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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눅 15:15~21 2018-07-15
이에 스스로 돌이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비유이면서 이만큼 실감나고 사실적인 비유는 흔하지 않다. 이 비유는 사람의 어리석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돌이키기만 하면 언제나 무궁한 사랑으로 허물을 감추고 감싸 안으시는 절대적인 사랑이 오늘 같은 처지에 있게 되는 우리에게 도전을 준다.

에덴 이후 모든 인류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모든 자신의 소유를 다 가지고 오로지 자유를 위하여 아버지 곁을 떠나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낯 설은 곳 타향에 존재하는 나그네들이고 특히 예수 그리스도로 회복된 영혼들에게는 분명히 타국이다.

오늘의 비유에서는 아버지를 떠나 간 아들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탕진한) 곳을 ‘돼지 우릿간’으로 오직 본능에 의해서만 살아가고 움직이는, 사람 이기를 스스로 거부하는 세상으로 비유하면서 스스로의 욕망을 채우려고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을 허비하는 허영과 객기를 부리는 모습에서 오늘 본문의 주인공 같은 존재로 비유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권리와 이권을 다 챙기면서 아버지를 등지고 떠난 이 어리석고 무지몽매한 인간을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가진 아들,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짐승과 달리 언제든지 행복을 회복해 주시기 위해서 그의 아들, 딸들이 저질러 놓은 죄의 채무를 친히 감당하시고 마을 어귀에서 시도 때도 없이 이 불량한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모습을 성경은 여러 곳에 증거하고 있다.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잠1:24)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사65:2) 우리는 이 비유를 들으면서 쉽게 생각하기를 ‘적어도 나는 아니야!’라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이 되었던지 돌이켜야 할 곳에서 머뭇거리고 있다면 오늘 본문의 탕자 만도 못한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어쩌면 오늘 본문의 주인공에게서 배워야 하는 것들이 더러 있다고 보여진다.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필요한 것은 명분이나 남들로부터 존경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현실을 정확하게 보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다 죽어가면서도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다고 착각하고 자신의 지위나 명예만을 붙들고 시간을 흘리면서 그러한 상황이 지나가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 없는 인생들은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는 지혜가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지혜의 말씀을 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히 심각한 문제가 된다. 적어도 탕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아버지나 가족들에게 자신의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다.

오늘도 우리 각자가 신앙에 있어서 어떤 상태인가를 바르게 그리고 정확하게 판단하고 이 비유의 주인공과 같은 결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사람이 자존심이나 생각하고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이와 같이 자신의 본연의 삶, 아버지가 기뻐하는 삶으로 이렇게 신속하게 회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Ⅰ. 사실적인 판단이 가장 중요하다.(15~17)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이것은 가장 사실적인 삶의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의 자리를 점검하고 정돈하라고 한다면 과연 얼마나 바른 판단과 도전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 정도면 괜찮을 거야, 아직 심각한 상태는 아니지!’ 이렇게 스스로 생각하면서 오히려 변화를 거부하는 무사안일주의적인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 같다.

그러나 늘 판단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고후10:12) 신앙의 삶의 기준이 적어도 자신이어서는 안된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2b)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4) 적어도 신앙적 비교 기준이 이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소유를 향락으로 탕진해버린 이 사람의 마지막 행보는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15) 우리의 인생이 세상의 어떤 사람들에게 붙여 사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여 사는 삶이 되어야만 한다.

이 젊은 사람은 살 방법을 찾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돼지를 치는 것(막5, 눅8장)으로 만족하게 여겨야 했지만 그것은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 것은 사람의 음식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돼지가 먹는 것조차도 만족히 먹을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16)

사람이 돼지 먹이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육신적으로도 비극의 절정이지만, 그러나 이것을 육신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동물과 같은 육체로는 돼지 먹이를 먹고 살아도 그것이 심각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사람은 육신의 떡으로만 살 수 없는 존재로(신8:3) 생명의 양식을 먹어야 사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동물의 먹이로 배 불릴 수 없는 사실 동물과 다른 것이 사람이다.

사람이 영적인 존재라고하는 삶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내용에 있어서는 어쩌면 이 모습이 더 비극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복음에 목숨을 걸었던 신앙의 사람들의 삶을 묘사하는 히브리서기자의 기록을 보면 육신적으로는 사실 인간적인 대우를 마다한 사람들이 많았음을 전해주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11:36~38)

바울도 자신의 경험 속에서 이런 비슷한 고백을 하는 것을 듣는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2)

아버지를 떠난 이 청년의 굶주림은 이 약육강식의 동물화 된 사람들이 사는 빌딩숲에서 생명의 양식을 먹지못하는 굶주림일 수 있을 것이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영육의 굶주림을 막론하고 이 아들이 그러한 자신의 상태를 분명하게 또 정확하게 바로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 깨달음이 역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중요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17)라는 말씀을 거꾸로 연결하면 더 바른 이해를 할 수 있다. ①“…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17b)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게 된다면 죽을 수 밖에 없음을 깨닫는 것이 먼저였다. 오늘도 내가 머무르고 있는 곳이 죽음의 장소라면 그걸 바로 깨닫고 빨리 옮겨야만 한다.

②“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이유에서 떠나온 아버지 집의 풍족함을 추억하게 된다. 품을 파는 품꾼들조차 풍족 함으로 누리는데 그래도 아들이었던 자신의 현실의 처지가 너무나 한심함을 깨닫는 것이 순서인 것은 당연하다. 그런 깨달음은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중얼거리고 있는 모습이다. “이르되,”

③“이에 스스로 돌이켜” 돌이키는 것은 남에 의해서 보다, 자기자신 이어야 한다. 아무리 들어도 돌이키는 것은 자신 이어야 자신이 산다. 이러한 마음의 변화가 새로운 도전이다.

이 아들은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그곳에 있는 한 절대로 살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 비극의 탈출의 시작이 된다.



Ⅱ.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결심을 한다.(18~19)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제 깨달았기 때문에 어떻게 행할 것을 계획한다. 이것이 살기 위한 도전의 시작이다. 이 부분의 내용은 고백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삶의 변화를 위해 앞으로 당할 수 있는 모든 상황들 앞에서 어떤 자세로 그 어려움을 극복할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계획이요 결단이다.

사실 믿음생활에서 만나게 될 일들이 어떤 것이든지 감당할 각오를 하지 않고 사는 삶은 그런 일을 만났을 때 감당하기 어렵게 된다. 많은 신앙하는 사람들이 사실 이런 구체적인 계획없이 살고 신앙하기 때문에 어려움이나 위기를 만나면 주저앉아 버리고 마는 경우들이 생긴다. 믿음의 삶으로 만날 많은 일들은 사실 무지개 빛이 아니라 어려움이 더 많다고 하는 데서 우리 주님의 이 비유는 그런 예상되는 상황까지도 치밀하게 준비하고 대처할 자세를 준비시키고 계신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눅14:27~28) 즉흥적인 신앙은 위험하다. 앞으로 닥칠 수 있는 모든 상황 속에서 그것을 어떻게 감당할까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심지어는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27)는 말씀은 물론이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14:22)

이 아들이 자신의 삶을 회복함에 있어서 제일 먼저 겪어야 하는 어려움은 무엇보다 아버지를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당당하게 자신의 것을 요구하여 다 찾아 챙겨 나온 그 아버지를 뵙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임을 말하고 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18f) 비록 아버지께 요구했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지금은 거지 꼴이 되었지만 그 아버지께 가는 것 만이 살 길임을 확신하고 있다.

“…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18b)” 마치 우리 옛 노랫말에 [최진사댁 셋째 딸] 가사와 비슷한 분위기다. 그리고 이것은 요한일서 1장의 죄 해결의 방법이기도 하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쉽게 표현하면 “제가 해서는 안될 짓을 하고 말았습니다.”라는 사죄의 요청이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19) 이러한 고백은 “아버지께서 어떤 처분을 내리시든지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19f) ‘이제는 아들의 자리는 이미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19b) ‘내 것은 이미 다 찾아 먹었으니 이제부터는 품을 팔아 먹을 각오까지 하였습니다.’ 이제는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12) 라던 당당함은 없어지고 사실적이고 겸손한 자리에 섰다.

마치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 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0)라는 고백과 같이 들린다.

그럼에도 19절 끝부분의 “하리라 하고”라는 내용은 아직 실행이 아니라 마음의 결단 이었음을 본다. 사실 이 아들이 이런 경우에까지 오는 것도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천에 옮기지 못한다면 여기까지의 의지와 결심은 대단한 것일지라도 가치가 없는 것이 믿음생활이다.



Ⅲ. 가장 사실적인 회개의 모습이다.(20~21)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이 아들은 이제 마음에 결심하고 다짐한 바를 실행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20f) 여기서 우리는 확실한 회개를 보게 된다. 회개는 마음으로 안타까워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잘못 간 길을 확인했다면 ‘이리 가면 안된다.’는 생각만 가지고 U-turn을 하지 않는다면 가고자 하는 곳에서 점점 멀어질 뿐이다. 신속하게 유턴 가능한 지점을 찾아서 차를 돌려야 하는 것과 같다.

“…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20b) 언제나 하나님이 한 수 위이시다. 죄에서 돌이키려는 사람이 있기만 하다면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서 마중 나와 계시는 아버지이시다.

아직도 모든 인류가 죄의 절망에서 어떻게 해야할지 알지 못할 때 자신의 독생자를 인류의 죄값으로 대신 죽게 하신 하나님이심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엄청난 사랑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죄를 내놓으려고 결심만 해도 하나님은 그 죄를 가릴 것을 먼저 준비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20b) 이러한 표현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 다 묻어나고 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엡2:4) 우리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이제까지의 어떤 것도 묻지 않고 돌아온 그대로를 온 갓 사랑의 표현으로 맞고 있는 모습이야말로 우리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그대로의 표현이다.

그것이 더욱 황송해서 자신이 각오하고 결심했던 그대로 고백을 드린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21f) 죄는 사실적이다. 죄는 절대적인 창조주께 불의 일뿐만 아니라 관련되 당사자(여기서는 아버지이지만 범죄자와 관련된 대상)에게도 무례를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육으로 이중적 임을 깨닫게 된다.

사죄의 고백도 분명하다. 흔히 죄는 그것을 옆으로 전가하려는 죄성 때문에 ‘우리’라는 표현은 옳지 않은 것임을 본다. 그런 이유에서 ‘내가’라는 고백이 옳은 것이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잘못에 대해서 한마디도 되묻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용서와 사죄의 모습이다. 우리 일반적인 사람들은 진심으로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 경우도 과거의 잘 못을 하나하나 다 들춰내서 그 사죄의 정당성을 확인하려 하는 것 때문에 더 힘든 경우들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진실로 자백하고 용서를 빌면 과거를 묻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라는 표현이 바로 그런 사실을 의미하는 말씀이다.

“…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20b) 어쩌면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12) 라던 자기 권리 주장과 너무나 다른 반응이다. 이것이야말로 성도의 고난으로 얻는 큰 수확인 겸손이다.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생은 오로지 자기 권리만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인생의 쓴맛을 다 맛본 다음에는 아들이 아닌 종으로 만이라도 곁에 머물러 있게만 해 주십시오. 라는 겸손으로 내려서게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가르치고 교훈 하던 욥이 시험을 겪은 후에야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42:5~6) 라고 고백함을 듣는다.

이렇게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진정한 간격을 깨닫게 하는 것이 우리의 당하는 어려움과 고통 임을 배우게 됨으로 결국 주님의 백성들이 당하는 어려움은 어떤 것이든지 손해가 되지 않음을 깨닫는다. 오늘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격하는가 자성할 필요가 있다. 아니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맛보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감격이 되어야 한다.

신앙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어려움이나 안타까움을 겪고 있든지 그 상황의 개관적인 판단이 필요하고 그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했다면 머뭇거려서는 안된다. 회복을 계획하되 어떤 불이익이나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돌이킬 각오와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울 필요가 있다.

그리고 생각에서 그치지 말고 그것을 사실적으로 실행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우리 주님께서는 그 결심을 실행하는 것보다 앞서서 우리를 이끌고 도우실 것이다.

오늘도 신앙에 문제가 있다면 거기서 도망치려는 실질적인 삶이 있을 때 하나님의 보다 크신 사랑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미룬다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안타까움을 경험하게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