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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눅 16:27~31 2018-08-05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무더위와 함께 납량특집 시리즈로 두려움과 떨림의 말씀들은 나누어 보고자 한다. 경계가 되어 신앙의 삶에 새로운 각오와 바른 회복의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유명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운데서도 가장 절박하고 애절한 가족을 위한 기원을 듣는다. 이 사람은 세상에서는 모자람이 없이 살았고 아마 형제들도 다 잘 살고 있는 것으로 짐작이 되는 이유는 이 사람이 하소연하는 내용을 통해서도 짐작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물질적으로는 여유롭고 바쁜 모습들을 짐작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비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주신 비유라고 하는데 호소력이 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절대로 있지도 않을 허튼소리나 비유를 하실 분이 아니라는 확신 때문에 이 비유도 너무나 사실적이고 호소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어쩌면 이 부자는 이제 자신의 운명은 체념을 해버린 것 같다. 그럼에도 육신적인 혈연의 사람들의 끈끈한 우애는 어떤 경우 믿음의 사람들보다 더 철저함을 더러 보게 된다. 이런 입장에서 믿음의 지체들 간에 형제 우애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육신의 혈연의 관계를 뜨겁게 가지는 세상의 형제들을 비교하기도 한다.

자신은 이미 결정지어진 이 절망의 상황에 처해졌지만 아직도 이 사실을 전혀 모르는 체로 세상에 여전히 무엇이 귀중함을 전혀 모르고 사라질 것들에 만 몰두하고 있는 육신의 형제들 중 한 사람이라도 이런 사실을 일깨워 줘서 이런 비극의 운명에 들어 오지 않게 해 달라는 간절한 호소를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하고 있음을 본다.

어쩌면 이 이야기가 너무나 먼 남의 이야기로도 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런 비유를 통해서 주시고자 하시는 의미를 깨달아야만 한다. 우리는 이 부자와 같이 고통의 장소에 있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제쳐 두고라도 이 부자와 같은 형제나 가족에 대한 절박함을 갖고 있는가 우리 가족들을 생각하고 돌아볼 필요는 있다.

창세기 22장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검증 받는 유명한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불합리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말씀대로 철저하게 순종하여 그의 믿음이 인정받는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는 유명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어쩌면 이 유명한 이야기의 그늘에 가려진 듯한 어머니의 모정을 21장에서 보게 되는데 너무나 사실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주제와 연결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삭이 태어나고 젖을 떼고 축하의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 애굽 여종의 아들인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것으로 사라가 보고 아브라함에게 이 모자를 쫓아낼 것을 부탁하고 아브라함은 이 일로 마음이 힘들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걱정하지 말고 사라의 말대로 하라 말씀을 주신다.

아브라함은 비록 마음은 아프지만 이 모자에게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를 어깨에 메워 광야로 내 보낸다. 그 다음의 상황을 창세기 기자는 이렇게 적고 있다.

“(15)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16)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17)하나님이 그 어린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18)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19)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창21:15~19)

여기에 가장 절박하고 사실적인 모정을 본다.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오늘 본문의 부자와 이 하갈이라는 여인의 절망적인 상태를 사실적으로 바라보고 하나님께 울부짖는 모습은 어쩌면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기며 거듭났다고 믿고 사는 우리들보다 더 사실적으로 안타까움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가장 끔직하게 받아들이고 최소한 지옥은 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쩌면 소극적으로는 그 지옥에 가지 않으려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고 의지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가족이나 자녀에 대해서는 그렇게 절박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지옥이라는 곳이 너무나 끔찍하고 비극적인 곳이라는 데서 어떤 사람들은 말하는 것 조차 절제하는 것의 설교도 그렇고 심지어 어떤 종파에서는 사랑의 하나님께서 지옥을 만드셨을 리가 없다고까지 지옥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는 교리까지 본다.

그럼에도 성경이 말하는 지옥은 너무나 사실적이고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비극적 임을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의 부자와 나사로의 간격만큼이나 사실적이고 비극적인 형벌의 장소로서 지옥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43)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5)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7)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8)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9:43~48)

이 내용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육신이 완전한 불구의 상태일지라도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세상에서 온 갓 영화나 화려함을 가지고 살았더라도 지옥에 던져지지 않아야 된다는 안타까움이다. 두려운 일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 조차 이러한 지옥을 별로 마음에 두고 있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자신은 절대로 그러한 비극적인 장소에는 갈 리가 없다고 믿기 때문에 그런 것 까지는 이해해 주자.

그러나 안타까운 것 하나는 이렇게 사실적인 비극의 장소에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본문의 부자만큼도 염려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몇몇 이유들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물론 앞에서 이미 언급한 내용이기도 한 부분들도 있지만 이런 말씀을 사실적으로 믿지 않거나 의식을 하지 못하는 이유에서 인 것 같다. 만약에 창세기 21장의 하갈처럼 아들이 목이 말라 죽어가는 것조차 보고 있을 수 없다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이렇게 태연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사랑하는 이들이 천길낭떠러지를 향해서 차를 몰아 달린다 거나, 무너질 집안으로 들어 가려 하거나, 건드리면 금방 폭발할 지뢰밭을 들어가려 하거나, 불이 활활 타오르는 집안에 그대로 머물고 있는 것을 본다면 과연 지금처럼 태연히 기다릴 수 있을까!



Ⅰ. 사랑하는 가족이 죽어가고 있다면…(27~28)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부자는 이미 비극으로 자신의 형편이 운명 지어진 것에 관계없이 자신에게 비극을 선고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소연하는 본 받아야할 자세이다.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28)

어쩌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이런 부분에서는 더 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요한 사도를 통하여 권고하시기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4:20~21) 하셨다.

바울 사도를 통하여는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고 경고하고 있다.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을 갖지 못한 혈육의 가족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그것을 오히려 잘하는 불신자보다 악하다.’ 라는 책망이다.

이 부자는 분명히 믿음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혈육의 형제들에게 대해서는 자신과 같은 비극의 운명에 처해지는 것을 막아보려는 하소연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갈 역시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경험도 있기는 했지만(창16:7~14) 믿음에 견고한 여인은 아님에도 자신의 아들의 죽게 된 운명앞에서는 구원을 부르짖는 모습은 육신의 모성애를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모습인 만큼 우리 또한 그런 정도의 자녀에 대한 애정은 가져야 할 것이다.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창21:15~16)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습니다.” 40℃가 넘는 광야에서 가죽 부대의 물은 바닥이 났고 벌겋게 달아오른 피부로 갈증을 인해서 울부짖는 아들 이스마엘의 모습은 어찌 보면 본문의 부자가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24)라는 고통스러운 모습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힘입지 못해서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을 우리 불신의 가족의 모습일 수도 있다.

그것이 형제이든지 자녀이든지 사랑하는 가족이 비극적인 운명에 갈 수밖에 없는 형편에 있다면 아니 그것도 순간이 아니라 영원의 형벌에 처하게 될 것을 아는 입장이라면 어찌 보면 부자처럼 하갈처럼 울고 부르짖는 애절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이런 안타까움도 탄식도 없이 평안한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닌가!

그것은 몇몇 가지의 원인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어찌 보면 ‘어찌 되겠지!’ 라는 무사안일 함이나, 지옥이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신앙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만 의지하고 공의를 믿지 않는 등등의 이유들이 분명히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가족을 위한 육신을 위해서 애쓰는 절반정도라도 영원을 위해서 애쓰고 힘쓸 수 있다면 우리들의 가족들의 운명은 많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대부분의 시간과 투자는 길어야 100년 정도를 살고 갈 육신을 위해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믿음의 사람 하늘의 사람들이라 반드시 점검하고 가야할 우리의 모습이다.

하갈과 더불어 이스마엘의 이야기를 하였지만 아브라함의 이삭에 대한 교육이나 삶은 오늘 우리와 완전히 달랐음을 이어지는 창세기 22장에서 보게 된다. 그런 이유에서 여호와이레는 또한 중요하다. 우리가 육신적인 삶보다 영적인 삶을 위하여 최선을 다할 때 육신의 삶에도 여호와이레는 약속되어 있고 영혼은 하나님의 약속에 흔들림없이 서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산상보훈에서 확인하신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우리의 삶에 이 명령이 지켜지고 있는가 이제는 점검할 필요가 있다.

교회에 직분을 받아 섬기고 있는 사람들이 맛집과 같은 육신의 맛있는 음식을 찾는 데는 애쓰면서도 가까이 있는 영혼의 양식인 성경은 한번도 통독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이 일은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려면 당장 회개해야만 할 당장의 과제이다.

또 자녀들의 학교나 학원의 과제나 숙제를 하지 못할 경우에는 야단을 치면서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성경을 읽지 않거나 기도하지 않는 일에는 별로 안타까움을 갖지 않는데; 이것은 평소 자신이 의도적이거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닌 매일 시간을 정해서 생명의 양식을 취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 주지 못했기 때문이고, 나중에 역시 하나님 앞에 책임을 져야만 할 중요한 과제이다. 왜냐하면 자녀의 영혼은 부모에게 일차적으로 책임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 마지막 시대의 신앙인들의 삶이 ‘먼저 육신의 삶을 위하여 구하고 그의 나라를 위해서는 나중’이 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아닌 영원의 삶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오늘부터라도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는 약속에 철저해야 할 것이다.



Ⅱ. 오늘 한번으로 끝내서는 안된다.(29~30)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형제들이 다섯이나 있지만 아직 자신과 같이 이런 고통의 장소에 올 것을 생각지도 못하고 비극의 운명을 향해 가고 있는 형제들에 대한 호소에 대한 답변은 상당히 단호하고 안타까운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29)는 답변이었지만 자신이 불꽃가운데서 고통하면서도 계속 하소연을 끊지 않는다.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30) 아브라함에 대응하는 이 부자의 항변은 어쩌면 한 달란트를 받아 그대로 보관했다가 가지고 온 충성스럽지 못했던 사람의 항의와 비슷하게 들린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마25:24~25)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한 사람들은 항상 그렇게 된 이유를 남들이나 하나님께 전가시키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그러나 이것이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중심은 아니다.

다만 자신도 하나님의 당연한 약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항변이고 자신의 남은 형제들도 그럴 것이라는 호소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항상 하나님이 옳다는 사실이다.

그런 이유에서 답변도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31) 이 이야기도 좀더 가까이 가져와 이해를 하면 오늘 이종배를 통한 경고를 듣지 않는다면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나도 듣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에 말씀을 전하는 자의 권위가 있다.

참고로 함께 보고 있는 하갈과 이스마엘의 상황에서 이것을 보면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창21:17~18)

목이 말라 죽게 된 아들의 안타까움을 볼 수 없어서 광야에 메아리가 울릴 정도로 모자가 탄식하는 울부짖음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시고 구원을 베푸심을 본다. 또 다른 약속의 자식이었던 이 이스마엘의 울부짖음도 하나님께서 들으셨다고 말씀하신다. 사실 이런 입장에서 믿음의 사람들의 언저리에 사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이래서 복이 될 수도 있다.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이들에게 신앙교육을 어떻게 했다는 기록은 없었지만 평상시 이 믿음의 조상 부부의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을 보아오며 살았을 하갈과 이스마엘의 극단적인 상황을 대하는 자세가 본문의 부자와는 조금은 다르고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심을 보게 된다.

오늘 우리의 자녀들이나 가족들에게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들이 아브라함이나 사라처럼 하나님을 극진히 섬기는 자세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을 찾게는 만들어야 한다. 사실 다른 방법이 없다.

우리의 자녀들이 세상에 익숙해지고 길들여지기 전에 사실 먼저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익숙해져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하고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어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고 하나님이나 교회를 핑계하는 것은 사실 나중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만 할 것이다.



Ⅲ. 주님께서 항상 도움을 준비하고 계신다.(29, 31)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아직도 감사한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이 그래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인데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즉, 계속적으로 들을 수 있도록 말씀을 주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기회는 무작정 계속 있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사야22:22에 “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말씀하신 주님께서 요한계시록3:7의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증거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 라고 하여 반드시 닫힐 때가 있을 것임을 경고하신다.

그럼으로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아직도 빠른 기회이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안타까워하여 통곡하는 하갈과 이스마엘 모자에게도 긍휼을 베푸심을 본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창21:19)

오늘 우리가 말씀을 읽고 부른 찬송520장 2절에 “오는 사람들은 지체말고서 문 열었을 때에 들어오시오, 우리 행할 길은 구주 예수니 어느 누구나 오라, 어느 누구나 주께 나오라 어서 와서 주의 말씀 들으라 하늘 아버지가 오라하시니 어느 누구나 오라”고 주님은 초청하고 계신다. 내일이면 늦을 수 있다 오늘부터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