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 비신자들과의 관계...
2008-09-15



주님의 은혜가 넘치시길 빕니다.



추석에 가족이 모이면 항상 좋은 감정으로 끝나지 않고 서로 상처를 받고 말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점을 신앙으로 성경말씀으로 어떻게 해결 할 수 있나요?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이점에 대해 신앙인이 누가 토를 달겠습니까. 저도 아멘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되었다고 해서 추석 때 기분 좋게 돌아올 수 있을까요?



탁 터놓고 얘기해서 믿는 신앙인의 고민이 전도 못해서 바울처럼 신앙적인 고민인가요? 대부분은 추석 때 맞닥트리는 인간관계나 어려움들 이런 것들로 괴로워하고 그러는 거 같습니다.



성경질문란에 이 글을 쓰는 것은 정말 성경이 말하는 인간관계의 처세술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유교나 에티켓, 처세술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묻고자 합니다.



항상 은혜로은 말씀 감사합니다.  샬롬.



석님!



억울해 하시긴 하지만 어찌 보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약점 아닌 약점을 가지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감정대로 다 할 수 없고 악한 가운데서도 선을 행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갈 6:9), (살후 3:13), (벧전 2:20), (벧전 4:19)



또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생소한 이름이 아닌 보편화 된 세상에서 가족들에게까지 “예수 천당 불신 지옥” 만을 외친다면 서로의 단절 밖에는 얻을 결과가 없을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처세술이라는 것은 사실 세상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내보내시면서 하신 말씀들 중에 “뱀같이 지혜롭고…” 라는 말씀을 처세술에 응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런 간교함만이 훈련된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믿음의 사람들을 싸잡아 ‘간교한 사람들’로 치부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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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는 힘겨운 말씀도 줍니다. 이 내용에서 친족은 분명히 불신의 가족들도 포함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실 이런 것 저런 것 다 생각하면 복잡하기만 한데 바울 사도를 통해서 주시는 또 다른 교훈은 그런 저런 꼴을 보지 않으려면 세상 밖에 나가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고전 5:10)



그래서 십자가를 지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진실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 자신의 성격대로라면 하고 싶은 말 다 쏘아붙이고 싶은데 그러면 내가 모시는 주님께 영광은 고사하고 욕을 돌릴 수 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지요.



또 적당히 위기를 빠져나가려는 임기응변(臨機應變) 적인 변명도 안됩니다. 믿음생활에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최대한으로 희생하고 주고 진실함으로 그리스도인다운 면모로 지속적으로 대한다면 짧은 시간은 몰라도 훗날에는 그들을 변화 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말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지키는 삶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지금껏 너무 입만 살아 있는 사람들로 세상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것 자체가 사실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요즘 범람하고 있는 [축복]은 너무 세속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사실 믿음에 대한 약속은 현실의 세상에서 다 받지 못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권면을 빌리자면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7) 하였는데 이 구절 속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죄가 관영하고 어두움의 권세 잡은 자들(엡 2:2), (엡 6:12)이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는(벧전 5:8) 이 불합리한 세상에서 석님의 그러한 고민도 포함해서 믿음으로 인한 시련은 당연합니다.



천로역정의 길을 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세상에서 평탄한 삶을 살 것이라는 기대는 애당초부터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 때문에 오는 시련은 이 세상의 어떤 보화보다 귀한 이유는 거기에 대한 분명한 대가가 약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이 세상에서 다 받는 것이 아님도 베드로 사도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입니다. 그 때에 믿음으로 인한 시련을 인간의 방법이 아닌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자기 희생의 십자가를 지고 삶을 믿음으로 인하여 승리한 사람들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사람들이 너무 급하고 기다리지 못하는 데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래 참음이 성령의 열매인 것 같습니다.(갈 5:22)





이래서 바울은 격려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7~18)



여기서 우리의 가치를 표현하기를 18절의 말씀입니다. 영원한 것에 목표를 두는 사람이라면 이 육체에 거하는 잠시 받는 환란을 기쁘게 감당해야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는 나그네들입니다.(벧전 2:11) 본향에 돌아 갈 동안은 타향의 설움도 돌아가 받을 위로로 삼키고 감당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모든 것들은 영원한 세계를 내다보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 하겠지요.



중요한 것은 현실에서 상대를 무릎 꿇게 하는 것만이 진정한 승리가 아닙니다. 현실 속에서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신앙으로 살면 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무릎을 꿀리면 속으로는 저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완력이 아니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무릎을 꿀리고 꿇을 때 그 약속은 우리의 머리로 헤아릴 수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이를 갈면서 “두고 보자!” 라고 분을 삭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웃으면서 주님의 다시 오심의 날을 기약하면서 “두고 봅시다.”를 다짐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는 사람들이 진정한 승리자들입니다.



더 무거운 짐을 지게 하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maranatha!