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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19~34 2019-01-27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아들을 증거하면서 종종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소개하는 세례 요한의 역할을 앞에서도 이미 두번씩이나 언급한 바 있지만(v6~8, 15) 오늘 읽은 말씀에서는 좀더 분명히 그리고 자세히 거론하고 있는데 자신의 평가이기 보다는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의 요청과 거기에 답하는 침례 요한의 답변을 통해서 요한의 역할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양의 말씀을 한 번에 다룬 바는 없지만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요한의 증거는 여기에서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두 마당을 함께 다루려고 한다. 또 어떤 상황의 해설처럼 들려서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사실을 마음에 두고 이 말씀을 나눌 수 있었으면 한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어떤 부분은 이렇게 자신의 역할과 한계를 분명히 하는 모습들을 성경에서 더러 볼 수 있다.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암7:14~15)

무한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세상에 드러내야 하지만 하나님의 사용해 주심에도 불구하고 사람됨의 한계는 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나타내는데 있어서 역시 한계를 느낌을 여기 요한처럼 고백할 수밖에 없다.

당시의 많은 종교 지도자들은 요한의 활동과 하는 일들을 전해 들으면서 그들이 기대하고 바라는 메시야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서 사람들을 보냈지만 침례자 요한은 자신이 그들의 기다리는 메시야가 아니며 다만 이사야의 예언처럼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 시키기 위해 보냄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어찌 보면 이러한 진실한 요한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적하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맞음을 준비하지 못했고 정작 오셨을 때는 감격하고 환연하지 못하고 오히려 배척하고 거절하는 것을 본다.

‘과연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그도 그럴 것이 저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성경을 통해서 이미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취향과 입장에 맞추어 결정해 뒀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방법과 다른 그들의 취향에 맞지 않는 그리스도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음은 바울의 자기 동족에 대한 로마서9~11장의 탄식에서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이 말세지말(末世至末)을 앞둔 오늘에도 같은 경계를 가져야만 할 중요한 과제이다. 재림하실 주님을 이미 자신의 알고 있는 취향과 모양대로 설정해 놓고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면 모르긴 해도 누구를 막론하고 그런 사람은 분명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를 반갑게 맞지 못할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는 이 말씀을 접하면서 성경이 나타내는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그분을 만남에 장애 되는 것들이 자신에게는 없는지 자신의 신앙적 경건을 점검하고 만약에 하나님의 기대에 합당하지 못한 상태요 자세라면 반드시 주님의 요구에 합당하도록 회복해야만 할 것이다.



Ⅰ. 요한의 고백.(19~22)

광야에 나타나 회개를 외치며 세례를 베푸는 침례자 요한을 전해들은 예루살렘 산헤드린공회를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은 그의 실상을 확인하고자 대표자들을 뽑아 요한에게 직접 확인을 한 것으로 이해된다. “…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19b) 한 것으로 봐서 이들의 질문에 요한이 조금도 거리낌없이 자신을 밝히는 진솔함을 볼 수 있다.

그러한 종교지도자들에게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20) 한 것으로 미루어 저들의 질문이 처음부터 예언된 그리스도인지 물었던 것 같다.

이미 복음서 들에 보면 이러한 내용들이 더러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눅3:15)

나중 예수께서 성전에 다니실 때에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요10:24)라는 질문을 예수께 직접 던진 것으로 봐서 이들에게도 그리스도는 분명 기다려지는 하나님의 약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이 요한의 답변의 자세와 내용이다. 두 번씩이나 “드러내어 말하고, 드러내어 하는 말이” 한 것인데 “드러내어[ὁμολογέο,(한 마음에서 유래하여) 동의하다, 인정하다, 고백하다, 찬양하다, 선언하다]”는 의미상으로 우리 말로 번역된 ‘드러내어’라는 말 보다는 고백하고 선언하는 내용이 더 강하다.

거기에 이은 유대 대표자들의 질문은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21f) 묻는데 이것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4:5~6)는 말씀에 근거한 것으로 그리스도 이전에 반드시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를 보낼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질문에도 “이르되 나는 아니라”고 답변하는데 세례 요한은 사실 외형적으로나 성격상으로 엘리야와 닮은 부분이 많음에도 말라기서에서의 예언이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라는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전의 상태와 더불어 말하기 때문에 초림 예수를 준비시키는 입장에서 이것을 부정한 것 같다.

다시 유대인들은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묻지만 여기에도 “대답하되 아니라”고 답변을 한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신명기18:15에 모세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는 말씀 때문에 역시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바로 이 예언한 선지자를 “그 선지자”로 칭하고 있었고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또다른 표현이었기 때문에 요한은 역시 “아니라”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역시 세례 요한의 진실성으로 봐야 할 것이다. 침례 요한의 사명이 길지 못하고 단순히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들어내는 역할이었지만 자기에게 잘 못 돌아올 영광을 온전히 거절하고 자신은 빛이신 그리스도를 세상에 들어내는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함을 보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오늘 같은 사명을 가진 우리가 가져야할 귀중한 자세이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의 대표는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질문을 퍼붓는다.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22) 누구든지 자신들이 이미 만든 어떤 생각을 가지고 다가서면 자신의 답변에 맞는 말을 듣기까지는 만족하지 못함을 본다. 그러나 요한은 이제 자신의 사역과 역할을 분명히 선언하는 것을 연이어 보게 된다.



Ⅱ. 요한을 통한 예언 성취,(23~28)

침례 요한은 자신의 역할과 정체성을 이제는 분명히 선포한다.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23) 이 답변의 배경은 당연히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40:3)는 것인데 먼저 선택된 백성들에게 굴곡이 심한 마음을 회개하고 준비시켜 그리스도를 맞을 준비를 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에 근거한다.

당시에 하나님을 순종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비롯한 사람들의 마음은 안타깝게도 동물이나 식물이 생존하기에 적합하지 못한 광야같은 메마르고 거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맞는다면, 주께서 직접 비유로 말씀하신 길가와 같은 상태(마13:4, 19)에는 아무리 좋은 씨를 뿌려도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먼저 이스라엘을 위해 세례 요한을 보내셨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도 거절되고 만 샘이다.

그리고 다시 묻고 있는 사람들을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24)고 다시 확인하고 있는데 이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앞에 v19에서 말하는 대로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사두개인들이므로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 할 때 산헤드린공회에서 보낸 사람들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25) 이들의 질문이 이사야의 예언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평탄하게 하기 위해 회개를 당부하는 침례 요한의 세례는 정결예식의 하나로 오히려 합당한 것임에도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째서 세례를 주느냐는 앞뒤가 맞지 않는 영적이지 못함을 드러내고 만다.

마태복음서에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마17: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11~12f)라는 대화를 보면 이들은 역시 세례 요한도 믿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대한 요한의 답변이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26~27) 했는데 뒤에 가서 다시 설명되지만 자신의 세례는 분명히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의미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26) 요한은 자신의 본연의 임무가 사람들의 마음을 평탄케 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는 일임을 말하고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26b)라고 지적함으로서 저들의 영적인 무지를 지적하고 있다. 분명히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요한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거절함을 알고 바른 이해를 해야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리석은 질문을 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3:4, 니고데모처럼]

앞에서 이미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10~11)라는 사도 요한의 지적처럼 이들의 영적인 어리석음으로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없었음을 책망 받고 있다.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27f)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먼저 온 즉, 연륜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하늘의 법칙은 다르다.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19:30)는 이치 역시 세상적으로는 설명되지 못한다.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27b) 자신의 집에 방문한 손님의 신발끈을 가장 낮은 종이 끄르고 발을 씻기는 이스라엘의 가장 일반적인 일상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시는 것이다. 즉,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할 역할로 왔지만 그분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겸손이다.

오히려 나중에 세례 요한에게 오던 사람들이 주님께로 몰려 간다는 제자들의 보고에 요한은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29~30)고 감사한다.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28) 장소를 언급하는 이유는 이러한 일들이 그만큼 사실임을 증거하지만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베다니라는 장소는 거리나 위치 상으로 볼 때 나사로와 두 누이의 살던 곳이 아닐 수도 있는 다른 지명이다.



Ⅲ. 요한의 사역,(29~34)

이제 세례 요한의 가장 구체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 속에 드러내는 자신의 역할을 하는 내용이 여기에 기록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보낸 질문자들이 돌아 갔는지 계속 있었는지는 언급이 없지만 이 단락은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29f)라고 시작하고 있다.

당연히 예수께서 요한에게 오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끄셨을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함을 본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b) 흥분에 찬 요한의 고백을 듣는 것 같은 감격을 본다. “어린양[ἀμνὸς, amnos, 양]”이라는 표현은 그 배경이 이사야서53:7의 메시야 예언을 근거하지만 NT 성경에 단 4번 밖에 사용되지 않은 귀한 표현이다.

다음 주에 바로 상고하겠지만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36)하였고 에디오피아 내시가 예루살렘에서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서 읽은 이사야의 예언 그대로 였다.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행8:32) 다른 한 곳은 베드로전서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하여 사람의 사죄가 세상의 어떤 보화로 대속 될 수 없음을 증거하면서 한 말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올 메시야를 예언하면서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하였는데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이란 제물이 되기 위하여 죽으러 끌려가는 양으로 세상 죄를 대속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을 정확하게 표현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십자가형을 당한 죄수들과는 다르게 죄가 없으심에도 순순히 자신의 역할을 위한 운명을 받아 드리셨고, 이것이 어쩌면 사형집행을 해본 경험이 많은 로마 군인들에게도 신기한 모습이었던 것으로 복음서들은 전한다. 잠잠히 끌려가 죽음을 당하지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대속의 제물이다.’라는 고백이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30) 이미 앞의 v27에서 자신이 누구냐고 묻는 예루살렘의 대표들에게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고 밝힌바 있었고 이제는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다음으로 나타나는 긴 증거는 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b)고 선언하는 근거를 설명하는 말이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31) 이것은 요한이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와 자신이 해야 될 역할을 분명히 하고 있는 내용이다. 물론 바로 뒤에 이 사실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32)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나오심을 설명한 것처럼 정확한 상황을 해설하고 있다.

여기 두번씩이나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31f),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33f)”하여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된 것이 결코 세상의 어떤 방법에 의해서 알게 된 것이 아님을 증거한다. 자신에게 그리스도의 오심의 사역을 준비시키신 바로 하늘로부터 알게 되었다는 고백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33~34)

세례 요한은 하늘의 음성을 가려 들을 줄 알았고 자신이 듣고 깨달은 것을 그대로 증거하였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영성이 중요하다. 이런 모든 것은 완료되어 오늘 우리에게는 보이거나 들리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주신 성경의 전체적인 흐름을 바로 이해하고 바로 적용하여 요한과 같은 영성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각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주신 역할이 다르다. 어떻게든 요한과 같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b)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각 사람의 입장과 성품에 따라서는 다르겠지만 이것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 임에는 분명하다.

그런 입장에서 침례자 요한의 역할은 그렇게 영광스럽지 못했고 또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지 역할을 다하면서도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3:30)는 진실된 고백을 하면서 구원의 역사에 쓰임 받은 감격으로 사라져갔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그에게 배울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