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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고전 15:46~49 2018-07-08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이 귀중한 말씀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사람들에게 놀라운 부활의 소망을 증거하면서 이 세상에서의 영광이나 위엄은 그 장차 기대하는 부활의 영광에 비교한다면 사실 너무나 초라한 것임을 비교하며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육신의 사람과 영의 사람을 비교하다가 이런 비교를 말한 바 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믿음의 사람들은 사실 흙의 사람, 땅의 사람이 영광스럽고 신령한 분이시면서 (땅에 속하여 멸망으로 끝날 인생들)을 위하여 우리의 모양으로 오셔서 흙에서 끝나지 않고 영원으로 이끄시려 하는 사랑과 은혜의 십자가에 감격하고 그 은총의 역사를 자신의 것으로 누리고자하는 사람들이다.

결국 땅에서 흙에서 난 사람들은 하늘의 영광을 본 바가 없기 때문에 아무리 하늘의 영광을 말해 준다고 할지라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고 기대하기 어렵다. ‘설마 그런 곳이 있겠는가!’ 의아해할 뿐이다. 그럼에도 이 일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신 주님과 세상에 속한 사람들을 요한은 비교하여 이르기를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요3:31)

오늘 우리가 읽은 앞 40절에서도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라고 땅에 속한 자들이 하늘의 영광을 이해할 수 없음도 증거하고 있다. 문화시설 이라고는 본 경험이 없는 무인도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 도시의 편리와 영광도 이해시킬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하늘의 위엄과 영광을 땅에서 난 사람들에게 완전히 이해시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기 때문에 바울도 육신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서 영광의 하늘에 다녀온 이야기를 아주 조심스럽게 하는 것을 듣는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12:4)

결국 모두가 흙에서 나서 죄를 짓고 살지만 하늘에서 내려오신 자 예수 그리스도[요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를 힘입어 처음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대로 생령으로 회복하여 신령한 하늘을 기대하며 육신의 삶 속에서도 하늘에 합당한 신령한 삶을 훈련하다가 주님의 의향과 뜻에 합당하다면 그의 약속대로 마침내는 영광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비록 땅에서 나서 흙에 속한 사람들이지만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이러한 약속과 계획에 들어 왔으면서도 여전히 흙에 속하여 신령한 하늘의 명령과 방법을 저버린다면 여전히 흙에 속한 자로서의 운명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비록 흙에서 났지만 이 벌레같은 삶을 정리하고 하늘의 신령한 모습으로 변화를 거듭하여 마침내는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는 …



Ⅰ. 먼저는 육의 사람이었다.(46~47)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아담의 계보를 따라 난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누구도 예외없이 육의 사람으로 시작한 사람들이다. 바울도 비록 이렇게 신령한 신앙적 논리를 전개하면서도 이러한 사실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46f)

땅에서 나서 하늘에서 났다고 신령한 사람인 체 하면서 사람들을 가르쳤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유일하게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거짓교사들을 두고 말씀하시기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요10:8)고 말씀하셨다.

물론 땅에서 나서 특별히 하늘에 올라간 사람들은 성경에 나타나는 대로 비록 소수의 사람이었지만 있었다. 에녹이나 엘리야 같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 났지만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무덤이 없다. 독특한 한 사람인 모세는 느보(비스가)산에서 죽었지만 무덤이 없다고 기록하고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유1:9)이라는 독특한 표현도 기록되고 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하늘로부터 왔다고 하는 것은 거짓일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고 하는 거듭 나는 것은 성경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부정할 수 없다.(요일3:9, 5: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4, 18) 어쨌거나 우리 모두는 다 처음부터 신령한 사람도 아니고 육의 사람이었지만 우리의 노력이나 힘으로 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신령한 사람들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은혜를 통하여 하늘의 복을 누리는 자들이 되었고 그런 사람이 받은 복을 바울은 신령한 복이라고 증거한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1:3) 그러므로 이 복은 이 땅에서 누릴 복이 아니라 하늘에서 누릴 미래의 영원한 복이다.

그럼에도 육의 사람이 “…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46b) 함으로써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완전히 불가능하지만 이제 땅에서 난 육의 사람이지만 신령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날개를 갖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공중을 날 수 없고 하늘에 오를 수 없지만 비행기나 우주선을 탐으로서 하늘을 나를 수도 있고 우주로 나아갈 수도 있듯이 비록 육의 사람으로 났을 찌라도 하늘과 땅을 왕래할 수 있으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들어 감으로 비로소 신령한 하늘의 세계를 볼 수 있고 갈 수 있게 되었다.

다음절은 이를 좀더 분명히 하고 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 이거니와 …”(47f) 예외없이 아담의 혈통을 따라 땅에서 난 일반적인 사람들로 흙에 속한 사람들이다. 이런 태생의 이유에서 신령한 것보다는 육적인 흙에 애착을 갖고 육체의 좋은 것들에 언제나 먼저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럼에도 신령한 존재로 지어진 하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방법 즉, 하나님의뜻이 그의 아들을 하늘로부터 보내셔서 흙에 속한 자들일지라도 그 아들을 통해서 하늘로부터 거듭나게 하신 것으로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47b)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편으로는 하늘로부터 나지 않은 땅에서 난 존재는 같은 땅에서 난 자들을 하늘에 이끌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를 아담과 그리스도 한 사람으로 비교하여 로마서에서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로마서5:14~ 사망과 생명을 전개하지만 17~18절을 보면 더욱 분명하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비록 탄생은 육의 사람으로 났지만 홀로 한 분 하늘로부터 오신 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생이 흙에서 끝나지 않고 영원의 사람으로 회복되는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조차 없는 하나님의 선물을 순종하는 모든 사람이 누리게 되었다.



Ⅱ. 하늘의 속한 자와 땅에 자의 모습이 있다.(48)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이 둘째 부분에서는 우리 모두가 조금은 긴장해야 할 것 같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리 각자 삶의 모습에는 우리가 속한 모습이 나타날 수밖에 없음을 증거해 주고 있다. 처음에는 흙에서 나서 흙에 속한 사람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과 함께 죽고 하늘로부터 다시 난 사람들에게는 그가 속한 모습이 현실 속에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이론이다.

나의 일상적인 모습이 바로 내가 흙에 속해 있는지 하늘에 속해 있는지를 나타낸다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흙에서 났기 때문에 고향의 흙 냄새를 추억하는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고린도후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2:16) 오늘의 말씀과 함께 표현하면 흙에 속한 사망의 모습이 나타나고 하늘에 속한 생명의 모습이 나타나고 이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고 숨길 수 없다는 표현이 바로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시 바울은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딤전5:25)는 최종적인 주님 앞에서의 모습도 밝히 드러나겠지만 그 이전에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48f)라고 하여 현실의 삶에서 흙에 속한 냄새 즉, 과거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그대로의 모습이 보여진다면 통회하고 주님을 굳건히 붙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는 “…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48b) 흙에 속한 자와 같이, 하늘의 모습을 의도하지 않을지라도 은연중에 나타내게 될 것임을 증거하고 있다. 물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꾸며서 나타나는 것이라면 하늘에 속한 모습을 연출하는 것은 외식이 될 것이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와 같을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면 그 주님을 따르고자 애쓸 것이고 그런 모습은 의도하지 않을지라도 주변의 사람들에게 존경심과 함께 모범이 될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으면서 말로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하였다면 오히려 고린도교회로부터 수치를 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을 고린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보고 알 수 있었기 때문에 당당하게 그들에게 자신의 삶으로 먼저 나타내고 입으로도 같은 당부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마지막 시대에 특히 교회의 모습이 바닥에까지 내려가버린 우리 이 대한민국 속에서 이제 주님의 진리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48b)라는 증거처럼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복음을 증거해야만 할 때이다.

단순히 교회에 다니는 정도를 넘어서서 사람들이 우리 각자의 삶과 교회 속에서 하늘에 속한 삶의 모습으로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는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



Ⅲ. 반드시 하늘에 속한 자로 나아가야 한다.(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어쩌면 우리는 흙에 속한 자의 모습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로 흙에서 즉, 땅에서 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는 절대로 하늘에 이를 수 없고 하늘의 속한 형상을 가지지 못하면 여전히 땅의 속한 사람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바울은 분명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49)는 소망 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것은 우리 사람의 노력이나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이다. 그럼에도 이 선언은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필요를 가르치기도 한다.

우리가 비록 흙에서, 땅에서, 이 아래에서 났지만 생각이 없고 창조주를 찾을 수 없는 동물과는 다른 특별한 피조물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 모두가 최종적으로는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히 시기를 기대하고 바라시며 이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다 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49)는 말씀은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들린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만반의 준비를 다 해 놓으셨기 때문에 원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것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선언을 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우리가 사뭇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6~18)

OT 출애굽기34:29~35에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들어서 증거하고 있는 교훈이다. 모세가 하나님과 오랫동안 교제를 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모세의 얼굴에 옮겨져 있어서 이스라엘백성들이 그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을 두려워하게 되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면서 얼굴에 수건을 가리게 하였던 사건이다.

실제로 땅에서 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볼 수 없는데 이렇게 간접적으로 라도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라도 보는 것이 신기하고 감사해야 할 일이지만 죄의 사람들은 그 영광의 광채 자체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볼 수 없어서 가려야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볼 수 있는 방법을 표현하기를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후3:16)고 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비로소 거리낌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를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이론으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충분히 가치가 있는 비유이다. 흙 속에 묻혀 살거나 나뭇가지에 매달려 살던 애벌레는 절대로 하늘을 날 것에 대한 상상은 불가능했을 것이지만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 그대로 순응한다면 마침내 날개가 생기고 하늘을 자유스럽게 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도 다른 것이 개입되면 불가능하게 됨을 자연에서 조차도 배운다. 잠자리나 나비의 우화(羽化, emergence) 되는 과정을 지켜보다가 신기해서 손으로 만지기라도 하면, 마침내 그 만졌던 부분은 정상적으로 우화 되지 못하여 날지 못하고 땅 위에서만 불편하게 있게 됨을 배우게 된다.

그런 다음에 이를 좀더 분명히 하는 증거를 바로 뒤에서 볼 수 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4:6) 선언하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우리 흙에서 난 땅에서 난, 사람들에게 귀중한 소망의 약속이요 교훈이다. 흙에 속한, 땅에 속한, 육에 속한 사람이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기” 위해서는 땅 위의 방법, 세상의 어떤 방법으로도 불가능하고 하늘에서 주어진 방법; 바로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을 때 비로소 가능함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49f) 모든 사람들은 처음 사람 아담의 형상은 그로부터 났기 때문에 당연히 입게 되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49b)는 상태는 조건이 전제된 약속 임을 알아야 한다.

이 약속의 시작이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3~4)라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희생이 전제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이렇게 죄를 해결하신 주님의 희생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아담, 사람의 모습이 자연스러웠던 것처럼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49b) 약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약속이나 확신이 없이 아담의 형상으로만 끝난다면 믿음도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14)

또 믿음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약속이 없다면 세상 사람들 중에 가장 불쌍한 자들이라고 바울을 말하고 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19)

주님의 말씀을 따라 육신적인 세상에서의 모든 향락을 거절하고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데 최후에 하늘에 속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덧입지 못한다면 사실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은 진실된 증거일 것이다.

우리 육으로 난 사람들은 영으로 거듭난다는 사실 자체가 이해되기 어렵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3:6~7) 그러나 육으로 난 우리의 근본적인 저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늘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신령한 하늘의 사람들이 되게 하셨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두가지의 모습이 있다.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이 있고 또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가지고 살수밖에 없지만 언제든지 하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면 무서움으로 영광을 보는 두려움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의 특별한 피조물이라면 비록 흙에서, 땅에서 육체로 났을 찌라도 놀라운 주님의 희생의 약속을 믿고 받아들이고 하늘에 속한 신령한 형상을 날마다 회복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