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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4:15~22 2019-04-21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읽은 말씀이 지난 주와 연결되어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앞의 내용을 언급해야만 할 것 같다.

주님께서 갈릴리로 가시기 위하여 사마리아를 거치시는 과정에서 수가성의 여인 하나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비교적 사람들의 움직임이 적은 정오에 물을 길으러 우물에 나왔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자 오히려 불평 하듯 질문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10)는 말씀을 듣고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라고 반문한다.

그러나 주님은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b~14)는 생명수에 대하여 말씀하시자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5)라고 조금은 부드러워진 자세로 요청하는 내용이 지난 시간에 나누었던 내용이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역시 계속 연결되는 말씀이지만 편리에 의해서 나눠서 생각하고 이 말씀의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은 사실 다음 주에 다루게 될 것이다.

오늘의 중요한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생수(永生水)를 주실 수 있는 사람은 이 여인처럼 세상의 쉬운 것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위로부터 거듭나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르지 못한 삶을 정리하고 예배에 대한 바른 이해와 삶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여인의 어리석음부터 지적하여 회복하도록 이끄시는 내용이다.



Ⅰ. 사람들은 쉬운 것을 찾는다.(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고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자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9m)라고 대들던 자세는 어디 가고, 다소곳이 요청을 하고 있는데 이 요청은 적어도 두가지 정도이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15f) 사실 사람들에게 다른 것들 돈이건 양식이건 핍절 해지면 견디는 것이 어렵지만 목마름 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고통이라는 것은 겪어보지 않고는 알지 못할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타는 목마름은 앞에서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비단 마시는 물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갖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일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사람마다 갈증을 느끼는 모양과 대상이 다를 수 있다.

사람에게 가장 근본적인 목마름은 바로 영적인 갈증 즉, 하늘의 생명수일 것이지만 이것은 안타깝게도 어느 때나 아무나 느끼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처럼 극한 상황에서이다. 최종적인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느끼게 된다고 하는 데서 사람들은 평상시에는 별로 관심조차 두지않는 부분이다.

지금 이 여자는 ‘그런 물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라는 투로 ‘있다면 그것을 나에게 줘보십시오.’라고 의구심 가득한 모습으로 구하고 있다.

두번째는 “…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5b)라는 간청이었다. 이것은 어쩌면 이 여인에게 있어서는 가장 절박한 진실이었던 것 같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우물가는 여인들의 수다 장소가 되었고 그 수다의 주제는 건설적인 것 보다는 흉보고 비방하는 일로 피곤한 여인들의 삶의 스트레스를 푸는 장소였다고 전해진다.

그런 입장에서 이 여인은 충분히 이러한 숫한 여인들의 입방아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고 어쩌면 과거에 그런 일을 한번이라도 당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기 위하여 남들은 다 한가로이 오침(午寢)을 즐기는 이 시간에 한낮의 더위를 무릅쓰고 물을 길러 왔다가 불행 중 다행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행운을 잡았을 것이다.

그런 입장이다 보니 당연히 이 우물가에 오는 것 자체도 안했으면 좋겠다는 자신의 속내를 주님께 내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물을 긷는 이유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희생 이기도 하지만 이 여인은 그야말로 마지못해 물을 길러 나왔기 때문에 이런 하소연을 주님께 드리고 있는 것이다.

‘우물에 오지 않고 필요한 물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지극히 인간적으로 쉬운 해결점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 여인은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5)라는 간청을 우리 주님께 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선물(은혜)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이지만 무엇이든지 받을 준비와 자세가 되어있지 않다면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여인에게 다음의 요구를 하고 있고 중요한 것은 “영생”이라는 선물도 역시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을 받을 수 있도록 사람들을 복음으로 초청하고 있는 것이다.



Ⅱ. 올바르지 못한 삶이 정리되어야 한다.(16~19)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만 동문서답(東問西答)을 하신 것이 아니라 어찌 보면 이 여인에게 도 동문서답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시다.

여인은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5)라 하였는데 주님은 그 말씀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듯 한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16)는 요구를 하신다.

지금 이 여인에게 주시려는 것이 스스로는 들고 갈 수 없는 무거운 것이었다면 ‘네 남편을 데려와서 들고 가라!’ 하실 수도 있겠지만 주님께서 주시려는 것은 그런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주님의 요청이 실상은 그녀의 속까지 드려다 보시고 여인으로 하여금 지금 자신의 형편을 가장 바르게 알게 하시려는 주님의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항상 자신을 보려고 하지 않고 상대만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사자성어가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평상시 대부분의 상황에서 자신 스스로를 보려 하지 않는다. 항상 대상을 보려고 하는 것 때문에 문제해결이 쉽지 않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만나기만 하면 이 여인처럼 자신을 돌아보게 되기 때문에 문제들을 해결 받게 되는 경우도 많다. 이런 이유에서 주님께서는 이 여인이 생각없이 쉽고 어설프게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도록 하기 위하여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16) 말씀하신 것을 계속되는 내용에서 이해하게 된다.

여기에 대해 여인은 어두운 표정을 지으면서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17)라는 고백을 드리고 있다. 사람들 중에는 이 여인처럼 몸과 마음이 하나되지 못한 모양만 부부 같은 사람들이 더러 있을 수 있다. 그런 입장에서 주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자신의 사실적인 삶을 돌아보게 하시려고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16) 말씀하셨다.

어쩌면 하나님의 은혜나 긍휼은 누구나 얻을 수 있지만 자신이 죄인임을 바르게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요청에 순종할 때 은혜를 얻을 수 있는 신앙적 이치를 동일하게 적용하고 계신 것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17b) 이 여인의 비참한 운명을 들여다 보시고 계신 우리 주님은 이 가련한 힘없는 어린양 같은 여인을 그러한 절망적인 인생의 수레바퀴 사이에서 끌어내 주시려고 어쩌면 이 여인의 가장 아픈 부분을 들춰내게 하신 것이다.

이 여인 뿐이겠는가! 주님은 나면서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우리 각자의 인생을 현재로 보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 여인처럼 우리의 문제를 주님께 진실히 내어 놓기를 기대하신다. 그러므로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17b) 하신 말씀은 이 여인의 안타깝고 아픈 운명을 그대로 진술하는 것을 주님께서도 그대로 인정해 주시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히려 여인의 입장에서 그녀의 고백을 해설하시는 것을 듣는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18) 이 말씀은 어쩌면 ‘너에게 남편 노릇을 하던 남자가 이미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도 또 다른 사람과 살고 있지만 그 사람도 진정한 너의 남편은 아니지!’라고 말씀하시는 안타까움으로 이 여인의 고백하는 운명을 수긍하시는 말씀이다.

우리 주님은 모르심이 전혀 없으신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분이라고 우리가 믿고 고백하면서도 각자 스스로의 문제에 대해 이 여인과 같이 주님의 지적을 받으면서도 기꺼이 수긍하지 못하여 해결 받지 못하는 문제들이 사실 많다. 그러나 주님의 분명한 약속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라고 요한을 통해 약속하셨다.

어쩌면 이렇게 기구한 인생이 있을까! 마치 압력밥솥의 실리콘 패킹을 바꾸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의 질서를 깨뜨리고 일대 일의 부부관계를 이렇게 완전히 무시한 인생의 고달픔을 주님은 되돌아보게 하신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 우리 시대의 무질서가 이 여인의 형태와 같은 부부가 아닌 남녀의 관계를 양산하고 있는 비극을 또 다시 보고 있는 것 같다. 평생을 서로에게 메인다는 부담감이 싫어서 육신의 욕구를 채우는 것으로 남녀를 이해하는 동물의 모습으로 전락하고 있는 이 마지막의 역사에 우리가 살고 있다.

여기에 대한 여인의 반응은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19)라고 신기한 듯 고백한다. 어쩌면 꼭꼭 숨기고 만 싶었던 자신의 아픈 운명을 너무나 분명히 읽어 내시는 주님의 말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반적인 사람이 아님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주님을 선지자로 알아본 여인의 반응은 의외로 영적인 방향으로 접근하는 것을 다음의 주제에서 생각하게 한다. 언제나 모든 것은 최종적으로는 영적인 이치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이다.



Ⅲ. 예배에 대한 무지,(20~22)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목말라 마실 물을 구하는 귀찮은 존재로 여겼다가 뜻밖에 자신의 아프고 슬픈 과거를 꿰뚫어 보시는 선지자로 이해하고 자신의 아픈 현실의 해결보다는 좀더 차원 높은 영적인 문제를 꺼내는 이 여인의 모습이 사뭇 진지하기까지 하다.

사실 대부분의 현실적인 삶의 문제는 정신세계에서부터 오는 것들이다. 어떤 상황이나 형편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동물이 아닌 사람에게는 더 중요하고 문제의 실마리를 푸는 열쇠가 되기 때문에 육신적인 문제의 근원은 정신적인 문제에서부터의 접근이 옳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20) 그 때나 지금이나 전통(傳統)을 곧 정통(正統)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고 이 여인도 그런 일반적인 것에서 어느 곳에서 예배하는 것이 보다 더 정통이며 잘 알지 못하는 자신 같은 사람들이 어느 쪽을 택해야 하느냐는 질문이다.

바른 전통을 이어받고 순종하는 것은 중요하고, 전례 되어 오는 것이 바르고 옳은 것이라면 그것을 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올바르지 못한 전통을 고집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 종교는 분명히 주님께서 오셨기 때문에 이집트를 탈출할 때 주어졌던 법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법이 될 것이라고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증거된 사실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 …”(렘31:31~32f)

주님께서도 그 전통이 오히려 하나님의 법을 어기게 되는 이유가 될 수 있음을 종교지도자들에게 지적하신 바 있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막7:8~9; 마15:3)

일년 삼차의 절기를 지키도록 명령 받은 주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이나, 그들과 함께할 수조차 없기 때문에 자신들의 그리심 산에 세운 사마리아인들의 예배 처소도 다 임시적이며 그림자 적이고 자신들의 입장에서 세워진 것들이라는 데서 이제 참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는 시간과 장소들일 뿐이다.

이런 장소와 전통은 더 이상 의미가 없음을 주님께서 일깨우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21) 신앙에 관한한 전통에 얽매일 필요도 없고 장소에 얽매여서는 안됨을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첫째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21f)하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기 위하여 유일한 창구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이 사실 자체가 감사의 제목이다.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의 말을 들으라’고 했어도 혼란할 수 있는데 오늘 마지막 말씀에서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하였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라 하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이유이다.

하나님은 변화산에서도 율법의 중보자인 모세나 선지자의 대표격인 엘리야를 보여주시고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17:5; 막9:7; 눅9:35)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직접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하신 것에 무개가 있다.

둘째로는 장소에 대한 한계를 폐하신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21m)라 하여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서 이스라엘 가운데 완성되었다고 믿는 예루살렘도 사마리아 사람들이 거룩하게 여겼고 복된 곳이라고 여겼던 그리심 산도 거절되고 있는 것이다. 즉, 보이는 것이 거룩한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신다.

셋째는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21b) 하신 것인데 예수님 당시에도 이 말씀의 시제는 미래형이었다. 세례 요한에 의해서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선포된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3:2, 4:17, 10:7) 했던 말씀과 다르지 않다.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인류에게 일반적이긴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를 대속하시는 희생을 치루고 서야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이 여인에게도 다르지 않은 교훈을 주고 계신 것이다.

최종적으로 우리 주님은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22)하셨는데; 응답이 있는지 없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우상숭배와 같은 무지의 예배와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이미 알게 하심으로 그 규범을 따르는 살아있는 예배의 차이를 말씀하신다.

대부분의 땅에서 생겨난 예배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어리석음이 일반적이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해 주셨던 이스라엘에서도 있었던 수없이 반복되었던 하나님 없는 사람들이 만든 신이라고 이름 붙인 대상들에게 행해지는 제사와 예배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의 후손을 통해서 이 인류에 독생자를 보내주시고 이 메시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순종함으로 드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는 산 예배가 있는데 그것은 인류 중에 이를 위하여 선택하신 이스라엘 즉, 유대인에게서 난다고 하시는 약속이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22b) 말씀하신다.

비록 유대인 즉, 이스라엘을 통해서 구원의 약속을 주셨지만 이것은 온 인류를 위하여 주신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1:16) 라고 확인한다.

또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 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3:11; 롬10:12; 고전1:24; 갈3:28) 약속되고 있다.

“…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22b) 이것은 인류 사람들 누구에게나 거절하면 영생에 관한 한은 방법이 없다. 이것은 마치 한국전력에서 보내주는 전기를 끊어버리면 불을 밝힐 수 없는 것이나 수도사업소에서 보내주는 물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수도계량기를 잠가버리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것과 같은 영적인 원리이다.

물론, 한국전력의 전기가 아니라도 전기는 만들어 사용할 수 있고, 수도사업소의 정수된 물이 아니라도 지하수나 판매하는 생수를 사먹을 수 있기 때문에 완벽한 비유는 될 수 없지만 쉽게 말하면 그런 이치로 이해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제 다음 시간에는 이 말씀의 보다 핵심적인 내용을 나누게 될 것이지만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수고없이 얻으려고 하는 어쩌면 또 다른 죄성(罪性)의 모습이 일반적이고 이러한 욕심은 영원을 살려고 하는 욕심에서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가장 값진 희생이 지불되었음을 기억하고 거저 주신 구원이지만 값없이 받았으니 더욱 헌신하려는 자세로 구원을 누려야 할 것이다.

이 독생자의 희생으로 인하여 주어진 구원의 선물을 받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죄악 된 삶이 정리 되어야만 한다. 지금까지의 죄의 대가는 하나님께서 지불하셨지만 과거와 꼭 같은 죄악 된 모습으로는 영생을 누릴 수 없기 때문에 정리되어야만 한다.

비록 과거에는 우상을 숭배하던 어리석 속에 살았지만 이제 알게 된 바른 예배를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예루살렘이라는 장소가 아닌 유대인으로 오셔서 자신의 피를 제물로 드려서 완성된 그의 희생을 기념함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려서 풍성한 생명의 생수를 누리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