움직인다.

사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나름대로는 하나님의 권위를 힘입어 그를 거역하는 사람들을 잡으러 갔다가 거꾸러져 들은 말씀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행9:4~5, 22:7~8)

아그립바 왕과는 당시에 라틴어나 그리스 말로 대화를 하고 있었을 것인데 주님께서 자신에게 들려 주신 말씀은 자신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주로 사용한 모국어였음을 강조하는 데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다른 언어였다면 오해일 수도 있었겠지만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모국어로 이런 질문 형식의 책망을 해 오셨다는 경험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14f)

물론 예루살렘에서 잡혔을 때도 이런 분명한 사실을 동족 유대인들에게도 자신들의 민족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증언했기 때문에 바울의 과거를 잘 알고 있던 유대 지도자들은 더욱 분노했을 것이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14m) 자신은 배우고 훈련한 지식과 경험을 다 동원해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고 있는데 섬기는 주님으로부터 들은 이 말씀은 더욱 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섬기는 것과 박해하는 것은 어쩌면 정 반대적인 내용 같은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고 확신하며 섬기고 있는 주님으로부터 칭찬이 아니라 오히려 책망을 듣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오늘도 이런 일은 있을 수 있다. 사실 여기에 사용된 “박해[διώκω, 좇아가다, 힘쓰다, 열심내다]”미묘한 이중적 의미를 가지는 말이다.

물론 단어는 다른 것으로 쓰였지만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10:2~3)는 바울의 증거를 보면 잘못된 열심은 오히려 주님을 괴롭게 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OT에서도 이러한 탄식은 선지자를 통해서 나타나는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1:11~13)고 이사야를 통해서 탄식한다.

우리는 바울이 적어도 다메섹에 가기 전까지의 일련의 행동들을 보면 확신과 자긍심으로 행한 것들을 심지어는 충성된 하나님의 종인 스테판을 죽이는 모습에서조차 보게 된다. 오늘 내가 열심을 내고 있지도 못하지만 주님을 향해 열심 내는 것이 과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14b) 이 말씀은 9장의 다메섹 현장에서나 22장에 예루살렘에서 경험을 말할 때도 기록되고 있지 않은 내용이다. 결국 주님을 괴롭히고 박해하는 것은 주님께도 영광이 되지 않을뿐더러 그렇게 하는 자신에게 고통이 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짐승이 쟁기를 끌면서 앞으로 나아가야할 것임에도 뒷걸음질 친다면 거기에는 모친 채찍질만 주어질 것이기 때문에 묘사된 표현이다. 주님을 바르게 섬기지 못하고 오히려 주님을 핍박하는 일들은 나중에 주님 앞에 섰을 때 더 무서운 고통이 될 수 있으므로 “…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는 표현으로 쓰여졌을 것이다.



Ⅱ. 항상 깨닫게 하신 대로 돌이켜야 한다.(15~16)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나름대로 열심을 다해 주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울에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반응을 들은 상황에서 당연히 되물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주님 누구시니이까?” 유대인들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대상을 만났을 때는 일반적으로 쓰는 표현이 ‘주님’이다.

자신의 길을 가로막고 책망하는 그것도 옆의 동료들과 다른 형편을 당하는 사울은 그 대상을 향해 “누구시니이까?” 물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 질문은 이 땅에 난 모든 사람들이 일생에 한번을 그리스도를 향해 가져야할 질문이다.

“예수님, 당신은 나에게 누구십니까?” 오히려 그를 섬기고 따른다고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물어야 할 질문이다. 과연 여러분들은 이런 질문을 주님께 드려 보았는가! 이 질문은 우리 인생의 의미와 영원으로 연결된 삶과 죽음에 관련된 질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반드시 돌아서서 물어야 할 질문이다.

이 질문에 되돌아온 답변은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였고 이 응답은 주님께서 혹시 나에게 주시는 응답이 아닌가를 생각해야만 하다.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핍박하고 잡아 죽이고 했는데 그것이 예수님 당사자를 핍박하는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 답변은 우리에게 일깨워 주시는 것이 많다. 때로 나는 주님을 잘 못 섬긴다고 보이는 사람들을 대항하고 책망하고 비웃었는데 그것이 나 자신의 기준이 잘못되어 있는 경우는 오히려 거꾸로 된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엡1:23f, 교회는 그의 몸이니]에 주님을 괴롭히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주님은 피 값으로 교회를 사셨기 때문이다.[행20:28, 자기 피로 사신 교회] 섬김이 잘 못되면 주님을 박해하는 것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해야만 한다.

이렇게 자신의 상태를 바르게 일깨워 주신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사울을 주님은 세워 주시고 사용하신다.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16)

성경 속에서는 ‘굳게’나 ‘굳건하게’와 함께 ‘서라’고 하는 것으로 중요한 표현을 역시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전16:13; 갈5:1; 엡6:14; 골1:23, 2:7; 살후2:15)

이제는 남에 의해서가 아니라 “너의 발로 서라”는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주님 외에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각자가 스스로 믿음에 굳게 서야 비로소 복음을 증거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재산’을 또 ‘명예’를 ‘지식’을 의지하여 서 보려고 하지만 그것은 다 옳지 못하다. 어떤 경우 우리는 주님 앞에 자존심 싸움을 하기도 하는데 다 부질없는 것이다. 주님께 영광이 된다면 나는 십자가의 주님처럼 벌거벗김을 당한다고 해도 감수할 수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을 때 오히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5) 말씀하셨다. 창조주요 구세주이신 하나님 앞에 우리는 어떤 것도 꾸밈없이 어린아이 같이 홀로 설 필요가 있다.

바울은 이 주님의 일깨워 주심을 받은 후로 동료나 주위의 반응에 상관없이 즉시로 돌이켜 주님의 기뻐하시는 것을 순종하였다. 그 변화를 누가는 기록하기를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행9:18~20)라 하였다.

당연히 거기에 따른 주변의 반응도 들려주고 있는데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행9:21~23)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16) 이 말씀에는 바울과 함께 우리 각자에게 나타나신 주님을 증거할 수 있음도 당부하고 있다. 우리는 본 것과 경험한 것을 증거할 수 있을 뿐이다. 또 나에게 나타나시고 보여주신 사람에게 장래의 나타날 일을 지속적으로 나타내실 것을 말씀하신다.

늘 하는 말이지만 우리는 전해들은 것 가지고는 증인이 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삶 속에 경험하고라야 비로소 증인일 수 있다.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의 증인으로 우리를 부르셨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깨달은 대로 바로 돌이켜 행할 필요가 있다.



Ⅲ.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항상 최고의 사역이다.(17~18)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주님께서 구속의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는 사실 복음의 증거 대상이 제한되었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10:5~6) 말씀하셨다. 아직도 율법이 유효한 율법아래 오신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 율법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까지는 이스라엘집의 양들에게 만 보냄을 받으셨다고 증거하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사울을 만나시고 주신 첫번째 약속이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17f) 주실 것을 약속하시고 또 그들에게 보내실 것을 말씀하셨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다메섹에서부터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성문을 지키기까지 했지만 광주리를 타고 그들의 덫에서 빠져나왔다.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행9:23~25) 이 사실을 나중에 고린도후서11:32~33 다시 회고한다.

이 주님의 약속은 그대로 이루어져서 여러 번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시도에서도 빠져나올 수 있었고 이러한 경험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고백하고 있다.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고후11:26)

그럼에도 또한 이 약속은 유효하여 오히려 그들에게 보내져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고전9:22)

“…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17b) 이 말씀을 다른 면에서 이해하면 ‘구원을 받은 사람이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교훈 이기도 하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 수 없다.

주님께서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이런 비슷한 표현을 쓰셨는데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15:14) 여기서 맹인은 육신적 시각장애자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거듭나지 못한 천국을 볼 수 없는 사람은 당연히 사람들을 천국이 아니라 멸망으로 인도할 것에 대한 경계의 비유다.

이제 우리가 오늘 다루는 마지막 절은 복음이 전해지면서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 가를 증언해 주고 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하신 것처럼 죄의 사람들은 천국에 관한 한은 눈이 감긴 사람들이다.

그런 상태의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바울과 같은 일꾼을 보내어 복음을 전하므로 그것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천국의 눈을 뜨게 하여 생명의 빛이요 사랑의 빛이신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임을 확인하는 첫번째의 복음의 효력을 증거하기를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18f) 이다.

그렇게 되는 것은 보고 생각하는 관념이나 시각의 변화에 머물지 않고 삶의 위치가 바뀌는 것을 두번째로 증거해주고 있다.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18m) 통치의 권세가 바뀌어 빛의 나라로 시민권이 바뀜을 확인해 준다.

이렇게 되는 것은 당연히 교제의 대상과 미래의 영원한 삶의 가치도 변하게 되는 데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18b) 하였다.

어둠의 권세아래에서 죄로 고통 하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힘입어 확실한 사죄를 받았다면 더 이상 죄의 문제에 힘겨워 하지않아도 되고 이런 현실의 구원의 문제에서 그치지 않고 비록 세상에서는 좋은 것들을 다 잃는 경우가 생긴다고 할지라도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얻게 되기 때문에 장래에 관한 염려도 영원히 필요치 않을 것이다.

바울을 변화시켜 이처럼 놀라운 일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로 하여금 이와 같은 귀중한 일을 감당할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바울 이전의 사울처럼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 섬김은 열심히 할수록 오히려 주님을 힘겹게 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이유에서도 우리는 깨닫는 대로 즉시 돌이키고 이제 바르게 알게 해주신 것에 바울처럼 충성할 필요가 있다.

우리 자신의 생각과 원하는 것을 하는 것보다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것들이 우리 기분에는 맞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항상 최선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다메섹에서 사울처럼 “~야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는 안타까운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그런 모습으로 주님을 맞는다면 부끄러움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